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국일보를 죽이려 하는가"

2013. 5. 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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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고]

'업무상 배임' 검찰 소환 앞둔 사주, 편집국 간부진 일방 교체 뒤 기자들과 충돌

무너진 '비판적 중도지' 자부심… "적폐 씻고 사회적 책무 다하도록 지지를"

"오늘치 신문은 어떻게 된 건가요?"

지난 5월15일 아침 출근한 < 한국일보 > 기자들은 편집국에 놓인 신문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전날 기자들이 만든 신문이 아니었다. 지난밤 새벽 2시 야근이 끝날 때까지 1면에 실려 있던 '공정위, 광고업계 납품가 후려치기 조사 착수'라는 단독 기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2면에 있던 다른 기사가 버젓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공정위 기사는 경제면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2면 기사를 옮기면서 구멍이 난 자리에 들어간 사진은 이미 다른 면에 실린 사진이었다. 기자들도 모르게 1면 기사가 바뀌고, 사진이 한날 지면에 중복 게재되는 '귀신이 곡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 한국일보 > 59년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귀신의 정체는 편집국 밖에 있었다. 회사 쪽이 편집국 외부에 몰래 마련한 편집 시스템을 활용, 지면을 따로 제작해 신문을 바꿔치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광고주를 의식한 회사의 과잉 충성이 빚은 참사였다. 전후 사정을 파악한 기자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기자들의 자존심이 무너졌고, < 한국일보 > 를 믿고 구독하는 독자들에게 부끄러웠다.

5월15일 1면 기사 바꿔치기의 진상

이날 사건은 최근 < 한국일보 > 상황의 엄중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한국일보 > 기자들, 노동조합원들은 지난 4월29일부터 '비판적 중도지'라는 < 한국일보 > 의 가치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진행해오고 있다. 기점은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일보사지부(한국일보 노조)가 장재구 < 한국일보 > 회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일이다. 혐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업무상 배임). 경복궁 앞에 있던 중학동 < 한국일보 > 사옥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장 회장이 < 한국일보 > 에 200억원 이상의 재산상 손해를 끼쳤다는 게 고발의 뼈대다.

고발 직후 장 회장은 인사권이라는 칼을 빼들어 대응했다. 지난 5월1일 평소 자신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이영성 편집국장을 '창간 60주년 기념단장'이라는 유령 직위로 기습 발령하는 등 5명의 부장급 이상 간부들을 대상으로 보복성 인사를 단행했다. 사쪽은 이 국장을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고 5월21일 징계위도 예고했다. 장 회장은 또 검찰 수사를 방어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부서장에 발령 내는 등 방패막이 간부 인사도 실시했다.

그러나 노조와 편집국 기자들은 "정당성을 갖추지 않은 인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3주째 회장의 인사안을 거부하고 있고, 기존 데스크의 지휘하에 지면 제작을 하고 있다. 5월15일치 신문의 파행적 발행은 인사거부 사태 와중에 장 회장의 지시를 받은 일부 간부들이 저지른 일이다.

장재구 회장의 경영정상화 약속

외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신문기업 내부 경영난에서 촉발된 분쟁, 노조가 회사 오너를 고발한 노사 갈등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 한국일보 > 노조와 기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장 회장 고발은 훼손돼가는 < 한국일보 > 의 가치와 철학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 편향적 지면 제작이 난무하는 한국 언론의 현실에서 가장 자유롭고, 공정하며, 비판적인 지면을 제작해왔다고 자부하는 < 한국일보 > 가 더 이상 망가져선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초 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수천억원의 부채 때문에 이어져온 경영난에서 비롯됐다. 새 출발의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장재구 회장은 2002년 취임 뒤 채권단과 경영정상화 계획을 담은 양해각서(MOU)에 합의해 500억원을 증자키로 했다.

그러나 증자는 차일피일 연기됐고 < 한국일보 > 의 경영 여건이 나아지지 않자 2006년 2차 MOU가 체결됐다. 골자는 < 한국일보 > 의 핵심 자산인 중학동 사옥을 팔아 부채를 갚고, 장 회장이 200억원을 추가 증자한다는 것. < 한국일보 > 는 사옥 매각 계약 당시 그 자리에 짓게 되는 새 건물 일부 층의 우선매수청구권을 확보했는데, 건물 완공 뒤 이 권리를 행사하면 200억원의 차익이 생기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 한국일보 > 는 2011년 완공된 건물에 입주조차 할 수 없었다. 우선매수청구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확인 결과 장 회장이 개인 빚을 갚기 위해 회사 자산인 이 권리를 넘긴 정황이 확보됐다. 장 회장은 이후 2년간 이 돈을 회사에 돌려놓겠다며 여러 차례 약속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사이 지면 제작 과정도 왜곡돼갔다. 결국 노조는 장 회장에게 약속 이행 의사가 없다고 판단해 그를 검찰에 고발하게 됐다.

장 회장이 < 한국일보 > 편집국장 및 부장단을 전격 교체한 것은 또 다른 싸움의 분기점이 됐다. 기자들은 부당한 인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편집권을 지키기 위해 노사가 합의한 단체협약의 '편집강령규정' 중에는 "취임 후 1년이 안 된 편집국장을 보직 해임할 경우 편집국원 재적 3분의 2 이상이 반대하면 인사권자가 보직 해임을 철회한다"는 조항이 있다. 편집국은 이에 따라 5월3~6일 투표를 실시했고 투표율 93.2%, 보직 해임반대 98.8%의 결과가 나왔다. 회장의 인사만행에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회장이 새로 임명한 편집국장 임명동의안도 5월 7~8일 투표 결과 부결됐다. 회사는 인사를 철회해야 했다.

이 결과가 편집국의 한뜻이라는 것은 투표 이후에도 기존 편집국 체제대로 신문이 제작되는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회장의 인사안에 동의하는 4~5명의 데스크를 제외한 편집국 구성원 190여 명은 이탈자 없이 정상 근무 중이다. 단지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기존 일과 틈틈이 하루 2~3차례 비상총회를 열고, 피켓을 든 채 구호를 외치며 회장·사장실을 항의 방문하는 등 행동을 병행하느라 하루를 좀더 빠듯하게 쪼개 써야 한다는 것만 평소와 달라진 부분이다. 회장과 사 쪽이 "현재 < 한국일보 > 는 회사의 정당한 인사 발령에 따르지 않는 일부 간부와 노조원들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제작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검찰의 일벌백계 수사를 기대한다

< 한국일보 > 노조와 편집국 기자들은 검찰의 장 회장 수사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5월8일 고발인 출석 조사 이후 회사 안팎의 관계자들이 잇따라 소환돼 조사받고 있다. 회사 자금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경제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기업 사주들은 엄정히 처벌해야 한다. 사회의 입과 귀가 돼야 하는 언론사 사주라면 더더욱 그렇다. 언론사 사주는 권력층과 가까울 것이고, 따라서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눈치를 볼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언론사 사주라도 검찰이 공정하고 신속한 수사를 통해 법대로 처벌한다면 한국 사회에 일벌백계의 선례가 될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전이 되더라도 우리는 < 한국일보 > 지면을 더 충실하게 채울 것이다. < 한국일보 > 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해서도 더 치열하게 고민하겠다. < 한국일보 > 가 적폐를 씻어내고 역사적·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언론이 될 수 있도록 국민과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린다.

정상원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일보사지부 비상대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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