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60년전 내가 만든 옷, 고객 → 조카 → 딸 대물림에 자부심"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국내 첫 패션쇼의 디자이너 노라노씨는 요즘도 옷을 만드는 현역이다. 1928년생 올해 84세의 그는 요즘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강남 청담동 노라노부티크 사무실서 고객을 만나고 옷을 짓는다. 오는 5월24일 호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패션인생 60년 회고전 '라 비 앙 로즈'를 앞두고 이달초 파리 등지로 출장도 다녀왔다. "산다는 게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죠. 그저 논다면 그건 죽기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까." 사옥 3층 사무실에서 17일 만난 원로디자이너는 트레이드마크인 짧은 머리에 검은 옷차림으로 5월의 패션전시 준비로 분주한 근황을 공개했다.
"60년 노라노 패션사를 점검해 보는 쇼를 앞두고 옛날 옷을 모으고 있어요. 한 고객은 1970~1990년대의 노라노 옷을 여러 벌 기증해 주셨어요. 이번 여행 중 고객의 조카가 소장해온 1950년대 아리랑드레스도 빌려와 전시용으로 새로 만들고 있지요. 하와이 교포가 보관해 온 1960년대 초 옷도 구했어요."
노씨는 "60년 전 내가 만든 옷이 원래 고객에서 조카에게 다시 그 딸에게, 대물림되고 있다는 소식에 디자이너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고객들이 그만큼 내 옷을 아낀다는 이야기잖아요. 옛날 옷을 여태 갖고 있고, 또 대를 물려 입는다니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있겠어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IMF) 이후 오래된 고객 대상으로 쉬엄쉬엄 비즈니스를 해왔다는 노씨의 사무실엔 요즘 기증받은 옛날 옷이며, 재현한 옷들이 가득하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노라노옷', 1959년 미스 유니버스대회서 미스코리아 오현주씨가 입었던 흰 드레스, 1967년 '웃는 얼굴 다정해도'를 부를 때 가수 윤복희씨의 초미니원피스, 1980년대 5년간 미국 전역에서 팔렸던 줄무늬 실크원피스 등은 2012년 패션으로도 근사해 보였다.
―성함을 영어로 'Nora Noh'로 쓰시네요.
"1947년 미국으로 패션공부하러 떠나면서 여권에 적은 영어 이름이 노라였어요.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여주인공 노라가 새 인생을 찾아 집을 뛰쳐나왔듯 미지의 인생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며 이름이 '노명자'에서 '노라 노'로 바뀌었죠."
(노씨는 1928년 일제감정기에 경성방송국 개국멤버인 노창성씨와 최초의 아나운서인 이옥경씨의 9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다. 여고졸업 후 결혼 1년 만에 이혼한 그는 1947년 미국 프랭크 왜곤 테크니컬 칼리지서 2년여 패션공부를 하고 돌아와 1950년 의상실을 차렸고 줄곧 디자이너로 활동해왔다. 그의 팔십 인생은 여성 선각자의 삶이자 한국패션사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와 체력의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기상 직후의 스트레칭과 아침 식사후 산책, 저녁시간의 자전거타기와 팔체조 같은 실내운동, 그리고 세 끼 식사 등 여행기간에도 거르지 않는 규칙적인 일과"를 공개했다. 수면시간은 하루 6시간 정도, 젊은 시절부터 잠자는 시간을 아껴 그림공부며 독서에 매달렸다.
―요즘 패션에서 어떤 점이 눈에 띄시나요.
"남자들이 예쁘고 늘씬할뿐더러 옷도 잘 입는, 남성패션의 시대라고 생각해요. 본래 동물의 수컷이 아름답죠. 전에는 패션이라면 사치스럽다고 여긴 데다 남자들이 모양내는 걸 좋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남의 말에 신경 안 쓰고 취향대로 옷을 차려입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패션과 관련해 그는 "모양내는 데 꼭 돈이 많이 드는 건 아니지 않느냐. 럭셔리의 반대는 싸구려가 아니라 천박함"이라며 "몸매를 너무 드러내거나 과다한 장식품은 결코 좋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마디했다.
―디자이너로서 나이 든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미국 패션잡지의 광고사진으로도 남아있는 1979년작 몸에 꼭 끼는 바지는 요즘 유행하는 통 좁은 바지와 거의 비슷해요. 그동안 안 해본 디자인이 없을 정도로 많은 옷을 만들었어요. 새로운 패션에 대한 갈증을 느끼곤 합니다."
오랜 디자인 생활의 훈장처럼 오른쪽 손가락은 가운데 마디에 가위질로 생긴 못이 박였고, 핀을 꽂을 때 힘을 주어 손가락 끝이 다 삐틀어져 있는 80대의 대가. "패션비즈니스를 한동한 축소 운영해 왔지만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쿼터와 관세가 없어진 지금, 중국 시장 등을 겨냥해 새롭게 패션마케팅을 강화할 시기가 아니겠느냐"며 노년에도 거침없는 도전의식을 드러냈다.
―국내 패션사에서 숱한 기록을 남기셨지요.
"배운 것이 옷 만드는 일이고, 워낙 옷을 좋아해요. 어려서부터 옷 입기, 만들기 그리고 입히는 것도 즐겼어요. 세계적인 디자이너 샤넬은 은퇴했다가 71세 때 컴백해 활동하다 88세에 눈을 감았다죠. 나는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어요. 아흔 살까지 계속 일한다면 세계 역사상 최장수 디자이너로 기록되지 않겠느냐고 농담 삼아 이야기합니다.(웃음)"
그는 1950년 6·25전쟁 직전 퇴계로 집 2층에 의상실을 차렸고, 명동 시절을 거쳐 1990년 지금의 청담동 사옥으로 옮겼다.
초기 고객은 미8군 장교부인과 외국대사관 사람들이었다. 발레 연극의 무대의상을 만들고 1956년 반도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첫 패션쇼 이후 서울 멋쟁이들의 명소가 됐다. 미국서 배워온 최첨단기술로 패턴을 만들어 완성한 의상들이 호평을 얻었다.
작곡가 박춘석씨가 피아노 연주를 맡았던 1956년 패션쇼에는, 일부 멋쟁이 고객들이 모델을 섰고, 피날레의 웨딩드레스 모델은 그해 최고여배우상 수상자인 여배우 조미령씨였다.
그리고 1966년 백화점에 기성복코너를 내면서 국내 기성복시대를 선도했다. 이어 1973년 국산견직물컬렉션으로 파리 기성복쇼인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해 한국산 실크의 시장을 개척했다. 1979년 뉴욕 맨해튼 7번가에 노라노 간판을 내걸었다. 1956년 첫 패션쇼 이후 해마다 봄가을 2번 이상 패션쇼를 열었던 패션리더였다.
―디자이너로서 국산 옷감을 적극 개발하셨죠.
"첫 패션쇼부터 국산 옷감을 썼어요. 1950년대 국산모직을, 1960년대엔 국산면직을, 그리고 1970년대 전통 견직물을 여성복 소재로 개발하며 무엇보다 보람을 느꼈습니다."
사실 노라노라는 이름은 패션계 입문 전, 이혼 후 독학한 영어실력으로 취직한 회사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리며 1940년 중후반 사교계의 패셔니스타로 유명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멋에 대한 감각과 관심이 남달랐던 그는 외국인들과 일하며 모임에 참가하고 파티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패션감각을 발휘했다.
모임 때면 무슨 옷을 입을지가 고민이었던 그는 어머니 한복 치마로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다. 파티 때마다 세련된 디자인의 '노라노패션'이 호평을 얻었고, 미국인 상사를 비롯해 주변사람들은 그에게 본격적인 패션공부를 권했다.
―패션인생에서 감동적인 순간이라면.
"미국서 패션공부를 한 뒤 30년 만에 1979년 세계 패션의 중심, 뉴욕 맨해튼 7번가에 노라노 간판의 쇼룸을 냈어요. 쇼룸을 열자마자 뉴욕 고급부티크 바이어로부터 700여벌을 주문받았어요. 얼마후 7번가 메이시백화점 1층 쇼윈도 15개가 노라노 옷으로 뒤덮었을 때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감격스러웠어요."
(뉴욕 부티크에선 영화 '왕과 나'의 배우 율 브리너가 여자친구 선물용으로 노라노옷을 사갔다. 두번째 컬렉션에 선보인 실크드레스는 일명 '노라노 드레스'로 불리며 미국 전역에서 5년간 팔렸고 복제품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그는 또 2000년 미국 브라운대 초청으로 현지서 교수와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특강도 '격동기의 한국여성으로서 패션외길을 걸어온 자신'을 인정해준 의미있는 자리로 떠올렸다.
―옷을 잘 입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세 가지 조건을 들 수 있어요. 옷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겠고, 몸매가 적절히 갖춰져야 하겠죠. 그리고 때와 장소에 맞게 입어야 멋쟁이입니다."
―그런 조건에 맞는 멋쟁이로 지금 생각나는 분들이 있다면.
"요즘 스타로 최지우씨는 늘씬한 체격에 맞춰 클래식하면서도 우아하게 언제나 옷을 잘 입어요. 장미희씨도 TV드라마에서 약간 튀는 디자인까지 개성 있게 잘 소화해내고요. 영부인으로는 이희호 여사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옷을 참 잘 입는 베스트드레서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남성스타 중에도 멋쟁이가 많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디자인 활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라면.
"디자이너 일은 사람을 좋아해야 가능한 일이지요. 제가 좋고 싫음이 확실한 성격이라 처음엔 고객을 대할 때 어려움이 적지 않았어요. 특히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는 고객과 약속한 날이면 하루 종일 우울했어요. 그러나 평생 해야 할 일이 인간관계 때문에 불편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사람을 만나면 무엇보다 그 사람의 장점부터 찾아내고 그 점을 의식하다 보니 차츰 문제가 극복되면서 인간관계의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그는 "문제가 생기면 미루고 피하려 들기보다 열심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해결책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얼굴에 주름이 없는 것도 "얼굴 찡그리며 고민하기보다 골치 아픈 일부터 먼저 처리하는 삶의 원칙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올해 그에게 경사가 겹쳤다.
5월 대규모 패션전시 외에 오는 가을 부산영화제 기간 중 상영될 '노라노 다큐멘터리'의 촬영이 작년부터 진행 중이다. 84세의 디자이너가 원단시장을 둘러보고 디자인하는 일상부터 미국 유학시절의 현장, 1956년 6개월여 연수 갔던 파리 미술학교의 영상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오는 7월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의 한국현대미술작품전 '코리안 아이'전에는 미술작가 조덕현씨가 연필로 세밀하게 묘사한 노라노 인물화가 선보일 예정이다.
인터뷰=신세미 부장(문화부) ssem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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