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안정국' 실태와 폐해]내란음모 사건·종북 매도.. 고비 때마다 '신공안' 이슈로 현안 덮어

김기범·박철응·송윤경·이재덕·정희완 기자 2013. 11. 28.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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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든 현안 삼키는 블랙홀

공안정국의 폐해는 우리 사회의 주요 현안을 '종북'의 틀에 가둬 집어삼킨다는 점이다. 국가정보원 대통령 선거 개입사건 수사가 정권을 위협하자,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 자식 논란을 꺼내는 식이다. 복지정책 확대 논의가 사회적으로 힘을 받자, 이를 주도한 세력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일도 빚어졌다. 현안을 다른 현안으로 뒤집고 덮어, 공안정국의 블랙홀로 빠뜨려 매몰시키는 모습이다. 의혹은 증폭되고, 공약은 후퇴하거나 폐기되지만 제대로 된 소통은 없다. 기초연금 등 공약의 후퇴에 대한 정당한 이의제기는 무대응으로 일관한다. 대통령은 유리하면 말하고, 불리하면 침묵하는 '외방향' 소통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한국 사회는 '정당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후진적 민주주의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1) 복지연금 공약 파기 논란 땐 '회의록' 수사 발표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 지급'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등 복지부문 공약은 박근혜 대통령 대선공약의 핵심 축이었다. 1년이 지난 현재, 이 같은 공약들은 대폭 후퇴하거나 전혀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음에도 이슈 자체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다. 본격적으로 갑론을박이 시작되려 할 때마다 묘하게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국정원 정치·선거개입, 통합진보당에 대한 검찰과 정부의 '특별발표'가 불쑥불쑥 튀어나온 탓이다.

정부가 기초연금 공약의 이행계획을 발표한 것은 9월25일이다. '월소득 83만원 이상'의 노인은 제외하는 하위 70%로 좁혀졌을뿐더러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지급액을 깎는 방식이었다. 여러 소득 중 유독 국민연금액만을 골라 차등을 두는 방식에 국민연금 장기가입자들의 불만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 이행계획에 반대한 진영 전 복지부 장관은 '양심의 문제'라면서 결국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26일 국무회의에서 "어르신께 죄송하다"면서 "공약포기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기초연금안에 대한 갑론을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가 복지공약 논쟁을 비춘 건 '반짝'이었다. 10월2일 검찰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본을 노무현 대통령 지시로 삭제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시기는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시점이어서, 공약 파기로 수세에 몰린 정권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같은 달 15일 국감이 시작되면서 복지공약 이슈가 다시 주목을 받을 기회가 돌아왔다. 국감에서는 기초연금 공약의 '사회적 합의기구'로 설치, 운영했던 국민행복연금위원회(행복연금위)에서는 아무도 '국민연금 연계'안을 제안하지 않았고 오히려 처음엔 모두 반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영 장관을 배제하고 청와대에서 기초연금 법안 설계를 지휘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하지만 같은 달 18일 '국정원 정치·선거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의 팀장인 윤석열 여주지청장이 수사팀에서 배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까지도 기초연금 이슈의 맥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다. 임의가입자 중 자발적 탈퇴자 숫자가 정부안 발표 뒤 한 달 만에 배 이상 치솟은 사실이 드러났고 나아가 정부안이 기초연금액을 현행 기초노령연금처럼 국민소득과 연동하지 않고 물가에 연동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20년 후엔 '반값'이 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11월6일 정부가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켜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청구한 이후부터 주요 이슈는 정상회담 회의록·국정원 대선개입·통합진보당에만 맞춰졌다. 심지어 문형표 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12, 13일 진행됐지만 기초연금에 대한 논쟁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잊혀진 복지공약은 기초연금뿐만이 아니다. '암·심장·뇌혈관·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공약의 경우, 정부는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 등 3대 비급여 개선방안의 최종 발표는 연말로 미뤄놨다. 다만 이에 앞서 2~4인실도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상급병실료), 선택진료비 폐지 혹은 대폭 축소 등의 '개선방향'을 일부 내놓았지만 이를 두고 이해관계자인 병원들의 반발만 커지고 있다.

<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

(2) 노동·환경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 '좌파'로 덧칠

지난 7월 울산으로 향했던 현대차 희망버스는 엔진이 식기도 전에 십자포화를 맞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좌파 단체들이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죽봉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고 하자, 경찰은 "배후 조종 세력을 찾겠다"며 즉각 수사에 나섰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불법 폭력 행위자는 끝까지 추적해 엄단"할 것을 지시했다.

현대차는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지 않고 있다. 희망버스가 갔을 때는 최병승·천의봉씨가 278일째 철탑 농성을 벌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였다. 현대차 희망버스가 시동을 걸 수밖에 없었던 본질이다. 하지만 정부와 재계는 '좌파'와 '배후 조종 세력'이라는 포장을 씌워 본질을 가리려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전에 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사업장에 대한 특별 근로감독과, 쌍용차 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약속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 총회에 보낸 인사말에서는 "공무원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계신 14만 조합원께 격려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후 특별 근로감독과 국정조사는 물거품이 됐고 전공노의 합법화 요구는 거부당했다. '격려'는커녕 대선 때 선거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전공노 홈페이지 서버를 압수수색했다. "국정원만 댓글을 단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물타기'라는 지적이 나왔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는 법상 '노조 아님'이라는 딱지를 붙이려 했으나 법원이 전교조의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일단 유보된 상태다.

밀양에서는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매일 부상을 입으면서 인권침해 논란까지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이 2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있지만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전력은 계속해서 주민들을 분열시키고 위협하는 행태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검증 및 조사작업은 국무조정실 산하에 조사평가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사실상 한발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 조사평가위는 지난 9월 중립성 논란으로 장승필 전 위원장의 사퇴와 야당 및 환경단체의 참여 거부로 실질적인 활동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현장 조사를 수행할 조사작업단을 법인으로 설립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지만 환경단체들이 동참할 가능성이 없는 탓에 무의미한 조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 박철응·김기범 기자 hero@kyunghyang.com >

(3) 국가기관 선거개입이석기 사건 등 돌출 '물타기'

올해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달군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국가정보원과 경찰, 국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의 정치·대선개입 의혹이다. 국가 정보기관 등이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확인된다면 정부·여당에는 막대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여당이 수세에 몰릴 때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논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음모 사건 등 각종 '공안' 이슈들이 터지면서 국가기관 대선개입 문제가 '물타기'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6월14일 검찰은 불법으로 정치·선거에 개입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등)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커뮤니티 등에 정치·선거 관련 글을 게재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검찰 수사 결과로 확인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비판하는 집회가 잇따라 열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러나 같은 달 20일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정원이 보관하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을 열람한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정국의 관심은 온통 'NLL' 논란으로 쏠리고 말았다. 이후 군 사이버사 소속 군인과 군무원들이 지난해 총선과 대선 당시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선거 관련 글을 올렸다는 의혹도 제기되면서 파문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지난 8월 국정원이 터뜨린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은 국정원과 사이버사의 대선개입 진상규명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한몫했다.

검찰은 또 지난달 국정원 직원들이 트위터상에 121만여건의 대선·정치 관련 글을 올리거나 리트윗(퍼나르기)한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에 대한 낙선운동 사이버 '삐라'가 무차별 살포된 것이 확인되면서 종교계 등을 중심으로 박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22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가 연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원로신부가 한 '연평도 포격' 관련 발언에 대한 '종북 공세'가 벌어지면서 국가기관 대선개입 문제는 다시 묻히고 있다.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

(4) 경제민주화정책 실종·관련 법안 처리도 못해

대선 전부터 불기 시작한 경제민주화 바람은 올해 하반기부터 잦아들기 시작했다. 경제민주화와 갑의 횡포 등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던 시민사회단체들은 "현장에서는 예전과 다른 신공안정국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토로했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함께 '피해 대리점주 보상' '경제민주화 이행 촉구' 등을 주장하던 참여연대에서는 최근 1인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 인턴 4명이 시위 포기 의사를 밝혔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1인 시위 참가자에게 경찰이 시비를 거는 등 활동 자체를 방해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며 "경찰도 최근 공안정국 분위기에 압박감을 느끼는지 강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인 시위 자체를 포기하는 이들도 일부 생겼다"고 말했다.

정·관계에서는 "올해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은 물 건너갔다"는 말이 나온다. 순환출자금지(독점거래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대주주 적격성 심사 확대(금융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감사위원의 분리 선출 및 의결권 3% 제한(상법) 등 국회에서 논의해야 할 경제민주화 법안이 산적해 있지만 올해 안 통과는 고사하고 논의조차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결산, 예산안 등을 처리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국정원 관련 이슈, 국가보훈처 대선개입 의혹,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건 등으로 국회가 마비된 상태에서 경제민주화 법안 처리는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법안 처리가 답보상태에 빠지면서 재계는 안도하고 있다. 지난 9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들은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대응방안을 협의했다. 당시 재계는 "순환출자금지법 등 경제민주화 법안이 경영권에 위협을 줄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재계의 우려는 9월 이후 사라졌다.

<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

< 김기범·박철응·송윤경·이재덕·정희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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