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환상·현실을 넘나들며 세 '잉여' 인간이 벌이는 문근영 납치사건

한윤정 기자 2012. 1. 27. 20: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문근영은 위험해…임성순 | 은행나무 | 336쪽 | 1만2500원

문근영을 앞세운 건 독자의 시선을 끌겠다는 작가의 전략이다. 보고 또 봐도 다시 보도록 만드는 스타의 속성을 이용한 것이다. 전략은 일단 성공했다. 아무리 성인 역을 해도 귀엽게만 보이는 원조 '국민 여동생'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궁금해서 소설을 보게 된다.

작품은 문근영이 납치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딘지 어설퍼 보이는 복면한 남자들이 문근영을 지하실 의자에 묶어놓고, 그녀가 출연했던 이동통신사 광고카피인 "Have a good time"이란 말을 남긴 채 나가버린다.

문근영 납치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 작가의 이야기가 교차해 펼쳐진다. 작가는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돼 거액의 상금을 받았다. 등단작 '컨설턴트'는 자살로 가장한 청부살인을 하는 한 회사의 이야기다.(이는 2010년 세계문학상에 < 컨설턴트 > 란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과 같다). 그런데 후속편을 준비하는 작가에게 정말 '회사' 사람들이 나타나서 전작이 너무 사실처럼 보이니 회사의 정체는 외계인이었다는 설정으로 작품을 쓰라고 강요한다.

문근영을 납치한 남자들은 혜영, 승희 그리고 성순(작가의 이름과 같다)이다. 키 162㎝, 몸무게 107㎏인 뚱보 혜영은 골수 팬클럽 근영홀리세인트닷컴 회장이다. 말끝을 "~근영"으로 끝낼 만큼 충성심이 높다. IQ 180의 천재인 승희는 에로물을 팔면서 만화·비디오·게임에 빠져 사는 '오타쿠', 그리고 성순은 세상만사를 음모로 바라보는 음모론 신봉자다. 이들은 이름이 여자 같다는 이유로 맺어진 중학교 동창이자 왕따, 루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잉여'들이다.

어느 날 이들은 똑같은 꿈을 꾼다. 하얀 슬립을 입고 천사의 날개를 단 문근영이 사랑한다고 속삭인 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음모론자 성순은 이것이 문근영을 조종해 지구를 폭파하려는 '회사'의 거대 음모임에 틀림없다며, 문근영이 영화 홍보차 생방송에 나가서 하는 말이 기폭장치가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친구들을 설득해 문근영을 납치한다.

이 소설은 패러디, 패스티시(혼성모방), 메타픽션(소설에 대한 소설) 등의 방법론을 차용했다. 만화 주인공의 대사, 광고 카피, 인터넷 유행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진짜 작가와 소설 속의 작가, 그리고 사건을 착각으로 이끌어가는 주인공 성순의 정체성이 혼동을 일으킨다. 소제목은 대중음악 제목들이며, 각 부 사이에는 미드를 연상시키는 전편보기, 예고가 있다. 빈 페이지에는 출판사의 진짜 도서 광고를 게재해 본문과 광고의 구분을 없앴다.

이 같은 글쓰기의 목적은 현대인들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다. 과도한 정보에 노출된 현대인은 사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환상을 사실보다 훨씬 진짜처럼 느낀다. 또 현대소비사회는 미디어를 활용해 사람들의 욕망을 더욱 부추긴다. 영화배우 문근영은 이런 '시뮬라크르 사회'에서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소구하는 기호이자 이미지다.

이런 사회에서 외계인이든, '회사'든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세력들에게는 미디어의 활용이 핵폭탄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런데 문근영을 어떻게 이용한다는 것인가. 성순은 레이건 암살을 시도했던 힝클리가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려고 방아쇠를 당겼듯이 누군가 문근영을 향한 좌절된 욕망을 지구 멸망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해소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혜영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숭배했던 문근영은 현실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가 알던 문근영이 아니다. 납치범들을 피해 하수도로 숨었던 문근영은 무한복제 모드로 접어든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됐을까. 계속 회사의 괴롭힘에 시달리던 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 '회사는 심리적 딜레마가 만들어낸 망상'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자본주의로부터 돈(상금)을 받는 일 자체가 작가에게는 심리적 족쇄가 됐다는 것이다.(작가는 < 컨설턴트 > 와 < 문근영은 위험해 > 에 이어 '자본주의' 3부작인 < 전락 > 을 쓰고 있다.) 회사가 외계인이 되면 자본주의 비판과 돈의 추구라는 딜레마가 모두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본주의를 피할 수 없는 작가는 이렇게 외친다. "회사의 품은 너무나 넓어서, 심지어 회사를 비난하고, 공격하고, 그것의 치부를 밝히는 글조차 하나의 상품일 뿐이야." 임성순씨(36)는 성균관대 국문과 재학시절 곽경택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 챔피언 > 을 거쳐 안권태 감독의 < 우리 형 > 연출부 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B급 영화 같은 키치적인 유머 속에 본격 문학의 문제의식을 담은 하이브리드 문학"을 추구한다.

<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

경향신문 '오늘의 핫뉴스'

▶ 딸 응급실 데려가려 음주운전한 아빠… 판결은

▶ 어느 8등신 소녀의 죽음

▶ 로또 2등의 '반란'… 1등보다 당첨금 높아

▶ 심야고속버스 운전사 쓰러지자 승객들…

▶ 이외수 일침… "뇌를 분실하셨나"

모바일 경향 [New 아이폰 App 다운받기!]| 공식 SNS 계정 [경향 트위터][미투데이][페이스북][세상과 경향의 소통 Khross]-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