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호가 만난 사람]인기 웹툰 <미생> 윤태호 작가
ㆍ"우리의 많은 제약들 분단현실에서 비롯 향후 한국전쟁 소재와 정면대결 해볼 것"
한겨레신문이 선정한 2000년대 만화 공동 1위를 차지한 < 이끼 > 를 통해 윤태호는 "저 작가는 평생의 재능을 이 작품으로 다 쓴 것 같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윤태호는 < 미생 > 으로 그것을 훌쩍 넘어섰다. 다음 만화 속 세상에 연재되고 있는 < 미생 > 은 네티즌 평점 1위를 계속 고수하고 있고, 얼마 전에는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만화부문 대통령상(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만화비평가 이명석은 "윤태호는 허영만 이래 가장 현실적인 감각으로 다양한 소재의 작품에 도전하고 있는 만화가다.
동시대의 젊은 만화가들이 세련되고 감각적인 기법으로 국적 불명의 판타지 세계로 나아가는 데 비해, 그의 끈끈한 현실감은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만화가 존재 가능함을 보여준다"고 평했고, < 88만원 세대 > 의 공저자 박권일은 "감히 말하자면 < 미생 > 은 문학·영화까지 포함해 지난 10년간 남한 사회에서 생산된 수많은 성장담 중에서도 일급의 서사다. 보편적 설득력을 획득하면서도 동시대성을 놓치지 않아야 비로소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 미생 > 이 바로 그런 희소한 미덕을 갖춘 만화다"라고 평했다. 바야흐로 윤태호의 시대다. 그를 12월 14일 경향신문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지승호(이하 지)
< 미생 > 을 연재하기 전에 강풀 작가가 연재를 1년 가까이 만류했다는데요.
윤태호(이하 윤)
강풀 작가는 " < 이끼 > 같은 인상적인 것을 해놓고 왜 이렇게 한가한 소재를 하느냐, 임팩트가 없어 보이는데"라고 걱정한 거죠. 실제 그런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지
직장생활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직장생활의 자세한 것을 잘 아느냐고 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윤
살면서 후회가 되게 많아요. 그런 부분들에 대한 생각들이 대부분 만화의 내레이션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제가 진짜 욕심이 많아서 문하생 때부터 화실 선배들을 뛰어넘으려고 화실의 질서를 깨가면서 그림을 그렸었거든요. 선배들은 제가 얼마나 싫었겠어요.
지
다른 조직에서도 이런 갈등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거네요.
윤
그렇죠. 저도 살아오면서 사회생활을 해봤을 거 아니에요. 신문 연재하면서 그 신문사의 직급체계도 간접적으로 목격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본 그들의 어떤 태도들, 이런 부분들을 보고 느끼는 게 많죠.
지
후회가 많으면 자기를 학대하게 되잖아요.
윤
저는 진짜 학대 전문가였죠.(웃음) 제가 어릴 때 피부도 안 좋지, 집도 너무 어려웠지, 이러다 보니까 도피하는 구석이 있는 거죠. 아주 못난 나로 만들어놓는. 거기에 가 있으면 자존감은 떨어질지언정 마음은 편해요.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으니까.
지
'내가 뭐 그렇지' 하는 이런 생각.(웃음)
윤
그렇죠. 만화 그리러 올라와서는 그걸 극복하고 싶었던 거죠. 그러다보니까 과한 행동이 나오게 되고, 조그만 실수를 하거나 이러면 후회가 쌓이고 이러면서 좌절하고, 옛날의 습관대로 숨고, 이런 행동들이 있었던 거죠.
지
어떻게 극복한 건가요?
윤
아이가 생기고 나서요. 내 표정이나 어떤 내 말투가 풍기는 뉘앙스 이런 것들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흘러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서 의식적으로 그러지 말자는 결심을 했죠.
지
매회 명대사가 나오잖아요. 그리고 독자들이 그 대사를 패러디해서 댓글을 달고요.
윤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만 그리고 살아서 공부를 되게 못했죠. 그래서 항상 무식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20대 때의 데뷔작을 보면 유치하고 건방지고, 화려한 대사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거기에 소박함이 곁들여지면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가급적이면 대사를 덜 꾸미기 시작했고, 그 상황에 맞는 대사냐, 그리고 주인공의 마음을 확실하게 담고 있는 대사냐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
혹자는 < 이끼 > 를 보고 "이 작가는 평생의 재능을 모두 써버린 것 같다"는 표현도 했었는데요.
윤
그 글을 읽고서 자존감이 낮은 어렸을 때의 저로 다시 확 돌아간 거죠. '진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끼 > 후반부에 나오는 기도원 사건이나 이런 것은 그 순간에 갑자기 떠올라서 하게 된 장면이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내 실력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회의적이었던 거죠. < 이끼 > 는 에너지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내가 다시 구현할 수 있을까, 이런 염려가 많이 있었죠. 그래서 < 미생 > 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지
'장그래'( < 미생 > 의 주인공) 캐릭터에 해당되는 분은 아직도 취재를 못했다고 하셨잖아요.
윤
그분들이 굉장히 많이 메일을 주셨어요. 언제든지 취재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그 중에는 실제 상사에 다니시는 분도 있어요.
지
실존하는 장그래네요.(웃음)
윤
에피소드가 진행이 되면서는 바둑 그 자체로 인한 장그래의 고통이 증명되어야 하는 시점이 분명히 올 거예요. 그때는 그분들을 만나야 될 것 같아요. 연구생 가르치는 사범님께서 해준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요. 바둑은 자기 실력이 늘었는지 안 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고 해요. 예를 들어서 내가 불행히도 이세돌하고 같은 시기에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면 내가 실력이 늘었다는 것이 증명이 안 되는 거예요.
지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 같지만, 절대적으로 자기 동료들을 이겨야 되는 거네요.
윤
기본적으로 전투예요. 전투. 승부사들이고. 아이들 때부터 그런 것이 어떻게 단련됐을까, 패배에 대한 고통이랄지, 지고 나서도 다음에 안 져야 되기 때문에 같이 앉아서 복기를 하잖아요. 어렸을 때 이기고 싶었을 텐데, 졌는데도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고, 마주 앉아서 복기를 할 때 이 어린 아이들이 분노 조절을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지
어떤 프로 기사가 17명이랑 지도다면기를 하는데 누가 장난으로 돌을 하나 옮겨놨는데, 돌아와서 아무 말도 없이 그 돌을 다시 원래 위치에 놔두더랍니다.
윤
바둑 두는 사람들의 패배에 대한 관리능력, 심적인 관리능력하고 암기능력, 진짜 불가사의하거든요. 대여섯 살 때 3·4급의 바둑을 둔다는 게 기본적으로 영재거나 천재인 거죠. 그 수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그것이 그 사람들에게 제일 큰 무기인 것 같아요. 그들이 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집중력 하나만큼은 갖고 있다.
지
좌절됐을 때의 좌절감도 상당히 크겠네요.
윤
우물형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일을 안 한다면 벌판에서 또 다른 자기만의 우물을 파야 되는데, 어디에서 물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죠. 왜냐하면 배운 적이 없으니까. 또 남들하고 힘을 합쳐서 우물을 파본 적도 없구요.
지
깊은 좌절감이 안 좋은 쪽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네요.
윤
바둑이 기본적으로는 명상도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자기 성찰이 있지 않고서는 실력이 늘 수가 없어요.
지 '판을 흔든다'는 말이 나오는데, 만화가로서 판을 흔드는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하나요?
윤
< 야후 > 할 때요. 소년지에서는 다루기 힘든 소재와 당시만 해도 수위가 좀 높았기 때문에. 그때 처음으로 제가 나름대로 자료 조사라는 것의 체계도 좀 만들어본 것이 있구요. 취재라는 것도 했고, 뭔가 계획성 있게 작업을 한 최초의 작업물이라고 할까요.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근대화가 되었다고 해야죠.
지
어떻게 보면 예전에 스스로 자학을 하고 이런 캐릭터가 < 이끼 > 의 유해국에 반영된 건가요?
윤
과거를 후회하고 이런 캐릭터를 실제 구현해내는 것의 끝물이 < 이끼 > 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아요.
지
< 미생 > 에서는 오과장에게 투사를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윤
능란한 선배가 되고 싶은 것이 있죠. < 야후 > < 이끼 > 의 주인공, 루저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저의 스타일이 너무 너무 싫어지더라구요. < 미생 > 에서도 그다지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자로 주인공이 스타트를 끊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뭔가 색채만큼은 다르게 가져가고 싶고, 그 사람을 묘사하는 어법은 다르게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좀 있었죠.
지
허영만 화백의 화실에서는 어떤 점을 배웠다고 생각하세요?
윤
허영만 선생님은 진짜 욕심이 많아요. 문하생들이랑도 경쟁을 하세요. 책 사는 것이라든지, 자료를 사모으는 것이라든지. 요즘 하는 말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계속 현장에 있는 느낌, 아직까지도 어깨 싸움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 이기심이 굉장히 좋았어요. 이게 작가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
실제로 < 이끼 > 보시고 나서 "이제라도 컬러 공부를 해야 쓰겠다. 윤태호에게 지지 않겠다"고 심경을 표하셨잖아요.
윤
며칠 전에도 제 사무실 오셔서 디지털 환경으로 만화 작업하는 것을 보고 가신 다음에 엊그제 화실을 컴퓨터 환경으로 만드셨어요. 그래서 매일 전화가 와요. 이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내일 모레 칠십인데, 지독하시죠.(웃음)
지
조운학 선생님의 화실에서는 뭘 배웠나요?

윤
제가 데생을 하고 싶어서 간 거잖아요. 시위하다시피 해서 하게 됐죠. 그때 제가 어느 정도로 사나웠냐 하면요. 새벽에 화투를 치면서 뭘 사와라 심부름을 시키는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싫어서 화투판을 엎었어요. 그래서 '쟤 안 자르면 우리가 그만두겠다'는 말도 나오고 그랬죠.(웃음)
지
벌써부터 시즌2를 기대하는 분도 많은데요.
윤
만약에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서 또 하게 된다면 장그래가 직급이 높아지거나 승진을 하거나 이런 게 아니라 지금의 범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현실감 있게 하는 그 지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
웹툰으로 시작한 작가들과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윤
지금 나오는 웹툰 작가들을 보면 만화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림의 퀄리티를 좀 양보한다고 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뭐가 재밌는지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거죠. 문하생 출신들은 꽤나 기만적인 술수 몇 개를 가지고 있거든요. 있는 척, 그럴싸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 패션왕 > < 목욕의 신 > 이런 것을 보면 진짜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거든요.
지
다른 작가 작품들도 많이 보나요?
윤
신기해서 2~3편 보다가 말아요. 곽백수 작가랑도 둘이 서로 작품을 안 보거든요. < 가우스 전자 > 같은 경우 같은 기업만화인데, 역시 곽백수가 통찰력이 있는 작가예요. 그 작품의 통찰력에 내가 휩싸일까봐 그게 싫은 거죠. 그래서 안 봐요.
지
한국전쟁을 소재로 만화를 구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윤
자기 스스로의 세계관, 이런 것들을 묘사하고 싶어지는 나이가 있나봐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제약들이 분단현실 때문에 비롯된 것이 의외로 엄청나게 많더라구요.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마주하고 싶은 소재이고, 정면대결해보고 싶은 소재인 거죠.
지
신안 앞바다 보물선 도굴꾼 이야기도 구상하고 계시다면서요.
윤
< 이끼 > 하고 < 미생 > 을 하면서 이야기를 이렇게 꾸미는 거구나 하는 지점에서 재미를 본 부분이 있어요. 그 지점에서 뭔가 극한의 재미를 좀 느껴보고 싶은 거죠. 사실 바닷속에 안 들어가도 되는 이야기예요. 그 팀을 어떻게 꾸릴까, 그리고 그릇과 관련한 인문학적인 지식들, 아주 재미난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거죠.
지
< 슬램덩크 > 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요. 일본이라는 좋은 환경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닐까요?
윤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은 환경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그 작가의 어떤 내적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지. 예를 들어 <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 을 그린 이명진씨 같은 경우도 사건 같은 케이스구요. 양영순 작가의 < 누들누드 > 같은 것도 환경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를 잡아먹어버릴 만큼의 자기성취 동기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지
영향을 받았거나 좋아하는 만화가는 누군가요?
윤
저는 허영만 선생님인데요. 너무 뻔한 대답이니까 빼고 이야기를 한다면 < 슬램덩크 > 작가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 아키라 > 의 작가 오토모 가쓰히로예요. < 슬램덩크 > 는 사실 제가 스토리에 대한 각성이 조금 생기고 나서 슬램덩
크를 더 좋아하게 됐던 거구요. 그림적으로는 < 아키라 > 를 많이 추종했었죠.
지
캐릭터를 만드실 때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시나요?
윤
학생들한테 이야기할 때도 '캐릭터 잡을 때 한계영역에 대해서 분명히 만들어라, 그러면 오히려 스토리가 더 풍부할 거다'라고 얘기하는데요. 사실은 외부의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한계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저는 그게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거죠.
지
후배 중에서 좋아하는 작가가 있습니까?
윤
주호민이나 하일권이나 정필원이나 이런 친구들을 보면 무섭다기보다 후배지만 기분 좋은 동료들이죠.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나랑 비슷한 쾌감을 맛보는.
지
< 미생 > 에 대해서 한 마디 더 보탠다면….
윤
< 미생 > 은 인터넷이나 이런 데서 자꾸 힐링 만화라고 하지만, 고군분투 만화거든요. 지구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사는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될까' 고민하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예요. 제가 보는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지향점을 내포하고 있는 만화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글·지승호 인터뷰 전문작가 sibidori@paran.com >
<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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