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교육 오늘의 역사] 1900년 오늘 8개국 연합군, 중국의 베이징을 함락

입력 2013. 8. 14. 08:30 수정 2013. 8. 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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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MT교육 정도원기자]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점령하고 열병식을 하고 있는 8개국 연합군.

1900년 오늘(8월 14일) 의화단 운동으로 인한 혼란의 와중에서 8개국 연합군이 중국의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공자의 출신지인 산둥성에서 서양과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의화단 성장

애로호 전쟁의 결과 체결된 텐진 조약에서 청나라 내륙에 대한 포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은 청나라 내륙 깊숙이 침투해 기독교를 선교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이 외국인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관료와 지방 수령들조차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일부 청나라 백성들은 지방 수령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선교사라는 것이 눈치채고, 기독교에 귀의해 선교사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다. 그 중에서는 이웃 사람과 논밭의 경계를 두고 다투다 기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외국인 선교사 및 중국 기독교인들의 행패는 민심의 불안을 야기했다.

1898년 독일이 칭다오를 조차받고 영국이 이에 대항하여 웨이하이를 조차받으면서 산둥성으로 열강의 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산둥성은 옛 노나라의 도읍인 취푸가 있는 곳으로 공자의 출신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외국인 선교사 및 중국 기독교인들과 전통 세력의 대립은 그 어느 곳보다 극심했다. '부청멸양'을 내세우는 의화단은 산둥성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광서제 복권시킬 것이라는 헛소문에 서태후, 열강에 선전포고

산둥 순무 위셴이 의화단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열강은 청나라에 압력을 넣어,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산둥 순무로 부임해 의화단을 탄압했다. 그러자 의화단은 성외로 흩어져 직예성(베이징과 텐진 일대)으로 되레 세력을 확대했다. 베이징의 의화단원의 수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의화단원들은 부청멸양을 외치며 철도와 전신을 파괴하고 다녔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인 광서제는 변법 자강 운동(무술변법)의 실패(백일천하, 무술정변)로 인하여 유폐되어 있었으며 정치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의화단으로 인해 외국인에게 불리한 정세가 조성되자 열강은 1900년 5월 텐진의 다구 포대를 무단으로 공략하여 점령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으로 진격해 광서제의 친정 체제를 복원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자 격분한 서태후는 "중국이 당하고 있는 치욕이 극에 달했다"며 "이제 바랄 것은 그저 민심 뿐"이라며 열강에 선전포고했다.

선전의 조칙이 내려지자 의화단원들은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던 독일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와 일본 공사관 스기야마 아키라 서기관 등을 죽여 사태는 격화되었다.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일본의 8개국은 서로간의 다툼을 잠시 잊고 8개국 연합군을 결성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 8개국 연합군에 짓밟혀… 서태후는 옛 수도로 탈출

20만의 의화단과 4만의 청나라 팔기군은 2만 명도 되지 않는 연합군에 비하여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기도 높았으나, 장비면에서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며 특히 의화단은 칼이나 창 같은 재래 무기조차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이렇다할 전술이나 전략, 작전조차 없이 무조건 돌격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승리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1900년 8월 14일 연합군은 베이징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이후 약 1년간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은 연합군에 의해 직접 다스려졌다. 연합군 장병들은 자금성의 국보급 보물들과 황족·귀족의 저택·별장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 파괴했다. 이 와중에 이화원과 같은 찬란한 청나라 황실의 문화 유산도 큰 손실을 피해가지 못했다. 심지어 이 기간 베이징에는 장병들이 약탈한 문화 유산을 돈으로 바꿔주는 약탈물 환전 시장이 열릴 정도였다.

한편 서태후는 베이징 함락 직전에 탈출해 내륙의 시안(옛 장안)으로 달아났다. 광서제를 베이징에 남겨두면 황제인 그가 열강과 단독으로 강화하고 친정 체제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도 강제로 납치해 함께 시안으로 탈출했다.

◆서태후 강제로 열차 태워지며 비로소 서양의 힘 깨닫고 개혁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열강은 이 기회에 인도처럼 중국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속셈으로 1900년 9월 독일의 알프레트 폰 발더제 백작을 총대장으로 삼아 7만여 명으로 병력을 증강했다. 발더제는 당초 서태후를 쫓아 시안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곧 비현실적임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는 "열강의 모든 힘을 합하더라도 중국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것조차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후 시안의 이른바 '몽진 조정'과 열강은 협상을 시작해 1902년 1월에야 서태후는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열강의 강경한 요구에 의해 난생 처음으로 증기기관차를 타고 철도를 통해 상경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열강과 신문물의 강력한 힘을 비로소 절실히 체감한 서태후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이른바 광서 신정을 통해 입헌군주제 도입·군의 근대화·산업 진흥·과거제 폐지·교육 개혁 등을 추진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수락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부과된 4억5000만냥의 배상금(당시 청나라의 1년 세입은 8800만냥)이 너무 무거워 개혁이고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재원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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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MT교육 정도원기자 united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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