[한국일보 2014 신춘문예 - 동화 부문] 당선작 : 딱 좋은 날

2013. 12. 3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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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거 받으렴."

담이와 곰이는 쌍둥이 토끼입니다. 엄마는 어느 날, 쌍둥이에게 일기장을 가져왔습니다.

"너희도 이제 일기를 쓸 때가 됐구나."

"일기가 뭐예요?"

담이가 물었습니다.

"오늘 뭘 하고 뭘 느꼈는지를 쓰는 거야."

"그런 걸 왜 써요?"

담이가 또 물었습니다. 담이는 질문하는 걸 좋아합니다.

"하루를 되돌아보는 건 좋은 일이란다."

"기억이 안 나면요?"

담이가 또 물었습니다. 곰이는 하품을 늘어지게 했습니다. 그냥 담이랑 빨리 놀고 싶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하루를 돌이켜 보면 하나쯤은 떠오르게 마련이지. 더구나 넌 기억력이 좋잖니?"

담이의 통통한 볼이 발그레해졌습니다.

"엄마, 그냥 안 쓰면 안 돼요?"

담이가 말했습니다.

"나도 안 쓸래요."

곰이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오로지 너희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 내일 아침에 검사할 거야, 알겠지?"

엄마는 빙긋이 웃으며 쌍둥이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엄마는 숙제를 내고 검사하는 걸 좋아합니다. 여러 가지 벌칙을 생각하는 것도 아주 좋아합니다. 벌칙을 말할 때 엄마 눈동자는 새벽별처럼 반짝거립니다.

담이는 일기를 썼습니다.

"엄마가 일기를 쓰라고 했는데 일기를 쓰기가 싫다. 진짜, 막 싫다."

곰이도 썼습니다.

"담이가 날 때려서 내가 더 세게 패줬다. 바보 쪼다 오리궁둥이."

엄마가 다음날, 일기장을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이런 걸 일기라고 할 수는 없단다. 담아, 일기를 왜 쓰기 싫은지 곰곰이 생각해 봐. 곰아, 다음엔 싸운 걸 반성하는 이야기를 써보렴. 그럼 금방 열 줄이 채워질 거야."

"설마 열 줄을 쓰라는 말은 아니죠?"

담이가 물었습니다.

"아니, 바로 그 말이야. 일기를 다시 써 보겠니? 중요한 건 너희들의 느낌을 쓰는 거야. 알겠지? 느낌!"

"우리 느낌을 알아서 뭐하게요?"

곰이가 물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아무튼 나한테 보여 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써야 돼. 알겠지? 솔직하게!"

"솔직하게 쓴 건데요?"

담이가 말했습니다.

"나도요!"

곰이도 말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쓰지 말고 성심껏 써야지. 알겠니? 성심껏!"

엄마는 담이와 곰이를 다시 한 번 다정하게 보았습니다. 귀에 난 잿빛 털이 쭈뼛 섰습니다. 엄마 말을 듣지 않으면 혼이 날 거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보렴. 일기를 쓰기에 딱 좋은 날이구나."

높푸른 가을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 빨리 놀자."

엄마가 가고 난 뒤, 곰이가 말했습니다.

"일기 때문에 놀 맛이 안 나."

담이가 말했습니다. 곰이도 일기 생각을 하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곰이는 글씨 쓰는 걸 싫어합니다. 세 글자만 쓰고 나면 손가락이 후들거리고 엉덩이가 근질거립니다.

담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는 게, 곰이가 똑같은 거짓말에 두 번 속는 것만큼이나 바보짓 같습니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다 써 주기로 하자."

곰이가 말했습니다.

"바보!"

담이가 퉁을 놓았습니다.

"아아, 그냥 놀고 싶다."

"일기를 안 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어떻게?"

"오늘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되는 거야.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 생각도 안하고."

"그렇구나! 넌 머리가 좋아!"

담이는 낙엽들이 잔뜩 깔린 푹신한 자리를 찾아 쭈그려 앉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좋아!"

곰이도 풀밭 위에 벌러덩 누웠습니다. 햇빛은 따사롭고 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코끝을 간질였습니다. '아무것도 안하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한참 누워 있다 보니 등이 배겼습니다. 콧구멍도 간지럽고 오줌도 마려웠습니다.

"담아, 오줌은 누고 와도 돼?"

"뭐…… 괜찮겠지. 오줌 따위가 기억에 남는 일은 아니니까."

담이가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싸고 와야 돼."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곰이가 중얼거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오줌보에 오줌이 꽉 차 버렸습니다. 곰이가 배를 움켜잡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어떡하지? 어쩜 좋지? 어떻게 해야 아무렇지 않게 싸는 거지?"

어느덧 따뜻한 물줄기가 가랑이를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지나가던 청설모가 곰이를 보았습니다.

"오줌이다! 오줌을 왜 그렇게 싸? 푸하하!"

청설모가 곰이를 가리키며 웃었습니다. 곰이가 울상을 지었습니다.

"놀리지 마아!"

곰이가 대들려고 하자 담이가 곰이를 말렸습니다.

"바보야. 싸우면 너 일기 써야 돼!"

곰이가 청설모를 노려보며 씩씩거렸습니다.

"오줌싸개 똥싸개, 오줌싸개 똥싸개~"

청설모는 곰이를 놀려대며 갈참나무 위로 후닥닥 올라갔습니다.

"녀석 머리통을 한 대 갈기면 속이 시원할 텐데."

곰이가 씩씩거렸습니다.

"빨리 잊어버려야 돼. 안 그러면 기억에 남고 말 거야."

"휴우. 틜?일도 안하는 건 너무 어려워. 아직도 저녁이 되려면 멀었는데. 그냥 혼나고 말까?"

"지난번에 엄마가 하라는 노래 연습 안했다가 '넓다넓어' 호수 열두 바퀴 돈 거, 기억나지?"

"맞다. 산수 문제 안 풀었다고 '높다높아' 산꼭대기까지 토끼뜀했잖아."

청설모가 저만치서 폴짝폴짝 뛰며 쉬가 마려운 흉내를 내고는 저 혼자 낄낄거렸습니다. 곰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못 참아. 이러다가는 분통 터져 죽겠어."

"조금만 참아 봐. 너 때문에 나까지 정신없잖아."

담이가 곰이 꼬리를 잡아 억지로 자리에 앉혔습니다.

"흐흑. 흐으윽. 다섯 대만 때려 주면 소원이 없겠어……."

곰이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습니다.

"얘야, 왜 우니? 어디 다쳤니? 아니면 마음이 아픈 거니?"

그때 마음씨 좋고 참견 잘하는 오소리 아줌마가 곰이에게 다가왔습니다.

"산다는 게 그런 거란다. 눈물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 이런 말 들어봤니? 아픈 만큼 큰다고……."

아줌마는 한참을 주절주절 떠든 뒤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자, 받아라. 나쁜 일이 있으면 또 이렇게 신나는 일도 있는 법이지. 그래서 세상은 살맛이 나는 거 아니겠니? 호호호호호."

아줌마는 곰이에게 당근사탕을 주었습니다. 곰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입니다.

"아줌마, 고맙습니다!"곰이는 눈물을 쓱 닦고 활짝 웃었습니다. 아줌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담이도 아줌마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아줌마는 그저 미소만 짓고는 가던 길을 갔습니다.

곰이가 사탕 껍질을 벗기자 담이가 말했습니다.

"사탕을 먹으면 당연히 일기를 써야지. 그런 좋은 일을 안 쓸 수는 없어. 여태까지 노력한 게 아깝잖아. 나라면 내일 먹겠어."

곰이는 뭔가를 곧잘 잃어버리고 금세 잊어버립니다. 내일이 되면 사탕을 받은 사실조차 잊고 말 겁니다. 담이는 그때 사탕을 차지할 생각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어."

"어떻게 사탕 같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냐?"

"사탕이 아니라 물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건 진짜 어렵고 바보 같은 짓이야. 사탕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나라면 내일 먹겠어."

"그래도……."

곰이는 껍질에 싸진 사탕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사탕을 잘게 부숴서 한 조각 정도만 먹는다면 괜찮을지도 몰라. 돌멩이 가져와 봐."

담이는 돌멩이로 사탕을 깬 뒤 사탕조각 하나를 곰이에게 주었습니다. 곰이는 날름 받아먹었습니다. 사탕조각은 금세 혀끝에서 녹아 버렸습니다.

"부스러기는 내가 처리할게."

담이가 자잘하게 부스러진 사탕가루를 입안에 쏟아 부었습니다. 곰이는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자, 이건 내일 먹는 거다."

"한 조각쯤은 더 먹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러다가는 어느 새 다 먹고 말 걸? 잘 때까지 사탕 맛이 입에 남아 있을 거야. 지금 그만두는 게 좋아."

곰이는 사탕을 주머니에 넣고 바닥에 털퍼덕 앉았습니다. 사탕 생각만 하니까 시간이 더 안 갔습니다. 곰이는 누웠다 앉았다 또 누워서 몇 번을 뒤척이더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담아!"

"또, 왜?"

"도저히 못 참겠어. 사탕 때문에 너무 괴로워."

곰이가 남은 사탕조각을 주머니에서 다시 끄집어내려고 할 때였습니다.

"큰일이다, 큰일! 큰일났어!"

청설모가 팔짝팔짝 뛰어왔습니다.

"너희 엄마가 물에 빠졌다!"

"뭐?"

"뭐어?"

담이와 곰이는 청설모를 따라 깡충깡충 뛰어갔습니다. 갈참나무가 우거진 길을 지나자 냇물이 보였습니다. 동물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흑곰이랑 멧돼지 아저씨가 내려준 나뭇가지를 붙들고 엄마는 한참을 끙끙댔습니다. 동물들은 모두 가슴을 졸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영차, 여엉차!"

동물들이 한목소리로 응원을 했습니다. 엄마가 드디어 땅위로 올라왔습니다. 모두들 둘러서서 박수를 쳤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고마워요!!"

엄마는 물에 쫄딱 젖어 달달 떨며 말했습니다. 뒷발을 조금 긁힌 것 말고는 괜찮아 보였습니다.

"엄마!"

"엄마아……!"

담이와 곰이는 엄마 품에 와락 달려들었습니다. 엄마는 둘을 꼭 안아 주었습니다.

엄마는 집에 들어와 몸을 닦고 뜨거운 차를 마신 뒤 한참을 떠들었습니다.

"세상 일이 참 뜻대로 안 되더구나. 오늘은 너무 바빠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다녔거든. 그러다 발을 헛디디고 만 거야. 덕분에 찬찬히 나를 돌아보게 됐지.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고. 나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다니……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담이는 엄마가 가슴이 벅찬 나머지 일기 검사 따위는 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이제 사탕 먹어도 되지? 사탕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 일이 생겼으니까."

곰이는 남은 사탕을 입에 몽땅 털어 넣고 와자작 깨물어 먹었습니다.

"이 욕심쟁이!!"

담이가 울상을 지으며 곰이 입을 쥐어뜯었습니다.

"왜! 내 사탕인데!!"

곰이가 담이 뺨을 꼬집었습니다. 둘은 한데 뒤엉켜 싸웠습니다. 엄마가 둘을 겨우 말렸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싸울 생각이나 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일기장 펴! 오늘 어떤 짓을 했는지 반성해보렴. 제대로 안 쓰면 알아서 해! 어떤 벌칙이 알맞을지 밤새 생각할 테니."

엄마가 돌아간 뒤에도 둘은 한참을 투덕투덕 싸우다 지쳐 벌러덩 드러누웠습니다. 담이가 말했습니다.

"휴우.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엔 하루가 너무 길어."

"맞아."

"오늘 일어난 일을 다 쓰면 열 줄도 넘을 걸?"

"한 열두 줄?"

"하지만 절대로 열 줄은 안 넘길 거야."

"그럼.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지."

그러고 나서 둘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했습니다. 멀리서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일기 쓰기에 딱 좋은, 사늘한 가을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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