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 남용 막으려 가차없이 수족 쳐내다
근대 이전의 조선 국왕은 친인척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렸다.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은 고려 말 정몽주를 죽여 조선 개국에 박차를 가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태종은 문화정치의 기틀을 수립하고 '해동제국(海東諸國)'의 종주권을 행사할 발판을 마련했다. 태종은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처남들을 죽이고 자신의 며느리 집안을 파괴했다.
태종의 장인 민제는 개국 공신이었고, 처남들인 민무구 형제는 2차에 걸친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왔다. 그런데 그들 집안의 권세가 커졌다. 태종은 1406년 8월, 민무구 형제가 세자 양녕대군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죄목으로 옥사를 일으켜 그들을 제거했다.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연안에 방치하고 공신녹권을 빼앗고 직첩을 수취해 서인으로 삼고 이어 여흥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장인 민제가 죽은 지 한 달 후인 1408년 10월 민무구 형제의 죄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교서를 반포하고 그들을 옹진에 안치했다가 다시 제주도로 안치한 후 자진하게 했다. 게다가 민무휼과 민무회가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들을 서인으로 폐했다가 사사시켰다.
민무구 옥사의 실제 원인은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 불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민무구 형제가 지나치게 활개를 펴게 된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태종은 매형 이저 부자를 폐서인해 귀양 보내고 가장 가까운 친구 이숙번까지 내쳤다. 이러한 일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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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종영된 SBS 드라마 < 뿌리 깊은 나무 > 에서 상왕(태종)과 아들 세종 . ⓒ SBS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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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처도 한미한 집안에서 골라
태종은 인척의 정치 참여를 경계해 세자 양녕대군의 처도 한미한(가난해서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집안에서 골랐다. 그 후 충령대군을 세자로 세웠다가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세종의 처가를 억제할 계획을 세웠다. 왕비의 조부 심덕부는 태조 이성계와 권세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고, 왕비의 부친 심온은 당시 상당한 인망을 얻고 있었다.
상왕 태종은 우선 심온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자신을 18년이나 호위해 병조참판에 올라 있던 강상인을 갑자기 체포하고는, 상왕과 금상을 이간질했다는 죄목을 씌우고 그 공모자로 심온의 동생 심정을 지목했다. 심온은 귀국 후 군사들에게 따로 상왕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선동한 죄목으로 귀양을 가서 사약을 받았다.
정말 극단적인 처사였다. 그런데 이익은 < 성호사설 > 에서 태종의 처사를 높이 평가해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다'고 평가했다. 태종의 처사 이후에 역대 국왕들은 외척이 조정에서 권한을 갖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숙종 연간에는 친인척의 권한이 다시 강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이익은 상피(相避) 제도를 왕실부터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 친인척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도의 명호를 주어야지, 조정 관료로서 권력을 잡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상피는 왕의 친계·모계·처계·아들·사위 등 지친이나 외척들에게 권한 있는 벼슬을 주지 않음으로써 부패를 미연에 막으려고 했던 관습이요, 제도였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 계층의 사람을 관직에 천거할 때 사촌 이내 친인척이 재임하고 있는 부서나 지역을 피하도록 했다.
심경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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