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절차탁마

2013. 4. 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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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탁마 대기만성(切磋琢磨 大器晩成). 옥(玉)을 오랫동안 갈고닦아서 큰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학문을 꾸준히 연마하여 큰 뜻을 이룬다는 경구다. 어릴 적 서울로 전학올 때 할아버지께서 한지에 붓글씨로 이 구절을 써주셨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주셨지만 정작 이 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건 한의학에 입문하고 나서, 그것도 불혹을 넘긴 뒤였다.

한의사가 된 뒤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른 나이에 학위를 취득했을 때 많이 교만했던 것 같다. 가업(家業)인 한의원을 이어받은 데다 박사라는 명칭까지 붙게 되자 무언가 좀 아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한의원을 찾는 분들은 대개 고질병을 앓고 있거나 일반 병원에서 잘 치료되지 않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었다. 따라서 그분들 앞에서 대학이나 병원에서 배웠던 지식은 무용지물이 될 때도 잦았다.

잘 모른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다시 공부하러 나섰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의안(醫案ㆍ진료기록)을 정리하고 동의보감을 비롯한 한의학의 고전을 다시 읽었다. 여러 학회에서 여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배울 게 있다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년쯤 지났을 무렵 대한형상의학회라는 모임을 알게 되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새벽 공부에 나가게 되었다.

처음 학회에 나가던 날, 젊은 한의사들부터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선생님들까지 함께 모여서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던 모습을 보고 나는 절차탁마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좋은 치료경험을 공유하고 스승의 강의를 들으면서 사람의 체질과 질병의 근원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3년 정도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는 기쁨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의사에게는 아는 만큼 베풀 수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지식이 쌓이는 만큼 더 많은 분을 질병의 고통에서 구할 수 있기에 힘들어도 이 길을 계속 가려 한다. 오늘 아침도 세미나실에 모인 여러 선생님들의 진지한 눈빛을 보면서, 또 이른 새벽길에 만난 열심히 살아가는 많은 분들을 떠올리며 게을러지려는 몸과 마음을 다잡아 본다.

[안현석 안영한의원장ㆍ한의학 박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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