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지옥 드레스덴
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 한국인들에게는 한때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포의 땅이었으나,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전쟁과 학살, 마피아, 경제적 혼란으로 표상되는 나라들이다. 작가 유재현이 지난 6개월여 동안 CIS와 동유럽의 깊숙한 내면을 탐사하고 돌아왔다. 〈시사IN〉은 지금도 방진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체르노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알려진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 등에서 작가가 울고 웃고 분노하고 회한에 떨었던 기록을 연재한다.
1943년 미국 하버드 대학의 비밀연구소에서 개발이 완료된 네이팜 폭탄은 2차 세계대전 후반과 뒤이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되면서 인간에게 지옥의 불구덩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화학적으로 젤리 성분을 구현하고 인을 섞어 기존 소이탄을 획기적으로 개량한 신무기인 네이팜탄은 ‘끈적한 휘발유’를 구현해 불이 뼈에 이를 때까지 살을 태우는 폭탄이었다. 물론 1000℃에서 3000℃에 이르는 고온으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효과 역시 향상되었다. 네이팜탄은 특히 미군의 일본 공습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1945년 3월10일의 도쿄 공습은 고작 3시간의 폭격으로 1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41㎢의 면적을 초토화시켰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네이팜탄의 본격적인 무대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 폭탄을 베트민 게릴라들에게 사용했다. 1969년 다우케미컬이 15~30초의 발화 시간을 10분으로 늘린 네이팜B의 개발을 완료하면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말 그대로 불의 전쟁이 되었다.

1911년 단엽기를 몰던 이탈리아군의 지울리오 카보티가 트리폴리 상공에서 수류탄 하나를 던진 것으로 시작된 폭격이 본격적으로 불바다가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다. 폭격기의 성능이 대폭 개선되었고 소이탄이 발달하면서다. 진정한 불지옥은 전쟁 말기에 등장했는데 태평양전쟁에서는 일본이, 유럽전쟁에서는 독일이 불의 실험장이었다. 융단폭격이 등장한 것도 이때이고 이른바 블록버스터가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독일에서는 쾰른과 함부르크·드레스덴·베를린이 지옥의 불꽃에 휩싸인 대표적 도시였다.
드레스덴의 올드타운이 있는 엘바 강변의 브륄 테라스. 낮게 드리운 구름 아래로 강물은 고적하게 흐르고 아우구스트 다리 앞의 선착장에는 유람선 한 대가 한가롭게 정박해 있다. 관광객들이 오가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길에서 한때 이 도시가 휩싸였던 지옥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어렵지도 않다. 미술아카데미 건물의 돔 앞에 세워진 조각들은 하나를 빼고는 모두 검은 대리석을 쓴 양 시커멓다. 소이탄 화염에 타버린 조각들을 찾아 원래의 자리에 올려놓아 그렇다. 1945년 2월13일에 이루어진 미·영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은 도시의 90%를 파괴하고 대부분이 민간인이던 2만5000명에서 최대 13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800대의 폭격기가 동원되었고 2차에 걸쳐 투하된 폭탄은 4000t에 달했다. 쾰른, 함부르크에 뒤이은 대대적인 융단폭격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름 없는 주검들
드레스덴 왕궁 벽의 102m짜리 타일 벽화 또한 공습에서 살아남은 드문 경우이다. ‘군주들의 행차’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이 벽화에는 작센과 튀링겐 등을 지배했던 베틴 가문의 공작이거나 왕이었던 35명이 그려져 있다. 1889년에 평범한 벽화로 그려졌던 것을 1904년부터 오래 보존하기 위해 자기 타일 2만3000여 개로 바꾸기 시작해 190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고귀한 자들이 말 등에 올라 시중을 받으며 보무당당하게 나아가는데 가장 마지막에 깃발을 든 뒤로 일군의 평민들이 터덜터덜 쫓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벽화의 그들은 공습에서 정말 힘들게도 살아남았다고 한숨을 쉬는 듯하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평범한 인간이 목숨을 잃었던가.
드레스덴의 하이드 프리도프 공동묘지에는 공습의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습으로 타버린 시신들은 신원을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공습 후에 전쟁포로와 죄수들을 동원해 산더미처럼 쌓은 시신들을 나치는 화염방사기로 태워 재로 만드는 편을 택했다. 모두 이름 없는 주검이 되어야 했다. 드레스덴 공습으로 몇 명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과 독일을 대상으로 했던 무자비한 공습이 대량학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조차 없다. 이게 대량학살이 아니라면 나치의 홀로코스트 또한 대량학살로 단죄할 수 없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과 드레스덴의 아파트 지하 방공호에서 불에 타고 질식해 숨진 독일인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역사가 늘 승자의 편이라고 해도 진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집단살해와 반인도주의는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첫 번째 요건이다. 영국 폭격사령부의 작전분석관이었던 프리먼 다이슨은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감옥에 갔거나 교수형을 당한 반면 나는 자유롭다는 것뿐이다.”
옅은 안개가 깔린 이른 아침 뉘른베르크 거리는 평범하다. 독일 여행은 옛 동독 지역으로 한정했기 때문에 원래의 여정에는 없었던 도시이다. 스쳐지나가듯 들른 이곳에서 뉘른베르크 법원 앞에 잠시 멈추었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 거리는 한산했다. 종전 후 소련은 독일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베를린에서 열자고 제안했지만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베를린에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미군 점령지였던 뉘른베르크 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제법 규모가 큰 법원 건물이 멀쩡했고 죄수들을 수용할 부속건물도 마련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1933년 이후 뉘른베르크가 매년 나치가 전당대회를 열면서 위용을 과시하던 도시였던 점도 얼마간 작용했을지 모른다. 도로변의 정문에서는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전범재판 기념관은 오른쪽 골목에 들어서야 입구를 볼 수 있다. 입구 안쪽의 주차장 한편에 기념비라고 할 만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미국과 영국, 소련과 프랑스 등 당시 전범 재판을 주도했던 나라들의 국기를 이용해 디자인한 조형물이다. 제법 깔끔한 디자인인데 배치가 묘하다. 프랑스와 영국이 앞서 있고 소련과 미국이 뒤로 물러서 있다. 가장 뒷자리를 차지한 소련은 어떤 위치에서 보아도 절반이거나 3분의 1쯤이 가려져 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의 역사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1948년 12월 ‘집단살해 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이 등장했고 조약이 명시했던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우여곡절 끝에 54년이 지난 2002년 7월에야 모습을 드러냈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줄기차게 전쟁을 벌여왔던 초강대국 미국이 비준을 거부해 절름발이 처지를 면치 못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은 계속되었다. 한국전쟁과 1,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물론 중동전쟁과 이라크 전쟁,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단죄가 실종되고 승자의 논리와 제국주의 논리만 관철되는 가운데 전쟁의 참상은 쉼 없이 지구 곳곳을 피로 물들여왔고 인류는 오히려 뉘른베르크에서조차 퇴보한 현실을 경험해왔다.
1934년 9월5일 시작한 뉘른베르크의 나치 전당대회에서 히틀러가 광기를 보일 때 그 앞에 운집한 70만명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나치의 프로파간다 영화인 〈의지의 승리〉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70만명 중 몇 명이 살아남았고, 그 70만명이 무고한 인간을 몇 명이나 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지옥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줌의 전쟁 미치광이들이 탄생할 때 광기를 막아야 하고 막을 수 있는 다중이 보인 이런 우둔함이 인간의 본성이고 결코 개선될 수 없는 유전자적 결함이라면 고통스럽지만 인류가 머지않아 절멸할 생명체란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인류의 진보
다시 돌아온 옛 동독 지역의 켐니츠. 거리는 이미 어둑해졌다. 독일민주공화국 시절 이 도시에 붙여진 이름은 칼 마르크스였다. 켐니츠 강이 흐르는 유역에 자리 잡은 도시는 동독 시절에 집중적으로 산업발전이 이루어진 도시로 자동차를 비롯해 산업의 중심지였다. 말하자면 동독 시절의 자동차인 트라반의 부품 등이 생산된 곳이기도 하다. 전쟁 중에는 군수 공장들이 있었고 폭격으로 피해가 컸다. 건물 대부분은 전후 동독 시절에 지어졌다. 눈에 띄는 건물은 시내 중심가의 머큐리 호텔이다. 원래의 이름은 인터 호텔이었다. 소비에트 스타일인 듯하면서도 아닌 듯하다. 주변의 오래된 아파트들도 그렇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흐루시초프의 아파트와는 다르다. 반듯하게 각이 지고 간결한 창문과 발코니, 날렵한 외관을 갖고 있다. 문득 드레스덴 뉴마켓 광장의 문화궁전이 떠오른다.
드레스덴의 뉴마켓 광장에서 어쩌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당과 교회, 왕궁과 성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문화궁전이었는데 한눈에 바우하우스 스타일이어서 절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바우하우스가 주창한 것 중의 하나가 그리스 로마 양식에서 벗어난 현대 스타일의 건축이었다. 뉴마켓 광장은 그리스 로마 양식이 압도하고 있는 광장이었으니 묘할 수밖에 없었다. 드레스덴의 문화궁전은 1969년에 완공되어 문을 연 건물이다. 바이마르 시대에 탄생한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와 데사우 시절을 거쳐 새로운 건축이념을 발전시켰지만 베를린에서의 사립연구소를 끝으로 1933년 해산되었다. 나치에게 퇴폐주의, 볼셰비키의 낙인이 찍힌 후였다. 바우하우스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독일을 떠나 주로 미국에 정착했고 오히려 자신들의 이념을 세계에 전파할 수 있었다. 종전 후 동독에서는 전후 재건을 하는 데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적 건축이념이 폭넓게 도입되었다.
켐니츠 도심의 브루켄 거리는 마침 작은 축제라도 열렸는지 도로 한복판에 설치되었던 대형 천막이며 앰프들을 철거 중어서 부산하다. 행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청춘남녀들이 맥주병을 들고 오가는 거리 한편에는 한때 사회주의 통일당 당사였던 건물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7m 높이의 칼 마르크스 두상이 놓여 있다. 도시의 이름으로 칼 마르크스를 빌렸으니 이런 기념비가 선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두상 뒤편의 건물 벽에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마지막 구절을 독일어와 러시아어, 영어와 프랑스어로 새긴 거대한 동판이 붙어 있다.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은 꽤 긴 글이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에 관한 글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에 관한 글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본산인 산업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칼 마르크스는 더부룩한 수염에 예의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이다. 공산당 선언의 결론은 ‘단결하라’가 아니라 그 전 줄의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에 있었다. 세상의 일부를 얻은 후 온 세상을 얻기 전에 모두를 잃어버린 칼 마르크스의 표정은 어둠이 내려서인지 침울해 보이고 뒤편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도 힘을 잃었다.
트리에의 칼 마르크스 생가에서 보았던 방명록이 떠오른다. 안내 데스크 뒤에 서 있던 중년 독일 여성이 이즈음에는 꽤 많은 중국인이 찾는다는 말과 함께 가리킨 방명록이었다. 간체자로 적힌 글은 이랬다. ‘나의 신념은 지금도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거리에서 칼 마르크스는 아마도 켐니츠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지독하게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테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유재현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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