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중 사망" 차베스 집권 14년의 명암

주영재 기자 2013. 3. 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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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는 집권 14년간 석유를 무기로 국내적으로 사회주의적 개혁조치를 취했고 국제적 차원에서는 중남미 통합운동을 벌였다. 19세기 베네수엘라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의 범아메리카주의와 페루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대통령 같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자본자유화, 탈규제, 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차베스의 정책들은 베네수엘라와 그 너머의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션의 나라'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미션의 나라'였다. "예수는 혁명가"라고 말한 그는 선교사의 열정으로 베네수엘라를 바꾸자고 말하곤 했다. 그가 주도한 일련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에는 '미시온(misssion·선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베네수엘라 석유와 쿠바 의료의 맞교환에 의한 무료 의료 사업은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라 불렸다. 공교육 투자를 대폭 늘려 무상교육을 확대했다. 문맹퇴치를 위한 '미시온 로빈손', 무상 고등 교육인 '미시온 리바스' 등이 그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에 속한 유휴 농지를 시장가격에 사들여 경작 농민에게 제공하는 '미시온 사모라'도 시행했다.

'미시온'을 위한 재원은 석유에서 나왔다. 차베스는 1958년 '푼토피호' 협약이후 40년간 지속된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의 보수양당체제를 끝내고 이들이 독식하던 석유 수입을 빈민층과 중하층으로 돌렸다. 국내총생산의 1/3과 정부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영석유공사(PDVSA)가 그 중심이다. 국영석유공사(PDVSA)의 '폰데스빠'라는 기금이 각종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재정을 지원한다.

차베스의 '미시온'은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003년 62.1%에서 2007년 33.6%로 줄었고 2011년 31.9%에서 안정화되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03년 3482달러에서 2011년 1만2000달러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남미 개도국들의 1인당 국민총소득이 3470달러에서 8574달러로 상승한 것에 비하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신사회주의'의 명암

차베스의 개혁조치들은 '신사회주의 운동'으로도 불린다. 빈곤퇴치와 동시에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연대의 정신에 기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운영, 친환경적 개발 등의 방향이 제시됐다. 그의 개혁입법은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반차베스 쿠데타를 일으킬만큼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반대자들은 그를 독재자로 묘사한다.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김달관 교수는 "독재자라는 말은 우파 기득권 세력의 라벨붙이기"라며 "누구의 독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사회에서 배제되고 타자화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차베스에 우호적인 좌파진영에서도 양극화를 순화시키고 천연 자원에 대한 주권을 강화한 것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완전히 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너무 강력한 국가주의"에는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차베스가 결정하고, 차베스가 발표"하면서 차베스 이외의 대안적 리더십이 자라날 공간도 공동의 토론공간도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적 양극화도 문제다. 차베스 지지층이 결집하며 이룬 대대적인 사회개혁은 그에 못지않게 반대세력도 결집시켰다. 2006년 선거부터 60/40, 49/51, 55/45 식의 대립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석유에 의존하는 한 차베스의 '신사회주의 혁명'이 지속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신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김 교수는 "브라질의 룰라가 자본주의가 계속된다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다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자본주의가 끝난다고 보고 '신사회주의'라는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에콰도르나 볼리비아는 1492년 스페인 정복전 원주민들의 방식대로 공동체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반미주의와 중남미 통합

차베스는 집권 이후 줄곧 반미 외교를 폈다. 자신의 집권 14년을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부른 것도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남미를 해방시키고 라틴아메리카 통합을 시도했던 시몬 볼리바르처럼 중남미를 자신의 뒷마당쯤으로 여기며 정치·경제적으로 개입해왔던 미국에 맞서 중남미가 단결해야 진정한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미는 극복할 대상과 세력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줘 내부적인 통합과 응집력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했다.

차베스는 석유를 이용해 중남미의 정치적 통합을 시도했다. '봉이 김선달'식의 외교였다. 2006년 국유화 조치로 서방 석유사들이 내는 로열티와 법인세를 올려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이미 2000년부터 OPEC과 협력해 석유 감산에 나서 유가를 높여왔기 때문에 추가된 비용에도 이득을 남길 수 있었던 서방 석유사들은 차베스의 조치를 받아들였다. 2005년에는 카리브해 석유동맹인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를 출범시켰다. 석유를 시장가격보다 낮게 공급해 가난한 수입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중남미 통합운동의 실질적인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중남미가 뭉쳐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의 '혁명'이 지속될지 미완에 그칠지는 그간의 사회개혁 조치들과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얼마만큼 뿌리를 내렸느냐에 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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