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김지욱의 헤지펀드 대가 열전] (3) 헤지펀드 매니저 사관학교(士官學校),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Commodities Corporation)
이 기사는 02월16일(10:33) 자본시장의 혜안 '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헤지펀드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특정인이라기 보다는 특정회사 출신들을 거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나오는데, 바로 그 회사가 오늘 소개할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 (Commodities Corporation)이다. 2편에서 소개한 마이클 스타인하트, 다음 순서로 소개할 조지 소로스와 줄리언 로버트슨등 THE BIG THREE가 모두 기본적으로는 "주식"전문가들로서 stock picker의 정통 코스를 밟아서 성장한 데 비해, "원자재분야"에서 성장한, 헤지펀드이 또 한 축(軸)을 형성하는 거대한 집단의 매니저들이 있으니, 그 시발점이 바로 1969년에 뉴저지주의 대학도시인 프린스턴에 설립된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이다. 사실 이 회사를 헤지펀드 역사에서 논함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위 THE BIG THREE에 필적할 만한 위대한 후발주자들인 THE JUNIOR THREE (Tudor Investment의 Paul Tudor Jones, Moore Capital의 Louis Bacon, Caxton Associates의 Bruce Kovner)가 전부 이 회사에서 실제 펀드 매니저로 근무했거나 또는 이 회사로부터 최초의 seed investment를 받아서 회사를 창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의 설립에는, 2차 대전 이후 형성된 미국의 "주류 경제학"을 대변하는 인물이자 1970년 제2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 MIT대 교수(1915년생. 2009년 작고)가 직/간접적으로 크게 간여하였다. 이미 자기 나이가 25세가 되던 때에 자기 나이보다도 많은 26편의 경제학 논문을 써냈던 이 천재 경제학자는, 1960년대 초부터 지속적인 언론 기고를 통해, "펀드 매니저라고 해서 다 같은 펀드 매니저가 아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와 성격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진짜 훌륭한 펀드 매니저라면, 그의 가치를 무차별적으로 모든 투자가를 위해서 불사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훌륭한 펀드 매니저는, 소수만을 위한 투자조합의 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면 은행신탁이나 뮤추얼펀드에 투자하느니, 차라리 이런 소수만을 위한 투자조합에 투자하는 길을 찾겠다"는 자신만의 투자관(내지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간접투자방법론)을 설파하였다. 사무엘슨이 꼭 "헤지펀드"를 의식하여 헤지펀드에 투자하라고 권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의 이런 투자관은, 사실 미국내 상당수의 기관투자가들에게 많은 정신적인 영향을 주었고,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사무엘슨이 남달랐던 점은, 단순히 이런 이론을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실재로 그걸 행동으로 옮겼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MIT대 경제학과의 제자였던 헬무트 웨이마(Helmut Weymar)가 1969년에 설립한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에 당시로서는 작은 돈이 아니었던 12만5천달러의 개인 돈을 투자했으며, 한편 이 회사의 사외이사로 활동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한편, 같은 해인 1969년에 사무엘슨은, 당시 아직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출신 젊은 펀드 매니저에게도 별도로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했는데, 이 사람이 물론 훗날 "가치투자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워렌 버핏이다)코모디티스 코포레이션의 창립자 헬무트 웨이마(F. Hemut Weymar)는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1930년대말에 미국으로 이민 온 독일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외판원으로 생계를 이었던 부모를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를 이사 다니면서 학창시절을 보낸 결과, 매우 독립심이 강하고 병적으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데다가 약간 괴짜인 특유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천재성이 있던 학생이었던 웨이마는, 우수한 성적으로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중 하나인 MIT에 진학하게 되고,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Paul Samuelson교수 및 "효율적 시장이론(Random Walk Hypothesis)"의 대가인 Paul Cootner 교수에게 사사를 받게 된다. (이 두 교수 모두 나중에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에 개인 돈을 투자하게 되며, 그 중 쿠트너 교수는 최초 2년간 직접 돈육 트레이더로 이 회사에 참여하였다) MIT에서 그는 당시로서는 놀라울 만한 주제(내용이 놀랍다기 보다는 그런 내용을 추적하여 검증 가능한 데이터를 생산해 내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경제학계 분위기로는 놀랄만한 일로 받아들여졌다)인 코코아시장의 가격형성이론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받게 된다. 이 논문에서 그는, 과거의 모든 통계들을 추적하여, 선진국들의 경제성장이 초콜릿 소비증가 및 그에 따른 코코아 수요에 미치는 영향을 밝혀 내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서부 아프리카의 가뭄이나 습도가 코코아 공급에 미치는 영향의 범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는 펀드 매니저가 될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 박사논문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의 MIT 은사들이 "효율적 시장이론"을 설파하는 것을 다소는 가소롭게 여겼다. 뒷날 그는, "대학시절, 나는 효율적 시장 이론은 그야말로 웃기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진지하게 자신의 자산을 운용하는 사람이 시장에 대비하여 더 경쟁적인 수익률을 내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한다.
박사학위 논문을 받은 후 웨이마는, 당시 세계 최대의 식품회사였던 나비스코(Nabisco)사의 시장조사 부서에 입사하였고, 곧 자신의 상사를 설득하여 자기가 개발한 프로그램에 따라 코코아에 대한 대규모 선물투자를 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투자 초기에는 웨이마의 프로그램이 예상한 가격보다도 코코아 가격이 더욱 더 떨어져서, 한 때 웨이마의 선물 포지션이 나비스코사가 필요한 2년치 원료 물량을 웃돌 정도였고 일시적이긴 하지만 회사를 파산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평가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당시 이런 거대 회사들조차 체계적인 내부 리스크관리시스템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웨이마의 프로그램이 예측한 대로, 결국 아프리카 지방의 가뭄으로 인해 수확이 크게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대규모 선물포지션을 가지고 있던 나비스코는 대박을 터뜨리게 되어 거대한 이익을 실현하게 된다. 이 성공에 크게 고무된 (사실 단 한번의 투자였고 단 한번의 성공이긴 했지만) 웨이마는, 이제 자기의 회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고 곧 회사를 퇴사하였다.
코코아 시장 전문가였던 웨이마가 창업을 위해 끌어들인 첫 번째 인물은, 역시 나비스코 시장조사 부분에서 밀(Wheat)의 가격을 추적하던 인물인 프랑크 배너슨 (Frank Vannerson)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분위기가 중세시대 수도사 같은 느낌을 주는 배너슨은, 여러가지 면에서 성격이 웨이마가 극과 극이었으나 이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큰 보완이 되었고, 이 둘의 우정은 나중에 이 회사가 골드만 삭스에 1997년에 피인수될 때까지 28년간 줄곧 지속되게 된다. 코코아시장을 담당할 웨이마 및 밀 시장을 담당할 배너슨 외에도, 돈육(pork) 시장을 담당할 MIT대학의 Paul Cootner 교수, 그리고 당대의 저명한 계량경제학자였던 뉴저지 Rutgers주립대학의 Kenneth Meinken 교수가 콩과 사료 두 시장을 담당하기로 하여 이 회사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위 4명을 포함한 7명의 창립발기인 겸 트레이더와, 6명의 백오피스 인원들로 구성된 13명의 회사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훗날 등장할 그 모든 헤지펀드들과 이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이 극단적으로 달랐던 점이 있다. 이 회사는 월스트릿의 분주함을 피해, 미국에서도 가장 한적한 대학도시 중 하나인 뉴저지주 프린스턴의 농장 하나를 사서 개조한 후 거기에 사무실을 열었던 것이다. 즉, 이 회사는 창립 때부터 초기자금 펀딩 능력, 세일즈 능력, 일반 고객들과의 네트워킹 등, 일반적 헤지펀드들의 추구목표와는 확연히 다르게, 오직 컴퓨터 프로그램 모델, 수학적 트레이딩 기법, 그리고 정보의 우위에만 집중하였다. 분주한 월스트릿 헤지펀드의 모습과는 다르게, 이들은 칠판 앞에 모여 앉아 분필로 온갖 난해한 수학공식을 잔뜩 써 놓고 서로간의 트레이딩 전략을 세미나식으로 교환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도중에 출출해 지면 즉석에서 서로 농장에서 닭을 잡아 닭고기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운동이 하고 싶으면 농장 앞뜰에서 전 직원을 두 팀으로 나누어 소프트볼 경기를 하면서 오후 한 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지나가다가 이들의 모습을 본 그 누가 과연, 이 회사를 뒷날 당대 최대의 헤지펀드 메니저들을 무수히 배출해 낸 걸출한 헤지펀드 사관학교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은 그 28년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 1기가 1969년 창립부터 1974년까지, 다음 제 2기가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의 중흥을 책임지게 된 Michael Marcus가 입사한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다음 마지막 3기가 투자은행 Paine Webber랑 합작하게 되는 1981년부터 골드만삭스에 피인수되는 1997년까지이다. 제1기를 이끈 인물은 물론 창립자인 웨이마와 배너슨이다. 회사 창립 이후, 코코아와 밀 등의 선물 포지션에서 어느 정도의 안정적 초기수익을 기록하면서 회사가 안정을 찾아가던 1971년에, 이 회사의 뿌리가 흔들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장을 면밀히 분석하고 온갖 고려할 만한 데이터를 추적한 결과, 그 해 옥수수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보고 자기자본의 3분의 2가 넘는 포지션을 옥수수 선물에 공매도 베팅을 했는데, 그만 미국의 옥수수시장이 "옥수수마름병"이란 정체불명의 곡물병에 의해 초토화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물론 나중에 옥수수마름병에 대한 공포가 언론이 지어낸 허상이었고 그 피해는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지만, 코모디티스 코포레이션은 옥수수 가격이 정점에 올라 있을 때 공매도 포지션 청산을 강요당한 바, 초기 자본금 250만 달러중 무려 160만 달러가 사라지고 겨우 90만 달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사태에 의한 충격으로 인해, Paul Cootner교수 등 4명의 창립발기인이 자기 투자분을 회수하여 회사를 떠나게 되고, 이제 남은 것은 웨이마와 배너슨을 포함하여 세 사람이었다.
회사를 재건해야 했던 웨이마와 배너슨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회사에 가져오게 된다. 하나가 옥수수 공매도 사건 이후 새롭게 도입된 내부 리스크관리 시스템이었고, 다른 하나는 배너슨이 연구해낸, 소위 "추세추종 모델"이다. 우선 웨이마는, 옥수수 공매도 사건 이후의 충격으로, 회사 내부의 리스크관리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된다. 애초에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이 쓰던 리스크통제 시스템은 수학적으로는 우수했으나 효율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이 시스템하에서는, 트레이딩 자본이 단일한 계좌에 집중되어 있었다. 트레이더들은 자유롭게 자본을 가져다 썼는데, 집중 계좌에는 대규모의 변동성이 큰 포지션에 대해서는 그를 감안하여 내부 이자를 추가로 징구하였다. 이론상으로는, 특정 트레이더가 변화무쌍한 시장에서의 베팅을 늘이려면 충분한 확신을 가져야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옥수수 사건을 통해서, 트레이더의 자존심 만큼이나 확신도 너무 강했음이 드러났고, 업무 지원 스태프들은 트레이더들의 노출도와 리스크를 통제할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웨이마가 새로 고안한 시스템이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원자재형 헤지펀드"들에게 어느 정도 골격이 남아 있는 리스크통제 시스템으로서, 이는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가 사용하던 부문별 운용자(Segment Manager)시스템과 기본적으로 일맥상통한 것이다. 이 시스템에 의하면, 각 트레이더들은 독립적인 수익부문으로 취급을 받으며, 과거 성과를 반영하여 가용가본을 배정받는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트레이더들로 하여금 베팅을 통제하도록 강제하였는데, 이러한 통제는 비교적 안정적인 주식투자에서는 불필요한 것일지라도 워낙 변동성이 큰 원자재 시장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주식시장에서 적용되는 원칙은, 모든 투자자는 자신이 매수하는 주식 가치의 절반만을 차입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투자자가 레버리지를 2배 이상 높이기를 원하더라도 조달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원자재 선물시장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트레이더들은 소액의 증거금을 현금으로 투입하면 포지션의 대부분을 레버리지로 차입할 수 있다. 선물의 레버리지가 워낙 높기 때문에, 단 한번만 잘 못 매매하면 자본금의 상당부분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웨이마가 도입한 새로운 시스템에 의하면, 단일 트레이더가 특정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리스크에 상한을 엄격히 설정하였고, 손실을 크게 보게 되면 더욱 통제가 강화되도록 설계가 되었다. 만일 특정 트레이더가 자신의 가용 자기자본의 절반까지 잃게 되면, 모든 포지션을 청산하고 1개월간 쉬게 하였으며, 경영진에게 자신의 계산 실패에 대해 설명하는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의무화 하였다.
다음, 옥수수 사건 이후, 웨이마와 그의 트레이더들은 가격의 "추세"를 존중하는 태도를 새롭게 갖추게 되었다. 물론, 60년대부터 80년대초까지 시장의 압도적 다수설이었던 효율적 시장이론, 즉 Randon Walk Hypothesis에 의하면, 그러한 추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웨이마의 동료인 배너슨은, 원자재 시장에서 실제로 추세가 존재해왔다는 매우 정밀한 데이터를 입수해서 가지고 있었다. 이 자료는 그가 나비스코에 잠시 근무하던 시절, 나비스코의 거래 상대방이었던 인디애나주 소재 곡물회사 Dunn & Hargitt 이란 회사가 집계해 둔, 15개 곡물가격의 수년간의 변화추이 데이터였는데, 그는 이 raw data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원자재 시장에 진짜로 "추세"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본인이 TCS(Technical Computer Trading System)라고 다소 조악하게 명명한 시스템에 그대로 옮겨놓았는데, 이 TCS는 그 후 수십년간 등장하게 되는 수천개, 수만개의 유사한 자동 트레이딩 시스템의 진정한 원조(元祖)에 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추세 추종 모델이란 건 사실 단순한 것이었다. 방금 오른 종목은 상승을 지속할 것이니 따라서 사고, 방금 내린 종목은 하락을 지속할 것이니 바로 공매도를 하라는 것이니, 이런 시스템은 사실 무력해 보일 만큼 쉬워서 그걸 누가 못할까? 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간과하면 안 되는 부분은, 이 TCS 시스템은 역사상 처음으로, "지속가능한 상승"과, "단순히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승"을 구분할 수 있도록 발전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의심 속에 런칭이 된 이 TCS시스템은, 그러나 시스템 가동 당일부터 놀랄 만큼의 수익률을 가져다 주게 된다. 사실 이 TCS시스템이 런칭 된 이후로는, 개별 트레이더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거의 주지 않았다. 시스템이 추세에 반하는 베팅에 개별 트레이더의 자기 가용자본의 10%이상을 걸지 못하게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TCS시스템 도입으로, 1971년에 회사 자본금을 거의 날리고 문 닿을 뻔 했던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은 회생의 반전을 만들었고, 1974년까지 이 시스템에 의존하여 회사를 끌어오게 된다.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이 창립자들의 손을 벗어나 진정한 중흥기를 맞게 된 것은, 1974년에 입사한, 헤지펀드 업계의 또 하나의 전설인 마이클 마커스(Michael Marcus)의 입사 때부터이다.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 제2기의 시작이다. 이 마커스는, 그 어떤 측면으로 봐도 도저히 헤지펀드 트레이더로서 성공할 것 같은 외관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는 결정적으로, 수학이나 경제학, 아니면 재무이론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소위 말해서 "컴맹"으로, 컴퓨터를 사용할 줄도 몰랐으니, 입사 당시에는 회사의 주축 트레이딩 시스템인 TCS시스템을 이해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대신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1948년생인 그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 소재 Johns Hopkins대학에서 심리학 전공으로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이어 보스턴시 소재 Clark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심리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런데 몇 가지 이유에서 돈이 필요해진 그는,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1974년에 지인의 소개로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그는 코모디티스 코페레이션에 입사한 최초의 박사학위 없는 트레이더였고, 최초로 수학에 대해 무지한 트레이더였다. 입사 첫날 옆 자리 "박사"들은 그를 보면서 눈쌀을 찌푸리고 말도 걸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박사 트레이더들은 불과 몇 일이 지난 후에, 자신들의 사람 볼 줄 모름에 대해 한탄하여야 하게 된다. 마커스는 입사 첫 주에 벌써 자기한테 배정된 자기자본에 대해 100%의 수익률을 올렸던 것이다. 마커스는,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에 근무한 10년(1974년-1984년) 동안, 자기에게 배정된 자본에 무려 2,500%라는 천문학적 수익률을 거두었고, 이 10개 년도 중에 4개 년도에는, 그가 거둔 이익이 다른 모든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 소속 트레이더들이 거둔 이익의 합계를 초과하는 기록을 내게 된다.
그렇다면, 이 마커스의 매직(Marcus' Magic)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시장의 단순한 데이터를 연구하여 추세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상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사람들은 의견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페이스와 자신의 방식에 따른다. 새로운 정보가 시장에서 즉각 실시간으로 처리된다는 것은 학계의 기본 가정 중 하나였으나, 현실시장에서는 사실 별로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즉, 마커스는 투자가들이 정보를 "점진적으로" 흡수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었다. 즉, 새로운 진전사항이 발생하더라도, 이 내용이 즉각적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소화되면서 시장이 "추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심리는 그 보다 더 미묘해서, 투자가들의 반응이 "가속"되는 때가 나타난다. 마커스는 사람들이 시장에 대해서 단순히 "미래지향적"인 판단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경험"에 반응함을 인식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투자가가 최근 손실을 겪었다면, 한바탕의 불안한 매도를 발동시킬 수 있으며, 한편 이익이 쌓여 있다면 즐거운 매수의 파도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가격이 박스권을 어떤 방향으로 이탈하기 전에 등락하는 좁은 범위인 "정체지점"(Congestion Point)에 대한 통찰력이 형성이 된다. 어떤 특정 원자재가 일상적인 가격 범위를 벗어나면, 잘못 베팅을 해 놓았던 투자가는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이들은 패닉에 빠져서 황급하게 모든 포지션을 정리하며 시장으로 하여금 과거의 가격대로부터 이탈을 심화시킨다. 트레이더들은 이러한 패턴을 연구함으로써, 추세를 잡아내고 베팅 타이밍을 잡아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마커스의 기본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는 가르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에 입사하기 전 약 1년 동안, 마커스는 뉴욕 면화거래소(New York Cotton Exchange)에서 견습 트레이더로서 근무하였었는데, 그 때 동료 트레이더들의 행동양태에 대해 심리학도의 전문적인 눈을 가지고 관찰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항상 함께 점점 크게 소리 지르는데 동참했다가, 때로는 지쳐서 다 함께 뒤로 물러난다. 어떤 원자재 가격이 전일 고점을 지나 상승하면, 흥분의 파도를 타고 상승을 지속할 상당한 개연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마커스는 전환점에 임박해서 대규모 포지션을 취하되, 만일 거래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전되면 시장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올 수 있는 손절매 주문을 걸어서 자신을 보호하는 기법을 이 시기의 개인적 경험에서 채득하였다. 마커스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트레이딩은 결국 서핑 보드를 타고 파도에 대비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만일 서퍼의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나중에 그의 방식을 따랐던 수많은 전설적 트레이더들처럼, 마커스도 훗날 자신이 파도를 제대로 탄 것이 실패한 횟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파도타기에서 실패한 파도타기보다 무려 20배가 넘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올렸던 것이다. 이 점이 그를 다른 트레이더와 구분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었다.
마커스의 "심리적 추세추종 기법"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자, 웨이마가 당초 강박적으로 고집하던 계량경제학 모델링에 의한 트레이딩이 별로 의미가 없게 되었다. 웨이마의 계량경제학 모델링은, 그 변수가 너무나 많아서 실제로 그 모든 변수를 다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설령 그 시스템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시장이 따라오는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게 되면 그 시기를 기다리다가 중도에 파산해 버릴 수 있는 위험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커스의 성공은 원자재 트레이딩의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즉, 추세의 서핑보드에 올라 돈을 벌 수 있는 한, 개별 원자재 종목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매수 및 공매도 타이밍을 연구할 일이 아니라, 현재 이 시점에서 더욱 더 강한 파도를 일으키는 원자재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게임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원자재 분야 헤지펀드 트레이딩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다. 즉, 오늘날 "매크로 트레이딩"이라고 일반적 용어로 설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의 중앙은행 및 감독당국들을 괴롭히게 될, 새로운 부류의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마커스의 천재성은, 특정 종목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에 따라, 70년대 중반 이후 통화 트레이딩, 즉 Currency Trading을 시작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1972년 초 당시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 포기를 선언함에 따라, 시카고상품거래소(CBOT)가 1972년 5월부터 5개 통화에 대해 선물거래를 개시했다. 마커스는 본능적으로, 이 통화 트레이딩 시장이 원자재 시장과 마찬가지고 심리적 추세의 파도타기를 일으킬 수 있는 종목으로 판단하였고, 자신의 트레이딩에 통화 트레이딩의 비중을 높이기 시작하였고, 동료 트레이더들에게도 통화 트레이딩을 권유하였다. 1976년이 되면,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 트레이딩의 3분의 1이 통화 트레이딩이 되게 되며, 1979년에는 한 때 3분의 2에 도달한 적도 있다. 1977년에 등장한 카터 행정부가, 경기를 진작시키려고 하면서 심각한 인플레 요인이 발생하여 미국 달러화가 독일 마크르화 및 일본 엔화 대비 약 3분의 1이 하락하였고, 이러한 심각한 변동성은 통화선물시장에서 새로운 "파도타기"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보다 조금 앞서서 이미 1975년 초, 마커스는 환율의 연동체제를 공략하여 승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였고, 이는 향후 후세의 모든 헤지펀드들이 시도하게 될 특정 타입의 트레이딩의 기원을 이룬다. 그는 정부의 우둔하고 멍청한 정책들을 집중 연구하다가, 매력적인 정부개입상황을 발견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통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고 있었다. 천재가 아니더라도 그러한 연동체제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유가상승으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가 넘치자, 사우디 경제는 강력한 환율상승 압력을 받았다. 물론 자본유입으로 인플레가 발생하더라도 사우디 정부가 버티기를 선택할 수 있으므로, 사우디 리얄 통화의 평가절상 여부는 불확실하였다. 그러나 마커스는, 사우디가 평가절상을 하던 하지 않던 간에, 평가절하의 가능성은 제로라고 보고, 거대한 레버리지를 걸어서 리얄화를 대량 매수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1975년 3월 달러 연동을 포기하고 리얄화를 평가절상하였으며, 마커스는 대규모 실현익을 본다. 이 거래로 마커스는,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어도,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투자"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고, 이 마커스의 사우디 리얄화 공략은 후세에 와서 영국 파운드화 공략이나 태국 바트화 공략에서 다른 헤지펀드 대가들에 의해 벤치마크 되어 사용되게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80년대 들어와서 코모디티스 코퍼페이션은 제 3기를 맞게 된다. 1980년이 되자, 이 회사는 1971년의 자기자본 1백만불의 30배인 3천만불의 자기자본을 가지게 되었고, 운용자산의 총액이 4억불을 넘어서게 되었다. 1980년도 한 해에만, 이 회사는 4천2백만불의 순이익을 기록하게 되었고, 경우 13명의 직원으로 시작했던 회사가 이제는 창립당시의 10배가 넘는 140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고, 프린스턴의 농장을 떠나서 인근 도심에 자체 건물을 신축하여 옮기게 되었다. 회사가 기록적인 수익률로 주목 받으면서, 1981년도에 포춘 지에 머릿기사로 소개되는 일까지 생겼다. 이쯤 되자 더 이상 이 회사가 프린스턴의 작은 회사로 머물 수가 없게 되었는데, 사유는 2가지 때문이었다. 우선, 이 회사가 1981년도에 나중에 UBS에게 피인수 합병되는 당시 미국 5위 규모의 증권사였던 Paine Webber와 공동으로, 일반 기관투자가들에게 투자 문호를 연 공모펀드인 2천3백만불 규모의 Princeton Futures Fund라는 펀드를 출범시키게 된 점이다. 이로서 단 한번도 감독당국의 시선을 끌지 못했던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은 처음으로 감독당국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보다 더 큰 다른 이유는, 이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의 기록적 성공에 자극받은 월스트릿의 투자자들이 이 펀드의 개별 펀드 메니저들에게 접근하여 seed자금을 대줄 테니 회사를 이탈하여 자기 회사를 차리라고 유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중에 후술하겠지만,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트레이더였던 Bruce Kovner(1977년 입사)가 1983년 Caxton Associates를 설립하여 이탈하였고, 한편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에 정식 입사한 것은 아니지만 이 회사로부터 seed자금을 출자 받아서 동일한 방향성의 트레이딩을 하고 있던 Louis Bacon과 Paul Todor Jones가 각각 Moore Capital과 Tudor Investment를 설립하여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의 우산하에서 이탈하면서,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의 우수한 트레이더들을 덩달아 데리고 떠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1983년 이후에는 코모디티스 코퍼레이션은 70년대 이후 보여주었던 그 경이적인 활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헤지펀드"로 전락하게 되며, 1987년 이후에는 Fund of Funds 형태로 재편되게 된다. 1989년에는 일본의 오릭스에 지분 30퍼센트를 8천만달러에 팔았고, 1997년에는 골드만삭스에 1억불에 통째로 피인수되게 된다. 그 이후 이 회사는 Goldman Sachs Princeton LLC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고, 현재는 골드만삭스자산운용(GSAM) 휘하에 속한 자회사 펀드 중 하나인 Goldman Sachs Hedge Fund Strategies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게 된다.
비록 이 회사는 사라졌지만, 이 회사는 몇 가지 측면에서 후세의 모든 헤지펀드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특히 이 회사를 거쳐간 인물들이 만든 헤지펀드가 널리 알려진 것들만 20여개가 될 정도로, "헤지펀드 사관학교"로서의 명성만은 영원히 기록되게 될 것이다.
김지욱 삼성증권 이사
< 약력 >1969년 서울 출생연세대 법학과 및 법학 대학원 석사(금융법 전공)1995년 외환은행 입사JP모건, BNP Paribas, HSBC 근무대우증권 자기자본계정투자(PI) 부장2009년부터 현재까지 삼성증권에서 IB본부 기업금융 담당 이사로 재직금융관련 역서: < KKR 스토리 > , < 풀스골드 > , < 헤지펀드 열전 > , < 헤지펀드의 진실: 펀드매니저의 고백 >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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