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연극 '운전 배우기'




소아성애적 요소 있는 사랑 이야기
치밀한 구성의 대본과 연기 돋보여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소아성애인가, 진정한 사랑인가?
대학로의 대학로예술극장 3관 무대에 올려진 연극 '운전 배우기-그 은밀한 기억'의 여러 장면은 그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감정이입을 막는 장치, 재치와 웃음 요소가 있음에도 극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다.
작품의 중심인물은 중년남자인 펙과 그의 처조카 릴빗. 펙은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는 남자다. 그는 처제의 딸이 태어나자 너무나 작고 예쁜 모습에 '아주 작다(Li'l Bit)'라는 뜻을 가진 릴빗이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펙은 그러나 10대 초반으로 성장한 릴빗에서 성적으로 이끌린다.
연극은 결국 펙을 죽음으로 몰고 간 둘 사이의 사랑과 '이뤄지지 않은 관계'를 자극적인 장면 없이 담담하게 펼쳐낸다.
'담담하게'라는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은 이제 그 '관계'에서 벗어나 중년의 여인이 된 릴빗이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과 펙 사이, 또 자신과 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얘기를 고백하듯이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만큼 작품 속에는 이해와 용서와 치유의 의미가 담겨 있다. 릴빗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성장극이다. 만약 현재진행형으로 같은 이야기를 끌고 갔더라면 관객 입장에서는 너무 아프거나, 심하게 불편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사회통념상 연극의 초반 장면들에는 분명히 불편함이 있다. 둘의 인척관계나 중년남자와 10대 초·중반 나이 소녀 간의 성적 암시가 있는 대화를 생각하면 그렇다. 또 극의 거의 막바지에 드러나는 것이지만 둘 사이의 '위험한 관계'는 펙이 릴빗에게 운전을 가르쳐 준다며 운전석에서 성적인 접근을 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달라진다. 시작은 성폭력적이었지만 펙이 소아성애적으로 릴빗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사들이 자주 나온다. 알코올중독자였던 펙이 릴빗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 모습, 릴빗이 허용하지 않는 한 그녀에 대한 어떤 성적 접촉도 자제하는 펙의 이미지가 보인다. 릴빗에 대한 펙의 운전교습 노력은 진지하다. 그는 릴빗에게 운전 중 예기치 못한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철저하게 방어운전을 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질식할듯한 집안 분위기에 염증을 느끼는 릴빗 역시 자신을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펙에게 사랑을 느끼고 마음의 문을 연다.
극중 릴빗의 운전 배우기는 펙을 통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릴빗은 삶에서의 자기방어를 위해 '가족'인 펙과의 관계를 끊게 되고, 그때부터 펙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소아성애적 요소를 삽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이야기로 만들어냈다. 릴빗의 대사를 통해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의 내용을 인용한 것도 그러한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 오페라에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히 바다를 헤맬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유령선 선장의 얘기가 펼쳐진다. 연극의 배경음악으로 이 오페라의 일부 선율이 흐르기도 한다.
'운전 배우기-그 은밀한 기억'은 관객이 매우 민감하면서도 무거운 주제의 무게감을 떨쳐내면서 거리감을 두고 연극을 볼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세 명의 코러스 배우들이 극중 할아버지, 할머니, 릴빗 엄마와 이모, 또는 릴빗 학교의 친구들로 각자 역할을 바꿔가며 대사를 치고 노래를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펙과 릴빗 역 배우들의 노래도 있다. 펙 역 최원석 배우, 릴빗 역 이유정 배우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세 명 코러스 배우들의 연기도 볼만하다.
무대변환은 없는 대신 여성의 큰 가슴을 디자인한 뒷무대장치에서 문을 열고 술잔 등 여러 소품을 끄집어내도록 설계한 것이 흥미롭다. 배경음악으로는 가사내용이 극중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1960년대 팝송들이 많이 나온다. 샘 쿡, 엘비스 프레슬리, 로이 오비슨, 마마스앤파파스, 비치보이스 등 유명 가수나 그룹의 노래들이다.
사회적 주제, 치밀한 이야기 구성, 내용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배경음악, 배우들의 호연 등을 전반적으로 감안할 때 다소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꼭 볼만한 좋은 작품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원제가 'How I Learned to Drive'인 이 연극은 자신이 레스비언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미국 극작가 폴라 보글의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1998년 퓰리처 드라마 부문 상을 받았다. 1997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의 바인야드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그 해와 그 이듬해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을 대상으로 한 가장 권위있는 상인 오비(Obie)상의 극작·최우수남우·최우수여우·연출 등 4개 부문 상을 포함, 내로라하는 주요 상을 모두 휩쓸었었다. 이 작품은 지금 오프브로드웨이의 세컨드스테이지씨어터 무대 위에 올려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초연이다.
◇ 연극 '운전 배우기-그 은밀한 기억' = 극단 TNT 레퍼토리(대표 이지훈)의 창단 30주년 기념작.
만든 사람들은 ▲번역 및 연출 이지훈 ▲드라마터그 김미경 ▲연기감독 류영균 ▲조연출 김민경 ▲음악 김기영 ▲무대 봉하일 ▲조명 김윤희 ▲음향 양용준 ▲안무 김정은 ▲의상 김정향 ▲분장 백지영 ▲심리디렉터 김정일.
출연진은 최원석 이유정 조정민 박영기 진명희.
관람연령은 17세 이상
공연은 대학로예술극장 3관에서 2월2일-19일. 공연문의는 ㈜쇼앤라이프 ☎02-743-6487.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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