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 "인터뷰로 시작된 16년 인연.. 제인 구달과 손잡고 재단 설립"

박주연 기자 2012. 11. 1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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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다양성 재단' 만들어

생물학자 겸 생태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58)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이자 침팬지 연구가인 제인 구달 박사(78)와 손잡고 '생명다양성 재단(J & J Biodiversity Foundation)'을 설립한다. 최 교수는 13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방한하는 구달 박사와 함께 16일 이화여대에서 재단 창립식을 갖는다. 이어 이사회와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이르면 올해 안에, 늦어도 내년 3월까지 재단 설립을 마무리짓는다는 구상이다. 지난 8일 오후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최 교수를 만났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8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 부근 돌담길에서 웃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모든 생명 더 나은 삶 위해동물 보호와 사회문제 고민환경 살리기 교육사업 등순수과학 연구 활동 지원"

- 생명다양성 재단, 이름부터 생소한데요.

"공익재단을 설립해 사회에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것은 제가 오래전부터 꿈꿔온 일이에요. 아름다운재단의 박원순 변호사와 환경재단 최열 대표를 옆에서 도우면서 부러웠거든요. 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죠. 이제는 때가 됐다고 생각해 어렵게 작심했습니다."

- 재단은 어떤 활동을 하나요.

"동물을 보호하고 모든 생명을 위해 환경을 되살리는 일을 교육사업과 풀뿌리 환경운동을 통해 펼칠 계획이에요. 또 저출산·고령화·빈부격차 같은 한국 사회의 병폐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장기적으론 순수과학 연구 지원사업도 펼칠 생각이죠. 제인 구달의 정신과 철학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1977년 설립된 제인구달연구소(JGI)의 한국지부 역할도 병행하게 됩니다. 재단 설립에 필요한 종잣돈 5억원은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대표와 교보생명의 신창재 회장이 맡기로 했어요."

- 재단이 운영되려면 여러 기업의 후원이 지속적으로 필요하겠군요.

"기업이 장수하려면 진실로 사회에 기여해야 합니다. 이를 이제 기업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를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동행'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를 기대하죠. 두 팔 걷어붙이고 열심히 뛸 생각이에요."

제인 구달 박사와의 인연이 궁금했다. 구달 박사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최 교수에게 직접 안부 전화를 걸 만큼 최 교수와 막역하다. 동물보호운동가로 거듭난 가수 이효리씨의 간청으로 지난해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구달 박사와 만남을 주선한 것도 최 교수였다.

- 구달 박사와는 처음에 어떻게 만났나요.

"1996년 한 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월간 '과학동아'인데, 구달 박사가 처음 방한하니 저더러 인터뷰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죠. 듣자마자 제 입에선 '어딘데요' '몇신데요'라는 말만 튀어나왔어요. 정말 존경하는 분인데 한 번도 못 뵈었거든요. 제가 뛸 듯이 기뻐하니까 집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해요. '제인 구달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 했더니, 자기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당시 7살이던 아들까지 쫓아와 책에서 읽은 침팬지에 대해 선생님께 이것저것 묻는 바람에 민망해서 눈치를 줬더니, 되레 선생님이 '호기심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 그냥 놔둬라' 하며 웃으셨어요. 또 당시 선생님이 커버스토리로 나온 '내셔널지오그래픽'지의 제일 끝 쪽에 제 연구 성과가 작게 소개돼 있어서 드렸더니 반가워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2002년 일본 영장류연구소에 갔을 때 마침 그곳을 방문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죠. 저는 용기를 내 '혹시 제가 한국에 초청하면 오실래요?' 했더니 '가야죠' 하셔서 자주 한국에도 모시게 된 거예요."

사실 그는 '사회참여형 학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간 우리 사회 큰 물줄기의 방향을 잡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 대표적인 게 1999년 동강댐 건설을 막기 위해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호소글을 보내 '댐 건설 전면 백지화'를 이끌어낸 것과 2005년 호주제 폐지 등이다.

- 호주제 폐지에 기여한 공로로 남성 최초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죠.

"호주제 폐지 논란이 한창일 때 EBS 강연에서 '만약 동물사회에 호주제가 있다면 호주는 당연히 암컷'이라고 말했다가 난리를 겪었죠(웃음). 전화기를 켜놓을 수 없을 만큼 남성들의 험한 욕설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왜 이제야 나타나셨느냐'며 통한의 삶을 털어놓는 중년 여성들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는, 기왕 욕먹은 거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고 글과 강연을 통해 관련 발언을 계속했죠. 그랬더니 어느 날 헌법재판소에서 자문을 해달라며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는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앞에서 강의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상황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언젠가 회고록에 쓸 생각"이라고 했다.

- 어떤 상황이었기에….

"판사들 앞에서 말로만 공작새니 바다코끼리니 하면 알아듣겠어요? 그래서 파워포인트를 준비했으니 15분간만 강의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우린 그런 거 해본 적 없다고 하길래, 언제나 최초라는 게 있지 않으냐고 했어요. 판사들끼리 회의를 하더니 영사기가 없다는 궁색한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휴대용을 가져왔다고 하니 이번엔 스크린이 없다고 해요. 흰 벽면을 대신 사용했죠. 온갖 동물을 보여주고 강의한 뒤 이런 말로 마무리했어요. '저는 자연과학자이기에 우리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에 직접 개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보신 대로 자연계는 암컷 중심으로 모든 일이 벌어지기에 인간사회가 얼마나 예외적인가를 말하고 싶다. 인간사회는 동물사회와 달라 모든 나라에 호주제가 있으면 이해하겠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있다면 설명이 안된다. 자연과학자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2주 후 위헌 판정이 났어요. 9회말에 나가 결정타를 날린 셈이죠."

그는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폐기할 수 있다면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연생태계의 오묘함을 충분히 모르면서 단지 경제적 이득이 있다는 이유로 강을 파헤치는 건 후세를 위해서도 옳지 않기 때문이란다.

화제를 개인사로 바꿨다. 그의 사회적 발언들의 토대가 되고 있는 생물학자로서의 삶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운명'이라고 했고, "그 운명에 늘 감사한다"고 했다.

- 서울대 의예과에 응시했다가 두 번 내리 낙방한 걸로 아는데, 동물학과로 진학한 까닭이 뭐예요.

"무릎 꿇고 아버지 앞에서 '삼수하겠다'고 말할 때,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2지망란을 비워둔 채 담임선생님께 입학지원서를 제출했는데 제가 동물학과에 합격했다는 거예요. 담임이 의예과와 제일 가까워 보이는 동물학과를 2지망으로 제게 알리지도 않고 써놓은 거죠. 입학했지만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운명'임을 깨달은 극적인 순간이 있었어요. 1984년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박사 과정을 밟을 때였어요. 난생처음 정글에 갔는데 첫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거예요. 폭우 속에서 흠뻑 젖은 채로 진흙밭에 뒹굴면서 원숭이를 쳐다보고 앉아 있는데, '아이엠 해피(행복해)!'라는 고함이 절로 계속 터졌어요. 이 짓 하려고 의예과 떨어지고 그렇게 방황한 거구나 싶더라고요. 그 길로 아버지께 편지를 썼죠. 의대 진학을 포기한 제게 실망을 많이 하셨던 아버지가 그날로 저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셨어요."

이후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79년 미국땅을 밟은 그는 8년간 하버드대 기숙사 사감을 해가며 어렵게 공부했다. 도미 11년 만인 1990년에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남들은 7~8년 걸리는 떠돌이 강사생활을 2년 만에 끝내고 1992년 생물학 분야에서는 하버드대보다 우위라는 미시간대 조교수로 임용됐다.

-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를 박차고 2년 만인 1994년 귀국했는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나요.

"당시 서울대의 요청을 1년6개월이나 미루고 있을 때였어요. 과연 한국에서도 내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두 명의 동료 학자로부터 충격적 내용의 e메일이 왔어요. '네가 우리보다 잘나서 2년 만에 교수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기 바란다. 너는 분명히 동양인 쿼터가 있어서 임용됐을 것이다'라고 써 있는 거예요.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미국 사회에 흡수되려고 노력했지만, 인종차별의 충격을 겪고나니 한국이 그리웠어요. 귀국 비행기에서 마음을 정리했죠. 설령 세계적 학자가 못되더라도 후학을 가르치면서 사회를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고요."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그는 학자로서의 성취도 이뤄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참여해 2010년 영국 출판사가 발간한 < 동물생물학 백과사전 > 의 무척추동물사회행동 부문 편집장으로 발탁될 만큼 그의 명성은 높다. 그는 "열흘 전 격년으로 열리는 국제사회성곤충연구회에서 2014년 학술발표회의 기조강연을 요청받고는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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