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알파인스타일 등반 | 알파인스타일 등반 개관] 등반의 본질인 곤란성 좇는 창의적인 등반 행위

글·한필석 부장 2012. 2. 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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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자들, "철저한 준비와 충분한 고소적응 선행돼야"

↑ [월간산]스팬틱 북서벽에 K2 익스트림팀이 개척한 드림 2009.

'알파인스타일 등반(Alpine Style Climbing)'은 최근 비극적 사고로 끝난 두 차례의 히말라야 등반에서 화두였다.

박영석 원정대의 목표는 안나푸르나(8,091m) 남벽 알파인스타일 신 루트 등반이었다. 박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은 영국 대와 일본 대 사이에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 등반에 나선 첫날 오후 일기예보와 달리 급변한 날씨에 등반을 포기하고 낙석과 눈사태 속에서 벽 아래 내려섰으나 캠프 이동 중 남벽에서 쏟아져 내린 눈사태에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형일 원정대의 촐라체(6,440m) 북벽 등반 역시 알파인스타일 등반으로 출발 이후 베이스캠프 귀환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36시간 이내에 해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 대장과 장지명 대원은 예상했던 비박지를 찾지 못하고 루트를 잘못 접어들면서 체력을 많이 소진하고 탈수현상까지 느끼는 상황에서 등반을 멈추고 침낭 속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던 중 추락사하고 말았다.

가볍고, 빠르고, 친환경적인 등반방식

알파인스타일 등반이란 해발 4,000m대 고봉이 즐비한 유럽 알프스에서 행해져 온 등반 스타일을 해발 6,000m가 넘는 히말라야 고산에 적용시킨 등반 방식을 일컫는다. 즉, 히말라야 전통 등반방식인 극지법 등반과 달리 인공산소와 셰르파의 도움이나 고정로프와 중간 캠프의 사용 없이 등반자 자력으로 정상까지 밀어붙였다가 하산까지 해내는 등반이다.

국제산악연맹(UIAA)은 알파인스타일 등반 기준에 대해 대원은 6명 이내, 등반용 로프는 팀당 1~2동 이내여야 하며, 고정로프나 중간캠프 또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른 등반대가 설치한 루트상의 고정로프도 사용하면 알파인스타일 등반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국제산악연맹은 또한 사전 정찰등반이나 루트 찾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포터나 기타 지원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산소 기구를 휴대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등반을 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본지 김창호 편집위원(몽벨 기술자문)은 이런 기준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대해 "장비와 식량을 최소화(Light)하고, 빠른 속도(Fast)로 장비를 덜 사용하는 친환경(Clean)적인 등반방식은 히말라야에서 창의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산악정신을 실현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정당한 수단의 등반'을 원칙으로 삼는 순수 클라이머라면 당연히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등반에 편의를 제공하는 장비를 최소화하고 자신의 힘으로 한 번에 정상을 오르는 방식이기 때문에 곤란성에 대한 판단력, 길을 찾아내는 창의성, 그리고 판단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대담성 등을 필요로 한다"고 덧붙였다.

<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 의 저자로서 산악 평론가인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이러한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8,000m 고봉에 처음으로 접목시킨 등반가를 1895년 전설적인 영국 산악인 앨버트 프레더릭 머메리로 보고 있다. '더 험한 루트를 통한 등반'을 의미하는 등반정신인 머메리즘의 창시자인 그는 1895년 낭가파르바트(8.125m) 디아미르벽을 알파인스타일로 해발 6,400m 지점까지 오른 뒤 등반을 포기하고 북면의 라이코트(Raikot)계곡으로 가기 위해 디아마콜(6,200m)을 넘다가 실종되고 말았다.

↑ [월간산]스팬틱 정상에 오른 민준영·김팔봉대원과 김형일 대장(왼쪽부터). 민준영 대원은 2009년 9월 히운춘리(6,441m) 북벽에서, 김형일 대장은 2011년 11월 촐라체(6,440m) 북벽 등반 중 사고를 당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인도히말의 트리슐(7,120m), 티베트의 나오나니(구룰라만다타·약 7,700m) 등 7,000m급 고봉에서 '러시 어택(Rush Attack)'이란 용어로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간간이 시도되었다. 또한 1957년 안나푸르나 초등자인 헤르만 불을 포함한 4명의 소수 대원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원정대는 인공산소나 고소포터의 도움 없이 해발 6,950m까지 짐을 올리고 정상 공격에 나섰으나, 안개와 눈보라로 인해 시계가 불확실해지는 바람에 전위봉(8,030m)에서 등반을 포기해야 했고, 그로 인해 정상을 불과 17m 남겨놓고 8,000m 고봉 첫 알파인스타일 등정의 영예를 다른 팀에게 넘겨줘야 했다. 두 번째 도전에서 전원 등정에 성공한 이들이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펼친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었고, 고소에 적응되지 못한 상황에서 등반하다 고소증에 시달리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맥주를 마시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8,000m 고봉에서의 알파인스타일 등반 첫 성공은 1975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의 가셔브룸1봉(8,068m) 등반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두 클라이머는 히말라야 8,000m 고봉 초등 시대 때부터 줄곧 자리잡아온 전통적인 극지법에서 탈피해 고소 포터는 물론 중간 캠프나 고정로프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의 힘으로 표고차 2,000m 거벽인 서벽에 새 루트를 내면서 57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후 8,000m 고봉에서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연이어 시도한다. 그는 가셔브룸1봉 등반에 성공한 지 3년 뒤인 1978년 낭가파르바트(8,125m) 디아미르벽 신 루트 단독등반에 나선다. 디아미르는 1970년 친동생인 귄터 메스너와 함께 남쪽 루팔벽을 통해 등정에 성공한 뒤 남쪽으로 하산하면서 동생을 잃었던 비운의 벽이었다.

메스너는 구토와 탈수 현상을 초래한 위장장애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의 비박을 견뎌내면서 초인적인 의지와 체력, 기술을 발휘해 단독등반 3일째 정상에 올라섰다. 그는 하산길에 7,400m 높이의 비박지에서 폭풍설을 만나 36시간이나 갇혀 지내야 했으나 베이스캠프(4,800m)를 출발한 지 닷새 만에 귀환에 성공한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적인 히말라야 등반가들의 8,000m 고봉 알파인스타일 등반 러시를 이룬다. 이에 따라 1980년 폴란드의 보이테크 쿠르티카와 영국의 알렉스 매킨타이어가 다울라기리(8,167m) 동벽을 알파인스타일로 등정했고, 1982년 영국의 세계적인 산악인 더그 스코트와 매킨타이어는 세 차례의 비박을 견뎌내면서 시샤팡마(8,027m) 남서벽 초등정을 이룩해낸다.

이어 4년 뒤인 1984년 메스너와 한스 카멀란더는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초의 2개 봉 종주등반에 도전해 가셔브룸1·2봉(8,035m) 종주에 성공하는가 하면, 폴란드의 크지슈토프 비엘리키는 브로드피크(8,047m)를 해발 4,900m 높이의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15시간 40분 만에 정상에 오르고 그 날 밤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알파인스타일 속공등반 기록을 세운다. 당시 비엘리키는 표고차 3,150m의 브로드피크를 당일에 등반해 낸 기록이다.

↑ [월간산]2010년 12월 북벽 신 루트를 개척하며 파릴랍차 정상에 오른 한국산악회 원정대. 오른쪽이 유학재 대장, 왼쪽은 하산길에 유명을 달리한 고 황기용 대원이다.

또한 같은 해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와 보이테크 쿠르티카의 브로드피크 3개 봉 종주에 성공한다. 이 등반은 지금까지도 히말라야 고봉에서 해낼 수 있는 극한 등반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지난 가을 알파인스타일 등반 나선 2개팀 대원 5명 전원 사망

이런 등반은 스페인의 닐 보이가스와 엔릭 루카스의 안나푸르나 남벽 알파인스타일 등반, 1986년 스위스의 에라르 로레탕과 장 투르아예·프랑스의 피에르 베갱의 에베레스트 북벽 혼바인 쿨와르 속공 등반으로 이어진다. 에베레스트 북벽 혼바인 쿨와르 등반은 ABC 출발 45시간 30분 만에 등정과 하산이 종료되었으나 베갱은 첫날 등반을 마치고 7,800m 지점의 설동에서 비박 후 이튿날 8,000m 지점에서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했다.

해발 8,000m에 못 미치지만 8,000m급 고봉에서 이루어진 등반보다 더 뛰어난 등반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등반은 가셔브룸4봉(7,925m)에서 이루어졌다. 1985년 보이테크 쿠르티카와 로버트 샤우어는 5일치 식량으로 11일간의 비박을 견뎌내며 히말라야 등반 사상 지금까지도 최고의 등반으로 꼽히는 가셔브룸4봉 서벽 등반을 해낸다.

당시 가셔브룸4봉은 산악 선진국 등반가들이 노렸으나 아무도 오르지 못한 벽으로, 쿠르티카는 등반을 마친 뒤 "등반 가치가 높은 산인데도 높이가 낮다고 해서 등반을 기피하는 것은 히말라야 등반의 질을 낮추는 일"이라며 가셔브룸4봉 등반의 의의를 밝혔다.

가셔브룸4봉 서벽 등반 이후 극한 등반가들의 도전 대상은 높이에 관계없이 고난도 거벽 등반으로 흘러갔고, 소수의 인원에 의한 경량 등반이 주를 이루었다. 때문에 현재 히말라야를 비롯한 고산에서 행해지는 극한의 등반은 당연히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일컫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런 흐름에 따라 아마다블람(6,856m) 북서벽과 마칼루(8,463m) 서벽이 등반되는가 하면 트랑고 네임리스타워(6,239m)에 5.13a급 자유등반 루트인 카우보이 다이렉트(Cowboy Direct)가 탄생하고, 철옹성으로 남아 있는 파키스탄의 울타르2봉(7,388m)과 라톡2봉(7,132m) 서벽 초등정이 1996년과 1997년 이루어지는가 하면 1999년 트랑고 그레이트타워(6,286m) 북동벽이 완등되었다. 또한 인도히말라야의 벽등반을 상징하던 탈레이사가르(6,904m) 북벽, 창가방(6,864m) 북벽, 시블링(6,543m) 북벽이 하나 하나 등반되고 러시아팀은 바기라티3봉(6,454m) 서벽에 직등 루트를 내기도 한다.

↑ [월간산]파릴랍차 북벽 등반. 대원들이 오버행 침니로 접어들고 있다.

새천년인 21세기 들어 등반 대상지의 난이도는 한층 높아졌다. 러시아팀이 스팬틱(7,027m) 골든필라를 신 루트로 재등에 성공하고, 밴타브락(7,285m) 사우스필라와 밴타브락2봉(6,960m) 서벽이 후버에 의해 등정되었다. 또한 2003년 러시아의 발레리 바바노프에 의해 눕체 동봉(7,804m) 사우스필라 신 루트가 등반되고 이듬해 2004년에는 눕체 주봉(7,864m) 북벽과 자누(7,710m) 북벽이 등정된다.

한국 원정대의 히말라야 알파인스타일 등반은 1992년 울산산악연맹의 시샤팡마 등반이 최초로 꼽히고 있다. 당시 초오유(8,201m) 등반을 통해 8,000m급 고소에 적응돼 있던 남선우, 김영태 대원은 ABC(5,500m)를 출발해 C2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정상에 오른 다음 C2로 내려와서 쉬고 이튿날 하산하는 등, 4일 만에 시샤팡마 중앙봉(8,008m) 등반을 마쳤다. 당시 대원들은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대한 개념이 약한 상태였고 때문에 초오유를 함께 등반한 셰르파가 시샤팡마 중앙봉 등반에 동참하는 것에 대해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

이후 1996년 양산 마스터즈 알파인 클럽의 시샤팡마 중앙봉 등정, 1997년 성균관대 원정대의 초오유(8,201m) 최단시간 등정(북서면 노멀루트 ABC 출발 이후 등정과 하산에 이르기까지 19시간 50분 기록), 2006년 서울시립대 OB인 김창호(몽벨 자문위원)의 가셔브룸2봉(8,035m) 등정(C1 출발 이후 18시간 20분 만에 등정), 2007년 다이내믹 부산원정대의 브로드피크(8,047m) 등정(3박 4일) 등이 8,000m급 고봉에서 이루어진 알파인스타일 등반으로 인정되고 있다.

2000년 이전까지 한국 산악계에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대두되지 않았던 것은 등반 스타일보다는 높이와 등정을 목표로 하는 등반이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 엄홍길, 박영석 대장과 같은 대표 산악인들은 각축전을 벌이며 8,000m급 14개 고봉 등정에 몰입해 있었고, 사회 분위기 또한 어떤 스타일로 등반했느냐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등정에만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엄홍길, 박영석 대장의 14좌 완등이 마무리지어질 즈음 고봉 등정에 대한 회의적이 시각이 나오기 시작하고, 등로주의와 등정주의에 대한 평가가 아마추어들의 시각에서도 나오면서 히말라야 거벽 등반과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게 산악 평론가들의 시각이다.

한국 산악인들이 알파인스타일 등반은 2000년대 들어 6,000~7,000m급 봉에서 주로 시도되었다. 2001년 김창호·최석문씨가 알파인스타일로 파키스탄의 시카리(5,928m) 북동벽에 새 루트를 내고, 2003년 김창호씨는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6,000m급 4개봉을 단독으로 올랐다. 2005년에는 남벽을 통한 안나푸르나(8,091m) 한국 초등과 에베레스트 남서벽 한국 초등, 샤샤팡마 남서벽 신 루트 등반 등 8,000m 거벽에서 좋은 등반을 펼쳐온 박정헌 대장이 최강식 대원과 함께 촐라체(6,440m) 북벽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나선다. 당시 두 클라이머는 3일간의 비박 끝에 등정에 북벽 완등에 성공했으나, 하산길에 최강식 대원이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고 이후 탈진하는 등 위급한 상태에 빠졌다가 생환에 성공한다.

↑ [월간산]중국을 대표하는 알파인스타일 등반가인 얜동동과 저우평.

2007년에는 청죽산악회 원정대(대장 심권식)가 파키스탄의 가르무시(6,244m) 등반에 성공하고, 2009년에는 K2 익스트림팀(대장 김형일)이 파키스탄의 스판틱 북서벽 등반에 성공하는가 하면 박정용(부경대 OB)씨는 쿰부히말의 꽝데 북벽 단독 등정에 성공한다. 2010년 한국산악회 원정대(대장 유학재)는 쿰부히말의 파릴랍차(6,017m) 북벽 신 루트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성공하지만 안타깝게도 등정자 중 황기용 대원은 고소증에 의한 내장 천공으로 하산 도중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2000년 이후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무르익어오면서 2011년 1월 말 설악산에서 개최된 동계 산악인 모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알파인스타일 등반가들의 초청 강연회가 열린 바 있고, 지난 가을 8,000m급 고봉인 안나푸르나 남벽 신 루트 등반과 촐라체 북벽 36시간 등하산과 같은 도전적이면서도 시험적인 등반을 하기에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두 팀 대원 5명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을 맞고 만 것이다.

곤란성 추구하되 안정성 확보된 등반해야

대다수의 산악평론가들은 알파인스타일 등반의 대두는 무엇보다 등반은 본질적으로 곤란성을 추구하는 행위라는 면에서 클라이머들이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라 말하고 있다. 첨단 소재를 이용한 장비의 발달과 등반 정보에 대한 일반화로 산에 대한 불확실성이 적어졌기 때문에 클라이머들이 스스로 불확실성을 높이고 반면 개인의 창조성과 능력을 더 한층 발휘할 수 있는 알파인스타일 등반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시각인 것이다. 여기에 적은 비용으로 맘에 맞는 소수 클라이머가 짧은 기간 안에 해낼 수 있다는 면에서 매력적인 등반 스타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기르기즈보이즈'로 대변되는 일본의 소수 클라이머들이나 최근 들어 중국의 몇몇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와 중국의 고산에서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의한 훌륭한 등반을 해내고 있다.

그 해에 가장 뛰어난 등반을 펼친 등반대에게 주어지는 세계 최고 권위의 황금피켈상 역시 이러한 알파인스타일의 시험적인 등반을 펼치는 팀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알파인스타일 등반은 소수 경량 속공 등반을 추구하다 보니 사고의 위험이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 일어난 두 차례의 사고를 통해 '히말라야 등반을 준비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춘 등반 선진국에 비해 환경이 열악한 우리에게 과연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맞느냐' 하는 문제 또한 산악인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알파인스타일 등반가들은 환경적으로 4,000m대 이상의 산악환경과 고소를 쉽게 접할 수 있어 수시로 경험을 쌓고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겨울철 두어 달에 한해, 그것도 해발 1,950m 높이의 한라산이나 1,708m 높이의 설악산이 히말라야 훈련을 위한 겔렌데의 전부라는 게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 [월간산]쓰구냥 남벽의 더 프리 스피릿츠.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등반의 정수'라는 시각이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시도하고 있는 유학재(휠라스포트 기술고문)씨는 "요즘 들어서 알파인스타일 등반이 아니면 가치 없는 등반으로 폄하하는 것 또한 잘못된 시각"이라 말한다. 유씨는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는 등반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며 "산악인들이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나서기에 앞서 충분한 훈련과 경험, 그리고 철저한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고 충고했다.

또한 본지 기획위원인 오영훈(서울농대 OB)씨는 "평소 7,000m대 고산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훈련을 쌓으며 거벽등반이나 고봉 종주등반과 같은 획기적인 등반을 해내고 있는 러시아 산악계에서는 지금도 소수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대한 시각이 회의적"이라 귀띔한다. 오씨는 "이는 등반은 본질적으로 곤란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안정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러시아 산악계의 등반 가치관 때문"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이런 점에서 메스너의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벽 단독 알파인 등반은 등반 이후 34년이 지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도 서구 산악계는 눈사태와 빙탑 붕괴의 위험이 너무도 높은 대상지에서 이루어진 등반이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여름 가셔브룸4봉 서봉 중앙립 신 루트를 개척한 바 있고 50대 나이에도 6,000m 고봉 거벽에서 열정적인 등반을 펼치고 있는 유학재씨는 요즘 산악계의 분위기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등반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서 있지 않은 아마추어 등산인이나 또는 매스컴에서 알파인스타일 등반만이 최고의 등반이요, 노멀루트 등반은 가치 없는 등반으로 몰아붙이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등반 대상과 스타일은 개개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누구도 산악인을 함부로 매도하거나 절벽 끝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참조 <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 (이용대 저)

↑ [월간산]로부제 동봉 남서벽 전경. 중앙의 가느다란 빙벽이 미국인 두 명이 오른 루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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