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다시 인문학을 위하여

한윤정 문화부 부장 2013. 1. 30.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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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상허(소설가 이태준의 호)학회에서 '쉬플레망 상허'라는 잡지를 내면서 연구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다. '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어떤 고충을 느끼는가' '언제 슬럼프에 빠지고 어떻게 극복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30~40대 연구자들의 답변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면서도 안타까운 것이었다. "은행 창구 앞에서 나의 경제적 가치를 대출가능액으로 환산하는 순간…멘붕이다." "강의 없는 방학 때 아내가 마이너스 통장에서 용돈을 꺼내줄 때 약간 미친다." "애초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한 인문학을 선택해 무전유죄를 실천하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할 밖에요."

인문학에 대한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위해 이 앙케트를 인용하는 건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 담론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철 지난 유행가처럼 수없이 반복돼 왔다. BK, HK 사업을 통해 많은 예산이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끼니는 가깝고 희망은 멀다"는 한 연구자의 말처럼 수요공급이 어긋난 인문학자들의 가난을 국가가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한시적 현상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대학 정원이 급격히 늘어나고 학위를 받으면 자리를 보장받던 선배들을 보면서 대학원에 진학한 이들이 졸업한 뒤 구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인문학(자)의 위기다. 공부 자체의 매력에다 강한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이들이 다른 직업을 갖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렇게 보면 2000년대 들어 많은 대학들이 대학 구성원과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소위 문사철(文史哲) 학과를 축소, 변형, 폐지한 효과는 조만간 나타날 것이다. 공급을 줄였으니 가격은 당연히 올라간다. 때마침 돈줄을 쥔 경제계에서는 인문학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빌 게이츠를 키운 건 동네 도서관이고, 그보다 훨씬 인문학자의 아우라를 풍기는 스티브 잡스의 바탕은 선(禪) 철학에 기반을 둔 경박단소의 미학이다. 뒤늦게나마 인문학을 배우려는 CEO들이 천만원대의 고액 수강료를 내면서 유명한 교수들과의 스킨십을 즐긴다.

사실 인문학 대중화의 성과로, 말랑말랑한 인문학 시장은 이미 크게 늘어났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중년 직장인과 주부, 자기정체성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힘든 청년실업자·노숙자 등 약자들을 위한 인문학이 과잉 공급된 학문 후속세대에 의해 저가로 유지돼 왔다. 고전을 요약한 형태, 나아가 그것을 독서 대상이나 '서른' '마흔'처럼 독자의 생애주기에 맞춘 형태의 대중인문서들이 위로와 공감, 치유를 내세운 힐링서적과 더불어 요즘 출판시장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떠난 인문학이 무슨 소용이냐, 소수 사이에 회자되는 골방의 인문학이 왜 살아남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인문학 강좌와 대중인문서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쉽고 간단하게 속화(俗化)된 형식은 더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인문학의 긴 역사를 생각해볼 때 21세기 대한민국 중산층에 맞춰진 인문학이 갖고 있는 인간 이해는 너무 협소할 수밖에 없다.

다시 연구자들의 앙케트로 돌아가본다. "몇몇 선학의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까마득한 높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는 세계의 속살.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약간의 자유. 한국의 근대 경험을 모델화해보고 싶다는 욕심." "지난날 내 연구에 대한 부끄러움. 늘 새롭게 깨닫게 되는 진리." "문학이 인간다운 세상을 만든다는 생각. 나를 나태에 물들거나 세속적 관행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문학연구라는 생각."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란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결국 인문학자의 가난은 자신이 선택한 운명이기에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치들이 인문학의 위기 이후 어떤 방식으로 대학에, 우리 사회에 보존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 한윤정 문화부 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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