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인민재판에.. 난 짐승보다 못한 아들"

이진희기자 입력 2013. 3. 29. 03:35 수정 2013. 3. 29.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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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문화대혁명 슬픈 가족사.. 어느 변호사의 반성마오쩌둥 사진 태웠다고 처형대 세워 숨지게 해"그땐 인민의 적으로 생각"40여년 만에 속죄 눈물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광기 속에 마오쩌둥(毛澤東)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인민재판에 넘겨 숨지게 한 아들이 40년 만에 속죄했다. 약 100만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공식 역사기록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을 정도로 금기시돼왔지만 이를 겪었던 세대가 60, 70세를 넘기면서 더 늦기 전에 과오를 기록하자는 반성들이 나오고 있다.

27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짐승보다 못한 아들"이라고 말한 중국 변호사 장홍빙(60). 티에푸였던 이름을 '붉은 병사'를 뜻하는 홍빙으로 바꿨을 정도로 그는 문화혁명에 심취한 10대 시절을 보냈다.

장홍빙의 가족사는 격동의 중국 현대사와 그 속에서 한 가족이 파멸된 과정을 보여준다. 부모님은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됐을 때 결혼했다. 외할아버지는 민족주의계 첩자로 지목돼 처형됐고, 홍빙의 남동생은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친척에게 보내졌다.

청년 홍위병을 앞세워 반체제 인사를 숙청했던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왔다. 홍빙의 누나는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했던 수백만명의 홍위병 행렬에 참여했다가 수막염을 얻어 16세에 사망했다. 몇 달 후 아버지는 자본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고 18개월간 고문을 받았다. 1968년 어머니 팡중모우는 외할아버지의 혐의로 인해 2년간 조사를 받았다. 이후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팡중모우는 광기 어린 마오 숭배주의를 비판했다. 장홍빙은 "어머니가 아니라 인민의 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불안을 느낀 외삼촌이 어머니에게 "마오를 비난한 것을 취소하라"고 간청했으나 어머니는 "겁나지 않는다"며 마오의 사진을 불태웠다. 아들과 남편은 어머니이자 아내를 인민재판에 넘겼다. 장홍빙은 "그것이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팡중모우를 끌어내 군중 앞에 무릎 꿇게 한 뒤 인민재판을 했다. 그리고 교외로 데려가 총살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44세였고 장홍빙은 16세였다.

외삼촌은 "누나는 용감하고 외향적이었으며 정직했다"고 말했다. 한 지인에 따르면 팡중모우는 인민재판을 받으며 아는 사람을 찾으려는 듯 군중을 훑어봤다고 한다.

칭화대학의 마이클 보닌 교수는 "세뇌된 젊은이들이 체제 대신 부모를 비판한 것이 당시에는 흔했다"며 "부모를 보호하려던 젊은이들이 함께 처형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인정한 뒤 외삼촌은 누나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섰고 남편과 아들도 외삼촌의 활동을 지지하고 있다. 팡중모우는 1980년 사후 무죄를 인정받았으며 가족은 그가 총살된 자리 인근에 묘비를 세웠다.

지금 어머니가 묻힌 안후이성(安徽省) 구전 지방의 묘지는 재개발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처해있으며 장홍빙은 보존할 방법을 찾고 있다. 어머니 사진과 자료, 처형 장면까지 스케치로 복원해 쓰라린 기억을 모두 파일로 만든 장홍빙은 "문화대혁명은 국가적 재앙이었으며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며 어머니의 묘지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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