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혹적인 카리스마, 황금비율을 지닌 여신 정윤희 [김상근의 스타앨범]

윤상길 기자 2013. 5. 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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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윤상길 편집위원] '자연미인의 전설'로 불리는 배우 정윤희. 그가 어느 사이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다. "추억이란 세월과 함께 멀어져가는 강물이 아니다."라는 신영복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면, 그가 우리 나이로 60살이라는 사실은 믿기 힘들다.

추억이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숱한 사연을 계기로 다시 되살아난다. 의학의 도움을 받거나, 미용분장 기술에 의존한 인조미인들이 넘쳐나는 모습에서 우리는 추억 속의 미인 정윤희를 떠올린다. 그는 여전히 20대 초반의 스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들의 '연인'이고 '로망'이다.

정윤희는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전반까지 영화방송계를 이끈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다. 이들과 현장에서 함께 해 본 관계자들 대부분은 트로이카 중 외모로는 정윤희가 가장 예뻤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 2005년 한 여성잡지가 광복절 특집으로 영화계 리더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 여배우 최고 미인' 설문에서 정윤희는 1위에 올랐다. 특히 관계자들은 그의 외모 중 입술을 최고의 매력 포인트로 꼽았다. 한 신문이 영화 방송 가요계 남성 인기스타 100인의 설문을 통해 '신체 부위별 최고 미녀 베스트 10'을 선정해 본 일이 있다. 이때 정윤희는 가장 예쁜 입술을 지닌 배우로 선정됐는데, 당시 추천자의 한사람이었던 문여송 감독(2009년 작고)은 '정윤희의 입술은 삼키고 싶은 입술'이라고 극찬했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혜화여고를 졸업한 정윤희는 이미 학창시절 부산 경남 일대 최고의 '얼짱'으로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스타 지망생 시절 서울 언니 집에서 기숙하던 때 명동에 나가면 "부산 미니스커트 떴다 ~"라며 의상실, 미용실, 화장품가게 직원들이 나와서 구경할 정도로 출중한 미모를 지녔다.

명동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를 발견하고 영화 출연을 권유한 이경태 감독은 "황금비율의 완벽한 마스크와 작은 키지만 균형 잡힌 몸매가 돋보였다"라며 그의 첫 모습을 기억해냈다. 요즘으로 치면 길거리 캐스팅이었던 셈이다.

정윤희를 직접 본 남자배우들이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전성기 시절 미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집작하고도 남는다.

뛰어난 CF감독이기도 했던 박경삼 서울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는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을 가진 도시적이면서도 동양적인 고전미를 두루 갖춘 완벽한 미모의 배우였다"면서 "얼굴의 세로 비율과 가로 비율이 모두 황금비율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또 한국 최초로 70mm 촬영기를 발명한 고 장석준 촬영감독은 "정윤희는 어느 각도에서 카메라를 잡아도 될 만큼 완벽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특히 그는 화장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다큐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MBC 최윤석 PD는 "정윤희는 지금의 아이돌그룹이나 톱 여배우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판타지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까지도 정윤희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지금도 그의 인터넷 팬클럽 회원은 4천여명에 이른다), 아직도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란 질문을 던지고는 "그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신비스럽기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정윤희는 여배우로서 짧지만 화려했던 시절을 누린 스타이다. 1975년 영화 '욕망'의 주연으로 데뷔해 모두 36편의 영화를 찍고 1984년 '사랑의 찬가'를 끝으로 스크린을 떠날 때까지 10년 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영화뿐 아니라 방송과 광고계활동도 눈부셨다. 그는 영화 데뷔와 함께 당시 동양방송(TBC) 최고 인기 쇼 프로였던 '쇼쇼쇼'의 MC로 활약했고, 화장품 제과 등의 CF모델로 크게 환영받았다.

데뷔 첫해에 다양한 분야에서 단번에 정상에 오른 연예인은 정윤희가 처음이다. 그의 타고난 미모와 스타성 때문이었다. 그가 출연한 TV드라마 '맏며느리', '야, 곰례야' 등도 모두 시청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트로이카 중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남다르다. 하나는 장미희 유지인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데 반해 그는 연기자로 복귀하지 않은 말 그대로 '은퇴배우'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장미희 유지인의 인기가 국내에 한정되었던 데 비해 그의 인기가 해외에서도 국내 못지않았다는 점이다. 원조 한류 스타였던 셈이다.

정윤희는 한국 여배우 중 해외에서 처음으로 인기를 모은 연예인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류 열풍의 불씨가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보아도 비약은 아니다. 그의 뛰어난 미모는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화권에도 알려져 외국 감독들로부터 수차례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1984년 4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경세계가요제에 시상자로 초청됐다. 당시 동경가요제는 트로피 수여자로 세계 각국의 유명 연예인을 초청해 대회의 성가를 과시했었다. 1983년에는 미국의 명배우 그레고리 팩이, 1982년에는 프랑스 여배우 까뜨린느 드뇌브가 수여자로 나선 가요제이다.

그해 정윤희는 "사랑이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란 명대사로 유명한 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우와 공동 시상자로 나섰다. 이름만으로 평가한다면, 정윤희의 당시 인기는 이처럼 세계적이었고, 한류 스타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요제 주최 측은 그를 '동양의 최고 미인'이라고 불렀다. 동경가요제 참석 직후에는 일본의 송죽(松竹)영화사와 TBS TV가 출연 교섭을 해왔지만 그는 넘쳐나는 국내 스케줄을 이유로 이들의 러브콜을 거절했다.

또 그가 주연한 영화 '사랑하는 사람아'가 대만 홍콩에 수출 상영되면서 현지에 초대돼 국빈급 환영을 받았다. 이 영화는 대만에서 리메이크 되었으며, 무대 인사차 타이베이를 방문했을 때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나와 뉴스가 되기도 했다.

홍콩 최대 일간지 '빈과일보(蘋果日報·Apple Daily)는 '양귀비의 환생'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미인이라 칭송받는 정윤희가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그는 아시아에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이다."라고 극찬했다. 이 영화를 보고 정윤희의 매력에 빠진 홍콩스타 성룡이 언론을 통해 공개 프러포즈를 하고, 이를 정윤희가 거절해 한동안 국내외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윤희는 1984년 12월 24일 중견건설업체인 중앙산업개발 조규영 사장과 결혼식을 올린 후 은퇴해 오늘까지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그는 초혼이었고, 조규영 사장은 재혼이었다. 두 사람은 조 사장의 첫 부인에게 간통으로 고소당하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그래서 이들의 결혼식은 비밀리에 진행됐고, 뒷말도 무성했다. 요즘의 비공개 결혼 같은 형식이었다.

스타와 스캔들은 예나 지금이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무성한 소문들은 반대로 관심과 인기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윤희는 연예기자들의 끈질긴 추적에도 불구하고 이 간통사건 이외에 세상에 드러난 스캔들이 없었다.

한때 모 방송국 예능 PD와 교제설이 나돌았지만, 정윤희의 재능을 눈여겨본 PD의 전폭 지원이 오해를 불렀던 것으로 밝혀져 유야무야로 끝났다. 용모만큼이나 정윤희는 사생활 관리에도 철저했던 스타였다. 이후 그는 연예계를 은퇴하고 오늘날까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의 연기력은 뛰어난 미모에 가려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 "예쁜 사람이 연기까지 잘 하면 너무 불공평하다."라는 시샘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정윤희는 1980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로, 1981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2회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연기파 배우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신은 늘 공평하다. 톱스타로 살아온 10년 세월 내내, 그리고 단란한 가정의 아내로 어머니로 30년 가깝게 살아왔지만 정윤희에게도 불행은 비켜가지 않았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2011년 11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막내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가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지난 2011년 9월. MBC 한가위특집 다큐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카페 정윤희'를 통해서였는데, 아쉽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안부를 전해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뛰어난 미모를 타고 태어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고, 여배우로선 최고의 사랑을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윤희. 추억의 앨범 속 그를 보면서 새삼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한다.

[티브이데일리 윤상길 편집위원 news@tvdaily.co.kr / 사진=사진작가 김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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