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수시절60] 조재진, 짧지만 굵었던 그의 축구 이야기

2011년 3월, 스트라이커 조재진(31)이 현역 은퇴를 선언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의아해 했다. 선수로서 한창 나이라 할 수 있는 30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만 했다. 그러나 조재진은 20대 초반부터 선천성 고관절 이형성을 앓고 있었고, 이 병은 조재진의 축구인생 내내 그를 괴롭혔다.

비록 이른 나이에 은퇴했지만, 조재진은 축구 선수로서 많은 것을 이뤘다. 2003년 6월 우루과이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한 그는 총 40회의 A매치에 나서 10골을 기록했다. 또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6년 독일 월드컵, 2007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활약을 펼쳤다. 조재진의 짧았지만, 굵었던 축구 인생을 돌아본다.

짧지만 굵었던 선수 시절을 뒤로 하고 현역에서 은퇴한 조재진 ⓒ이상헌

축구 좋아하던 파주 소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조재진은 어린 시절부터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볼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에 아버지 역시 축구를 비롯한 각종 운동을 즐겨하는 스포츠 매니아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조재진은 신산초 1학년 때부터 축구부에 가입해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4학년이나 5학년부터 축구를 시작하는 것을 감안하면 무척 빠른 입문이 아닐 수 없다.

"동네에서 볼 차는 것을 너무 좋아했고, 또래에 비해서 조금 잘하기도 했어요. 여기에 축구 매니아이신 아버지가 다니시는 조기축구회에 따라다니면서 축구의 즐거움을 빨리 배웠죠. 그래서 신산초에 입학하자마자 축구부에 들었습니다.(웃음) 사실 우연찮게도 아버지 친구 분이 신산초 감독님이셨어요. 그래서 자연스레 하게 됐죠.(웃음)"

신산초에서 6학년 1학기까지 보낸 조재진은 대신중 진학을 위해 서울의 숭신초로 전학을 갔고, 결국 대신중에 진학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조재진은 체구도 왜소했고, 파워도 부족했다. 그로 인해 전방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가 그의 자리였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체격이 굉장히 왜소했어요. 집에서도 걱정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 저 나름대로는 기술로 이겨내겠다는 생각에 그런 쪽의 훈련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대신고 진학 후에 경기에서 어깨가 부러져 3개월을 쉬고, 다른 쪽 어깨도 다쳐서 3개월을 또 쉰 적이 있었어요. 그 기간에 갑자기 키가 컸죠. 1년에 15cm씩, 2년에 걸쳐 거의 30cm 정도가 커졌어요."

대신고 시절의 조재진 ⓒKFA 홍석균

고교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

2년 사이에 30cm 가까이 키가 크면서 조재진의 포지션도 자연스럽게 스트라이커로 이동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성장으로 신체 밸런스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힘든 시기도 보내야 했다. 그 때 그를 이끌어줬던 이가 바로 K리그 득점왕 출신의 임근재 코치(현 대신고 감독)였다.

"갑자기 키가 커서 신체 밸런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보강운동을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은 정말 중요한 시기에 지도자를 잘 만났다는 거예요. 대신고 2학년 때 임근재 감독님이 코치로 오셨는데, 그 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죠."

"스트라이커로서 문전에서의 움직임, 슈팅 타이밍, 골 넣는 감각 등이 중요한데, 이런 부분들을 세밀하게 가르쳐주셨어요. 그리고 볼이 왔을 때의 원터치 또는 투터치로 골을 넣는 방법 등도 많이 배웠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재진은 대신고를 고교 정상권으로 이끌며, 고교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신고 졸업 후 곧바로 수원 삼성에 입단, K리그 무대로 뛰어들었고, U-19 대표팀에서도 주축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했다.

아시아 무대에서의 좌절 맛보다

2000년, 수원에 입단한 조재진은 U-19 대표팀의 일원으로 이란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이 당시 멤버는 조재진 외에도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박용호, 조병국, 김동진 등 호화멤버였다.

"제가 생각해도 어느 청소년대표팀보다 멤버가 좋았고, 자신감도 넘쳤어요. 처음 소집했을 때 그 또래에서 잘한다는 선수들만 모이니 빛이 나더라고요.(웃음) 특히 저는 공격수니까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을 유심히 봤는데, 천수나 태욱이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면 정말 놀라웠어요."

"성격 자체도 터프하고 담대했죠. 저는 당시만 해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편이었거든요. 그 때부터 나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렇게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나 U-19 대표팀은 중국과의 예선 1차전에서 0-1로 패하면서 불안함을 보였고, 이라크와의 예선 4차전에서도 0-0으로 비기면서 2승 1무 1패를 기록,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2001년에 열리는 FIFA U-20 월드컵 출전 티켓도 날아갔다.

"멤버가 좋아 자신 있게 대회에 임했는데, 중국과의 1차전에서 이상하게 경기가 말리면서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죠. 일단 경험 부족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그 전까지 큰 국제대회에 나간 적이 없었고, 그로 인해 개인 능력은 좋았음에도 위축되어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어요."

인터뷰 중인 조재진 ⓒ이상헌

호화멤버의 수원에서 자리 잡지 못하며 방황

U-19 대표팀에서는 중심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조재진의 K리그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당시 수원에는 공격진에 샤샤, 박건하, 데니스, 산드로, 서정원, 비탈리 등이 버티고 있었고, 고교를 갓 졸업한 조재진이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데뷔 연도에 5경기, 다음 해에도 3경기 출장에 그쳤다. 공격 포인트도 '0' 이었다.

"수원에 입단해서 첫 훈련을 마치고 사우나에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박)건하 형이 오셔서 '재진아, 할 만 하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솔직히 첫 날 훈련을 마치고는 자신감도 있어서 '예. 할 만 합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건하 형이 웃으시면서 '야, 이 놈 봐라' 그러시더군요.(웃음)"

"그런데 제가 잘 몰랐던 것이 프로 물을 먹은 선수들은 동계훈련 중에는 50~60% 정도로 몸을 만든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100% 였는데 말이죠.(웃음) 설렁설렁하시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시즌이 개막하고 경기가 시작되면 달라지더라고요. 동계훈련 때는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에게 출장기회가 와서 나가면 완전히 막히더군요. 정말 높은 벽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기회를 얻기 위해 상무행 결심

호화멤버의 수원에서 이렇다 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조재진은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최고의 공격수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도 사실. 실전 경험이야말로 선수가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조재진은 군 문제도 빨리 해결할 겸 상무행을 결심했다.

"당시 수원은 최고의 클럽이었어요. 정말 좋은 공격수 선배들이 많았죠. 그렇기 때문에 출전 기회가 적다고 방황하지는 않았어요. 대선배들과 같이 훈련하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경험이자 공부였거든요. 선배들의 움직임이나 볼 차는 것 하나하나 유심히 보면서 많이 배웠죠."

"그래도 분명 경기를 뛰고 싶은 마음은 있을 수밖에 없죠. 군 문제도 빨리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김호 감독님과 상의해서 상무에 자원입대한 것이에요."

상무에 입대한 조재진은 와신상담,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하며 한 단계 도약을 꿈꿨다. 여기에는 U-19 대표팀 시절의 동기인 이천수, 최태욱의 2002 한일 월드컵 참가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볼을 차던 친구들이 꿈의 무대인 월드컵에 나서 경기에도 뛰고, 4강의 영광을 누렸으니 조재진도 이를 악물고 훈련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제가 축구하면서 상무 시절만큼 피눈물나게 훈련한 적이 없었을 거예요. 고교 때 같은 레벨이었던 천수나 태욱이가 2002 월드컵에 출전하고, 엄청나게 주가가 오르면서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죠.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월드컵 때는 TV도 안 보고, 운동만 했어요."

우루과이와의 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조재진 ⓒKFA 홍석균

올림픽대표팀과 A대표팀에서의 부름

그리고 군에서의 마지막 해인 2003년, 상무는 광주를 연고로 해 K리그에 참여했다. 2년 만에 K리그 무대에 다시 선 조재진은 상무의 선봉장으로 31경기에 나섰다. 기록 상으로는 3골-3도움이었지만, 전방 스트라이커로서의 폭넓은 움직임과 동료를 살리는 플레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조재진은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결성된 김호곤 감독의 올림픽대표팀에 붙박이 멤버로 낙점됐고, 움베르토 쿠엘류 감독의 A대표팀에도 승선했다. 특히 A대표팀 선발은 조재진에게는 꿈만 같던 일이었다.

"대표팀 명단에 제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정말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뻤어요. 저에게는 큰 목표였거든요. 다만 생각해보면 이런 아쉬움은 있어요. 대선배들과 함께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제가 가장 어렸거든요."

"그래도 훈련장에 들어갈 때만큼은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선배들을 제치고 한번쯤은 스타팅으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이었거든요. 다행히 쿠엘류 감독님이 좋게 봐주셨던 것 같습니다."

쿠엘류 감독의 인정을 받은 조재진은 2003년 6월 8일, 남미 강호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후반 교체 투입되며 정식으로 A매치에 데뷔했다. 그리고 3일 뒤에는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선발 출장의 기쁨도 맛봤다. 그리고 A매치 세 번째 출장이었던 AFC 아시안컵 예선 베트남전에서 데뷔골까지 터뜨렸다.

"처음 경기장에 들어갔을 때, 10분 정도는 아무 것도 안 보이더군요.(웃음) 선수의 움직임도 안 보이고, 어디로 패스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어리둥절했죠. 10분 정도 지나면서 땀이 조금 나고, 상대 수비수들과 몸도 부딪치면서 조금씩 정상 컨디션을 찾았던 것 같아요."

"A매치 데뷔골에 대한 느낌은 별로 크진 않았어요. 상대가 워낙 약한 팀이었기 때문에 골을 넣었다는 기쁨보다는 당연한 것을 해냈구나라는 마음이 더 컸다고 해야 할까요."

이 무렵의 조재진에 대해서는 사실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조재진은 전방에 박혀있기보다는 폭넓은 움직임으로 수비진을 끌어냈고, 골 넣는 것 자체보다도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에 집중했다.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할 때에도 전방부터 적극적인 수비를 보여주면서 팀 플레이에 매진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움직임 면에서는 최고라며, 팀을 살려주는 스트라이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스트라이커임에도 득점력이 너무 떨어진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에요. 일단 저는 전방에서 많이 움직이려고 노력했어요. 프로에 처음 들어왔을 때 김호 감독님께서 스트라이커도 폭넓게 움직이고, 앞선에서부터 수비를 적극적으로 해줘야한다고 강조하셨거든요.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경기장에서 나온 거죠."

"득점이 적었다는 것은 그만큼 슈팅 기회를 많이 못 잡았다는 것인데, 일단 제가 부족했던 부분도 있었고요. 또 한 가지, 저는 확실한 기회가 아니면 더 좋은 위치의 동료에게 볼을 내주는 것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던 탓도 있어요."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전승으로 통과한 올림픽대표팀과 조재진 ⓒKFA 홍석균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극적인 8강 진출..그리고 아쉬움

올림픽대표팀에서 조재진은 더욱 빛났다.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6전 전승으로 통과하는 동안, 그는 3골을 기록하며 최다골의 주인공이 됐다. 자신감 속에 맞이한 아테네 올림픽. 상대는 홈팀 그리스와 북중미 맹주 멕시코, 아프리카의 다크호스 말리였다.

올림픽대표팀은 홈팀 그리스와의 1차전에서 2-0으로 앞서나가다가 후반 중반 이후 두 골을 내주며 2-2로 아쉽게 비겼다. 이어 열린 멕시코전에서는 김정우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6전 전승을 거두는 동안, 단 한 골도 내주지 않고 완벽하게 통과했거든요. 선수들 사기나 자신감은 최고였어요. 실제로 그리스와의 1차전에서 2-0으로 리드하면서 기세를 탔죠."

"그런데 당연히 이긴다는 생각, 첫 승에 대한 선수들의 흥분, 이런 부분이 겹치면서 한 골을 내줬고, 결국은 동점골까지 내주고 말았어요. 큰 경기에서의 경험이 부족했음을 뼈저리게 실감했죠. 사실 따지고 보면 나쁜 결과도 아니었어요. 홈팀을 상대로 비겼으니까요. 다만 이기고 있다가 동점을 내준 것이 아쉬웠던 것이죠."

그리고 말리와의 3차전. 조재진의 진가가 드러난 경기였다. 0-3으로 끌려가며 완패할 것 같았던 상황에서 조재진은 후반 12분과 14분에 연속골을 터뜨리며 추격의 불씨를 지폈다. 이후 상대 자책골이 더해져 올림픽대표팀은 극적인 3-3 무승부를 기록했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말리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됐는지 0-3까지 당했어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겼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죽기살기로 뛰었죠. 결국 (김)동진이의 크로스를 받아 제가 두 골을 넣었고, 상대 자책골까지 나와 무승부를 기록할 수 있었어요."

"특히 동진이와는 워낙 친하고, 방도 같이 썼어요. 동진이의 크로스를 받아 제가 헤딩슛하는 훈련도 많이 했고요. 팀 훈련이 끝나고도 제가 부족하다 싶으면 동진이에게 크로스를 올려달라고 부탁하곤 했죠. 동진이 왼발 크로스는 워낙 예술이잖아요. 훈련 때 함께 했던 장면들이 실전에서 연이어 나오니까 너무 기분 좋더군요.(웃음)"

극적으로 8강에 오른 올림픽대표팀은 남미 강호 파라과이와 맞서게 됐다. 파라과이와는 올림픽을 앞두고 고양에서 평가전을 가진 바 있고, 당시 조재진의 골로 1-1로 비겼었다. 그러나 올림픽 본선에서 만난 파라과이는 훨씬 강했다. 조재진도 파라과이 수비진의 벽을 뚫기가 버거웠다. 먼저 세 골을 내준 올림픽대표팀은 후반 중반 이후에 이천수가 연속골을 터뜨리며 2-3까지 따라붙었지만, 거기까지였다.

"한국에서 평가전을 했을 때는 파라과이의 주축 선수들은 오지 않았어요. 올림픽 8강에서 맞붙었는데, 기량 차이가 확실히 나더군요. 우리가 정말 강팀을 만났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특히 공격수 입장에서 파라과이 수비는 정말 대단했어요. 공간도 없고요. 남미 선수들은 키가 조금 작다는 느낌이 있는데, 파라과이 수비수들은 체구도 좋고, 뼈대 자체가 달랐어요. 저도 웬만하면 몸싸움에서 안 밀리는데, 부딪쳐보니까 '얘네들과 몸싸움하면 내가 밀리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웃음) 그래서 공간으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공간도 없더라고요. 몸싸움도 안돼, 공간도 없어, 공격수로서 미치겠더군요. 자연히 어려운 경기를 할 수밖에 없었죠."

올림픽 8강에서 만난 파라과이는 평가전 당시의 파라과이가 아니었다.(사진은 평가전) ⓒKFA 홍석균

J리그에서의 조재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둔 2004년 7월, 일본 J리그의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한 조재진은 2007년까지 뛰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무렵의 조재진은 득점에도 적극 가담해 정규리그에서 101경기에 나서 45골을 터뜨리는 고감도 득점력을 과시했다. 특히 2006년에는 16골로 브라질 선수들이 득세하는 득점랭킹에서 공동 7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제가 '용병'이잖아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록적으로도 뭔가 보여줘야 해요. 아무리 움직임이 좋아도 골을 못 넣으면 목이 달아나는 상황이었죠. 자연히 욕심을 더 부려야 했고, 좀 더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해야 했어요.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사실 일본 선수들은 처음에 외국인 선수가 오면 패스도 잘 안주거든요. 그런데 저는 운 좋게도 두 경기 만에 데뷔골이 터지면서 일본 동료들의 신뢰를 얻었어요. 그러면서 득점 기회도 더 많이 잡을 수 있었죠."

"K리그와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어요. K리그 선수들은 모두 터프하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버거운 면이 있죠. 그 대신 제가 개인 돌파만 잘해놓으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면도 있어요. 반면 J리그 선수들은 개개인의 스피드나 피지컬, 파워는 부족해요. 그런데 지역방어를 굉장히 잘 서거든요. 커버 플레이가 뛰어나요."

독일 월드컵 프랑스전에서 고군분투하는 조재진 ⓒKFA 홍석균

2006 독일 월드컵, 조재진의 재발견

J리그에서 맹위를 떨치던 조재진은 2006 독일 월드컵 최종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부동의 스트라이커였던 이동국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그에게도 좀 더 많은 기회가 왔다. 그리고 월드컵 직전에 스코틀랜드에서 가졌던 가나와의 A매치를 통해 주전으로 도약했다.

"원래 아드보카트 감독님 체제에서 저는 세 번째 공격수 정도였어요. (안)정환이 형도 있었고, 예선 때는 (이)동국이 형도 있었고요. 그런데 당시 베어벡 수석코치님이 저를 강하게 추천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나전에 기회를 얻었는데, 제가 잘했어요.(웃음) 그러면서 감독님의 눈에 들었던 것 같아요."

결국 조재진은 독일 월드컵 본선 세 경기에서 모두 선발 멤버로 기용되며, 진가를 발휘했다.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는 박지성의 골로 연결되는 헤딩 패스로 도움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팀 공헌도에서 월등했다. 당시 대표팀은 미드필드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전방의 조재진에게 롱 패스를 시도하고, 그 이후 세컨드 볼을 획득해 공격을 전개하는 전술을 펼쳤다. 그 속에서 조재진은 파워나 점프력이 뛰어난 유럽 및 아프리카 선수들을 상대로 쉴 새 없이 공중볼 경합을 펼쳐야 했다.

"제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어요.(웃음) 우리가 미드필드에서 볼을 소유하면서 플레이를 펼쳐야 했는데, 전력이 떨어져 볼을 소유할 수가 없으니까 수비에서 한 번에 길게 올라오는 패스가 많았어요. 그 볼을 제가 헤딩 경합으로 따내야 했던 거죠. 나중에 분석 자료를 보니까 경기당 40~50번씩 헤딩을 했다고 하더군요. 발로 볼을 터치하는 것보다 머리로 하는 것이 더 많을 정도였죠.(웃음)"

조재진의 제공권은 세계 톱 레벨의 수비수들과의 경쟁에서도 빛을 발했다. 실제로 월드컵이 끝난 후 전세계 언론에서는 타겟 스트라이커로서의 조재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KFA 기술국(현 기술교육국)에서도 조재진의 헤딩은 한국의 역대 공격수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와 함께 따로 교육용으로 비디오 영상을 만들려고 했을 정도다.

"사실 많이 부족했죠.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제가 공중볼을 따내주지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공격이 없었어요. 어떻게든 내 머리에 맞춰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만약 내 머리에 못 맞춘다면 상대 수비수 머리에도 못 맞추게 한다는 마음으로 임했죠."

"다행히 제 플레이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 싶다는 바람을 달성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지성이 형의 골을 어시스트한 것만 해도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월드컵 후 유럽에서의 스카우트 제의..그러나 메디컬 테스트에 발목 잡혀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유럽의 여러 클럽에서 영입 제의를 했지만, 조재진은 2006시즌은 시미즈에서 마쳤고, 2007년이 되어서야 유럽 진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메디컬 테스트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뉴캐슬과는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무산됐고, 이후 풀럼과 포츠머스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

"2006년에는 독일의 중하위권, 벨기에, 네덜란드 클럽들로부터 제의가 왔는데, 일단 시미즈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계약 기간은 채워주고 나가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만약 빅리그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면 또 어땠을지 모르지만 말이죠.(웃음)"

"2007년에 시미즈와 계약이 종료된 이후에 다시 유럽 진출을 노렸고, 뉴캐슬과는 가계약까지 했어요. 메디컬 테스트만 통과하면 정식 계약을 하는 상황이었죠.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클럽 사무실에서 기다리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결과가 안 나오더라고요. 그 사이 뉴캐슬 직원이 경기장도 소개해주고, 라커룸도 보여주는데, 거기에 제 이름이 박힌 유니폼도 걸어놨더라고요. 이제 다 됐다, 사인만 하면 된다는 마음에 설레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뉴캐슬 측에서 의무스태프와 몇 시간을 상의했는데 안 될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짐 싸서 한국으로 와야 했죠. 이후에도 풀럼과 포츠머스에서 연락이 와서 같은 과정을 밟았는데, 모두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어요."

'선천성 고관절 이형성'이 문제였다. 사실 이 병은 조재진이 20대 초반이었을 때부터 그를 괴롭혔던 병이었다. 고관절, 즉 엉덩이쪽 관절이 탈구되어 뼈가 깎이면서 골반에 뼈조각이 돌아다니는 상황이었고,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아테네 올림픽에 가기 전부터 고통이 컸어요. 김호곤 감독님이나 최주영 의무팀장님도 알고 계셨는데, 제 미래를 위해 아무 말씀 안하셨던 거죠. 양쪽이 모두 안 좋았는데, 특히 왼쪽이 좋지 않았어요. 뛸 때마다 통증이 왔고, 턴 동작이나 슈팅 동작은 많이 힘들었어요. 슈팅하려면 왼발로 내딛어야 하니까 그 때 통증이 오는 거였죠."

"계속 이런 상태이다 보니 스스로 위축되고, 슈팅도 잘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어요. 약을 먹으면 통증이 완화되긴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거든요."

"병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천적인 경우이긴 한데, 성장 과정에서 키가 너무 갑자기 많이 컸던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하더군요. 또 어릴 때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지 못하고 혹사를 당한 탓도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 새벽에 시멘트 바닥인 도로를 8km씩 뛰고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무리가 많이 갔던 것 같아요."

"사실 2004년에 시미즈로 갈 때에도 메디컬 테스트에서 걸렸었어요. 그런데 당시 시미즈에서는 저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뛸 수 있겠는지 솔직히 말해달라고 했어요. 그 때는 제가 충분히 뛸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했죠. 그래서 시미즈와 계약을 할 수 있었죠."

전북 시절의 조재진 ⓒKFA 홍석균

유럽 꿈을 접고, K리그로 복귀..그리고 1년 만에 일본행

유럽행이 무산되고 좌절한 조재진에게 먼저 제의를 한 곳은 오미야였다. 그러나 시미즈와의 의리 때문에 조재진은 고사했고, 이 때 전북의 최강희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국 조재진은 전북 유니폼을 입고, 2004년 이후 4년 만에 K리그로 복귀했다.

"시미즈는 제 병을 알고도 받아준 고마운 클럽이에요. 유럽에 가기 위해 나왔는데, 무산됐다고 곧바로 J리그의 다른 클럽으로 갈 수는 없었죠. 그 와중에 최강희 감독님께서 감사하게도 저를 불러주셨어요."

"전북에서도 메디컬 테스트에서 걸렸죠. 그런데 감독님과 만나서 아직까지는 뛸 수 있다고 말씀드렸고, 감독님도 흔쾌히 허락해주셨던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전북에 입단한 조재진은 31경기에 나서 10골-3도움의 준수한 성적으로 전북의 공격을 이끌었다. 수원 시절, K리그에서는 항상 움츠러들었던 그에게는 만족스런 마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전북에서의 1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감바 오사카에서 그에게 큰 액수의 계약을 제시했고, 15억원의 이적료를 얻을 수 있었던 전북으로서도 만족스런 상황이었다.

"전북에서도 제 연봉이 많은 편이었고, 클럽으로서는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여기에 감바가 엄청난 금액을 제시한 것이고요. 최강희 감독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조건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래도 네가 40세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있다면 내가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축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보내줘야 할 것 같다'고...감독님께는 송구스러울 따름이죠."

"감바에서도 제 몸 상태를 알고 있었어요. 그걸 감수하고 영입한 거였죠. 니시노 감독님께서 그 전에 데리고 있던 브라질 선수도 같은 병이 있었는데, 충분히 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불러주셨던 거예요."

감바 오사카 시절의 조재진 ⓒKFA 홍석균

2010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고통으로부터 벗어나다

2009년부터 감바 오사카에서 두 시즌을 치른 조재진은 2011년 초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만 30세의 한창 나이였지만, 고통 속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는 더 이상의 고통을 감수할 여력이 없었다.

"너무 일찍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제 몸 상태를 봐서는 오히려 선수 생활을 길게 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참고 뛰었던 거죠. 물론 좀 더 뛰고 싶다는 미련은 남아요. 제 친구들은 아직 뛰고 있잖아요. 친구들 응원하려고 TV 중계를 보거나, 경기장에서 보면 정말 뛰고 싶어요. 그러나 몸이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죠."

이제 조재진은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이를 위해 지난 4월초, 파주 NFC에서 열린 AFC C급 지도자 코스를 이수했다. 지금부터 새로운 길을 걷는 셈이다.

"축구를 20년 넘게 했지만, 확실히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많이 다르네요. 스스로 축구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린 선수들부터 가르쳐서 지도자로서도 단계적으로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조재진은 친구들이 아직 경기장에서 뛰는 것이 부럽다고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도자로서의 길은 조재진이 가장 앞서나가는 셈이다. 좋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KFA 홍석균

# 어린 공격수들을 위한 조재진의 팁

"가장 기본은 오늘 하는 훈련을 왜 하는지, 그 목적을 알고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냥 감독이나 코치가 시킨다고 수동적으로 해서는 절대 발전할 수 없죠. 그리고 골대 앞에서는 정말 쉬운 볼이라도 100% 집중해서 골을 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반복적으로요. 그래야만 몸에 배어서 실전에서도 실수하지 않아요."

"그리고 어린 선수들을 보면 몸 관리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가 아프면 치료 잘 받고, 마사지도 받고, 스스로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어린 선수들을 보면 아픈 선수들이 얼음을 댄 상태에서 당구 치고 돌아다니고 그래요. 자기 관리를 좀 더 확실하게 하는 선수가 오랜 기간 좋은 모습으로 활약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