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공개 실험서 원인규명 또 무산.. 더 깊은 미궁으로 빠져

박병률 기자 입력 2013. 6. 28. 22:19 수정 2013. 6. 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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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례 모두 '무혐의' 결과 나오자 이번엔 처음 일반인 참석해 재연논란 많았던 엔진제어장치 가습·열충격 등서도 가설 확인 실패

"아쉽네요. 왜 급발진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날씨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구요"

자동차 급발진 재연을 신청했던 천송정 급발진닷컴 대표(55)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천씨는 자동차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으면 급발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브레이크를 서너 번 밟아 브레이크 기능을 무디게 만든 뒤 가속페달을 밟으면 자동차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의 급발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출고 차량은 두 페달을 동시에 밟으면 브레이크가 먼저 작동하는 장치(BOS)를 장착하고 있다.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으면 차가 정지한다. 2009년 미국에서 발생했던 도요타 급발진 의심 사건 이후 국내 자동차 회사에서도 잇달아 도입했다. 천씨는 BOS가 없는 차량과 BOS를 인위적으로 제거한 차량으로 두 차례 실험을 했지만 급발진을 재연하는 데 실패했다. 천씨는 "내 차를 가져왔다면 급발진을 재연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 연구원과 관계자들이 지난 26일 경기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연구원에서 급발진 공개 재연 실험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지난 26~27일 경기 화성시 송산면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 주행시험장. 국토교통부와 교통안전공단이 공동으로 실시한 자동차 급발진 공개 재연실험이 열렸다. 이번 실험에서 제안자들은 급발진 현상을 재연하지 못했다. 급발진 현상은 또다시 단서를 남기지 않았고, 원인은 더 깊은 미궁으로 빠졌다.

정부는 지난해 5월 민간합동조사반(합조반)을 구성해 급발진 사고 의심이 있는 6건의 사고를 조사했다. 3차에 걸친 조사에서 의심 차량들은 '무혐의' 판정을 받았고, 여론은 악화했다. "명백하게 급발진이 일어나고 있는데 정부가 업체 편들기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확산됐다.

그러자 정부는 방향을 바꿔 일반인에게 급발진 사고를 재연해줄 것을 제안했다. 4월9일부터 한 달간 공모를 통해 아이디어를 모집했고, 제안이 부족하자 한 차례 연장하기까지 했다.

8건의 신청이 접수됐는데, 신청자는 자동차 마니아에서 자동차부품 업체 관계자, 통신회사 직원, 급발진 사고 피해자 등 다양했다. 재연실험자로 선정된 신청자들은 한 달간 실험준비를 했다. 재연실험 대상은 일반인이 제안한 8건 중 6건이 선정됐고, 급발진 실험 평가위원회가 선정한 2건도 추가됐다. 위원회가 선정한 실험대상에는 대림대 김필수 교수가 주장했던 '압력 급등에 따른 스로틀밸브 개방'건도 포함됐다.

■ '이번엔 원인 찾을까' 참관인 200여명 몰려

급발진 실험 평가위가 처음으로 구성된 것은 5월21일이었다. 앞서 3차에 걸친 합조반 활동과 달리 국회와 언론에서도 위원 4명을 추천받았다. 평가위는 시작부터 위원장 선정을 둘러싸고 논쟁에 시달렸다. 합조반 출신 위원들은 합조반 당시 위원장을 추천했다. 하지만 국회와 언론 추천 인사들은 "민관합동조사반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며 거부했고, 합조반 출신 위원들은 "객관적으로 조사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격론 끝에 새 인물로 평가위원장을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이번에는 한점 의혹을 남기지 말자"는 내부 동의가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6월4일 서울 영등포역 회의실에서 열린 실험자 선정 회의에서도 고성이 오갔다. 논란의 핵심은 재연실험을 어느 선까지 허용하느냐였다. 국회와 언론 추천 인사들은 "모든 가능한 조건을 다 실험하자"는 입장이었고, 자동차공학을 전공한 위원들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식선에서 실험을 허용해야 한다"고 맞섰다. 대표적인 게 엔진제어장치(ECU)의 오작동 실험이었다. 엔진제어장치는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얼마나 밟았는지 감지한 뒤 스로틀밸브에 명령을 내려 적절하게 공기와 연료분사를 해주도록 하는 기관이다. 실험제안자 중 3명은 엔진제어장치가 습기, 열, 전자파 등 다양한 이유로 오작동하게 되면 자동차 급발진이 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한 제안자는 "비가 많이 온 날, 가속페달을 밟지 않았는데도 내 차량이 가속되면서 급발진 사고가 났다"며 "엔진제어장치에 습기가 많이 끼면 급발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제안자는 "엔진제어장치 반도체에 250도 이상의 열을 가하면 이상이 생겨 급발진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엔진제어장치에 전기충격을 주면 급발진이 생긴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들은 엔진제어장치를 감싸는 커버를 벗긴 뒤 반도체 등 기판에 직접 물을 뿌리거나 전기, 열 충격을 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자동차공학 전문가들은 반대했다. "휴대폰을 물에 빠뜨린 뒤 다시 켜니 오작동이 생긴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 아니냐"라며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실험하면 합리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없고,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회와 언론 추천으로 위원회에 들어온 인사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지금까지 정부 합조단 발표로는 '급발진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국민들이 생각한다"며 "가장 혹독한 상황에서 급발진 상황을 재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결국 국회와 언론 출신 위원들의 주장이 관철됐다.

재연실험 절차를 진행하던 중 제기됐던 자동차급발진연구회의 주장도 논쟁을 제공했다. 연구회장인 대림대 김필수 교수는 5월2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뗐다 하면서 우연히 발생한 강한 압력으로 스로틀밸브가 열릴 수 있다"며 "공기가 과도하게 주입되면 순간적으로 엔진이 폭발해 급발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기자회견 당일 "정부가 추진하는 급발진재연실험에 참석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참석하지 않았다. 국토교통부 관계자와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은 수차례 김 교수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김 교수가 거절했다고 관계자는 밝혔다.

김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실험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정부에 줬지만 참석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재연이 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실험이라 참석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급발진 실험 평가위에서는 "당사자가 참석하지 않는 실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측과 "언론에 공개돼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사안이니 우리라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결국 재연실험을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 사고 대비 119구급차와 소방차까지 대기

26일 재연실험이 시작됐다. 재연실험이 열린 자동차안전연구원 주행시험장에는 이틀간 200여명의 참관인이 몰렸다. 현대·기아차, 르노삼성차 등 국내 자동차 메이커 관계자와 손해보험사 관계자도 참관했다. 차량 구입 25일 만에 급발진 의심사고로 차량을 폐기한 한 택시기사도 "급발진 원인을 알고 싶다"며 재연실험장을 찾았다. 실험차종으로 가장 많이 선정됐던 YF쏘나타 생산자인 현대·기아차 관계자들은 바짝 긴장했다. 만에 하나 급발진 현상이 나타날 경우 브랜드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안전연구원 측은 "급발진이 많이 일어나는 차량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많이 팔렸고 구하기 쉬운 차량이기 때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사고에 대비해 119구급차와 소방차까지 대기했다.

첫실험은 2009년 도요타 사고 원인으로 제기됐던 급발진 의심사례였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행해진 실험이었다.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밟으면 '가속하라'는 전기신호(전압)를 엔진제어장치로 보내 휠을 작동시킨다. 이 때 두개의 센서(APS)가 작동하는데 이상 전압이 추가로 더해지면 급발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이상을 감지한 엔진제어장치는 가속이 아닌 안전모드로 바뀌는 것으로 드러났다. 안전모드란 엔진 분당회전수(RPM)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하는 상태다. 자동차가 저속운행된다는 의미다.

김필수 교수가 주장했던 '압력급증에 따른 스로틀밸브 개방'도 급발진 개연성이 높지 않았다. 스로틀밸브를 억지로 열기 위해서는 약 407N(뉴턴)의 힘이 필요했다. 연구원 측은 "407N은 1㎡당 약 40㎏의 힘이 가해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정수기 큰 물통(20㎏) 두개를 올려놓은 압력이라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밸브를 강제 개방한 뒤 엔진의 움직임을 지켜보니 급가속이 아닌 안전모드로 바뀌었다. 엔진제어장치가 스로틀밸브 이상을 감지하면 급발진보다는 저속을 택한다는 얘기다.

가장 논란이 됐던 엔진제어장치를 뜯어 기판에 가습, 열충격 등을 가하는 실험에서도 급발진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판에 물을 뿌렸더니 시동이 꺼졌다. 전기충격이나 열충격을 가했어도 엔진출력이 증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교통안전공단 측 관계자는 "기판에 직접 물을 뿌리거나 열충격을 가하는 실험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 우리도 결과가 궁금했다"며 "일부 제안자는 직접 실험을 해본 적도 있다고 해서 기대했다"고 말했다. 다만 엔진제어장치에 전기충격을 가하면 급발진이 일어난다고 제안했던 한 참석자는 "내가 요구했던 재연조건이 아니다"라며 실제 재연실험장에 나오지 않아 재연실험을 하지 못했다.

독특한 관점의 실험도 행해졌다. 정전기나 고조파(일종의 합성전자파)가 전자시스템을 교란시키면 급발진이 일어난다고 한 관계자는 주장했다. 전자식 엔진제어장치가 전자파 간섭을 받는데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또 엔진 연소실에 카본이 퇴적되면 급발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일주일간 해당 차량에 카본 퇴적을 시킨 뒤 실험장에서 재연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급발진 평가위 측은 "실험자들이 모두 만족하지는 않겠지만 원하는 모든 조건을 최대한 수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관했던 일부 관계자는 "이틀간 실험으로 급발진 현상을 재연하려 한 자체가 무리였다"며 평가위의 재연실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세계적 난제… 끝까지 추적해 미스터리 풀고 싶다"

이번 실험에 대한 평가는 평가위원들 사이에서도 나뉜다. 한 부류는 "현 과학기술로는 인위적인 재연도 힘들다는 게 증명된 것 아니냐. 정부도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반면 "급발진 의심 사고가 계속 일어나는 이상 자동차 생산자까지 참여해서 조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정부는 이번 실험을 끝으로 정부 차원의 급발진 조사를 종료하겠다고 밝혔다. 앞선 3차에 걸친 합조반의 사고조사 결과와 재연실험 결과는 오는 12월까지 제3의 연구기관에 맡겨 신뢰성 검증을 거칠 예정이다. 다만 급발진 의심으로 신고가 들어온 사건에 대해서는 자동차안전연구원이 계속 조사하기로 했다.

재연실험에 참석했던 자동차안전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급발진 의심현상은 세계 어느 나라도 풀지 못한 난제 중 난제"라며 "끝까지 추적해 이 미스터리를 풀고 싶다"고 말했다.

<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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