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마가렛 대처 영국 전 총리 87세로 타계
【런던=로이터/뉴시스】김재영 기자 = 20년 동안 영국 정계를 휘어잡아 왔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전 총리가 8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고 가족 대변인이 말했다. 향년 87세.
영국의 유일한 여성 총리로서 강인하고 속내를 숨기지 않은 대처 여사는 보수당을 세 번 연속 총선 승리로 이끌면서 19세기 초 이래 영국 사상 최장기인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연속 집권했다.
"대처 여사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슬픔을 가눌 수 없다"고 보수당 연정의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는 말했다.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총리 그리고 위대한 영국인을 한 명 잃었다"고 그는 말했다.
대처 전 총리는 이날 아침 평화롭게 영면했다고 대처 가의 대변인인 팀 벨 경이 전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대처 전 총리의 타계 소식에 슬프다고 말하고 가족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다.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영국 전 총리는 식료품 가게의 딸에서 영국 20세기 정치의 거인이 됐다. 대처 총리가 노조를 거의 궤멸시키고 산업의 광대한 부문을 민영화하면서 그녀는 사랑과 증오를 거의 동률로 받았다.
대처 여사가 정계에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은 영국을 확 바꿔놓은 현대화의 기수로서 숭배했고, 어떤 이는 빈자와 부자 간의 격차를 한층 깊게 했다고 비난했다.
대처 여사가 총리직에 있는 동안의 여러 이미지들은 이 같은 상호 충돌적인 이견에 부응한다. 광산 노조와 대치하고 있는 거대한 경찰 병력, 흰 스카프를 휘날리며 탱크를 타고 있는 여성 총리, 인기 없는 지방 세에 대한 반대 폭동으로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솟아오르던 화염 등등. 세금 폭동에 대처 여사는 결국 무너졌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집권했던 대처 전 총리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반 공산주의의 강력한 동맹을 결성해 1989년 비록 통일 독일의 유럽 지배를 우려하면서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쾌거를 선사받았다.
그녀의 과격한 우파 시각은 영국 정치의 틀을 깨트렸으며 현상 유지의 무사안일을 철저히 타파해 그녀를 이은 반대당 노동당 정부마저 그녀의 주요 정책 상당수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간단하게 "매기"로 불리는 그녀는 경제의 큰 덩어리를 국가 손에서 민간 소유로 옮겼다. 경쟁, 민간 기업, 절약 및 자립독행에 기반한 그녀의 신조는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정치 철학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의 사정 없는 경제적 처방은 수백 만 명을 실직자로 만들었으며 광산업과 같은 여러 산업을 거의 파괴시켜버렸다.
그녀의 투쟁적인 자세는 유럽의 여러 동맹국들을 적대 관계로 돌아서게 했으며 반대에 대한 그녀의 불 관용적 태도는 결국 그녀의 몰락을 재촉했다.
"용렬한 평범한 인물들로 둘러싸인 찬란한 폭군"이라고 해롤드 맥밀란 전 총리는 그녀를 표현했다. "저 피비리내나는 여인"이란 말로 보수당 대표로서 대처의 직전 총리였던 에드워드 히스 총리는 대처를 총합적으로 묶어냈다.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대처 여사는 순전한 자신의 개성과 성격으로 서방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됐다. 하루 18시간 씩 일하는 강행군을 마다않는 일 중독자인 그녀는 위스키 한 잔으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하곤 했다.
1979년 5월 3일 선거에서 승리한 대처 여사는 산업의 날개 없는 추락, 해만 끼치는 세금 및 도를 넘는 관치 등 비판해온 현상들을 종식시키는 경제 및 사회 개혁에 착수했다. 이것들은 "불만의 겨울"이란 말을 이끌어내게 한 전임 노동당 정부의 시대 상황이였다.
인플레 유발의 급여 인상과 싸우고 경제 체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노동조직의 힘을 꺾는다는 것이였다.
법을 바꾸고 1985년 광부들의 패배로 귀결된 처절한 일년간의 파업 후에 노조가 영국 정부를 이래라 저래라 하던 시대는 사라졌다.
영국인은 1982년 대처 총리가 아르헨티나 침입군에 의해 점령된 포크랜드에 해군 전함을 급파하자 안도했다. 몇 척의 전함을 잃긴 했지만 영국은 74일 뒤에 이 남 대서양 섬을 탈환했다. 649명의 아르헨티나 인이 죽고 255명의 영국인이 죽었다.
1981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대처 총리는 전 시대 통틀어 가장 싫어하는 총리라는 등급이 매겨졌다. 그러나 2년 뒤 포클랜드 전쟁 승리가 불러일으킨 애국심 바람에 힘입어 그녀는 재선에 성공했으며, 1987년 세 번째 총선 승리를 안았다.
대처 총리는 영국인 68%를 주택 소유자로 끌어올리고 20%를 주식 주주로 만드는 "대중 자본주의"의 시대를 도래시켰다. 그녀는 가스, 석유, 철강, 전화, 공항 및 항공사 BA 등 정부 독점사업을 민영화하는 전면 개혁을 시작했으며 이어 상수도 및 전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처리즘으로 많은 이들이 보다 잘살게 되긴 했으나 실직자가 1980년대 중반 300만명 이상으로 두배나 급증했다. 1930년대 궁핍의 시대 이후 처음인 고수준이었으며 반대자들은 대처가 잘사는 남부와 못사는 북부로 영국을 양분, 양극화했다고 비판했다.
대처 총리는 레이건 미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켜 레이건은 그녀를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남성"이라고 불렀다.
대처 총리에 "철의 여인"이란 이름을 처음 붙여준 곳은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였는데, 그녀는 이 별명을 아주 즐겼다.
이라크가 1990년 쿠웨이트를 침략했을 때 대처 총리가 당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과 대적하는 데 "줏대없이 흔들리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영국의 대 유럽 관계는 대처 총리가 보다 긴밀한 통합에 주저하면서 유럽 이웃 국가들과는 내내 삐걱대고 긴장된 것이였다.
프랑스의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은 대처 총리가 "로마 폭군 칼리굴라의 눈과 마랄린 먼로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1984년 대처 총리는 홍콩을 156년 식민지 지배 후인 1997년 중국에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대처 총리는 1990년 11년의 집권에서 보수당 당내 반란을 맞아 자신의 전 국방장관이였던 마이클 메설타인에게 총수 자리를 내줬다. 흔히 "투표세"로 알려진 새 지방세가 이 반란을 이끌었고 결국 그녀의 몰락을 가져왔다.
대처 여사는 당내 영향력을 발휘해 헤설타인 대신 후견인 노릇을 해온 존 메이저가 후임 총리가 되도록 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다우닝가를 경이로운 11년 반 만에 뒤로 하면서 우리는 영국을 여기에 처음 왔을 때보다 아주, 아주 한층 더 잘 사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매우 행복하다"고 대처 총리는 수상 관저를 떠나면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대처 여사는 2001년과 2002년 경미한 뇌졸중을 앓았다. 이후 그녀는 공개 석상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어 그녀가 치매 노망 증세를 보이는 모습을 오스카 상 수상의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 "철의 여인"에 서 사람들은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정신 멍한 과부, 아주 외로운 철의 여인은 오로지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였다.
kj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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