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사이드 X파일]
지난 50년간 헤비급 복싱의 황금시대라면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의 3각 대결, 마이크 타이슨과 에반더 홀리필드의 연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내 인식과 달리 복싱이 몰락한 건 아니지만 최근엔 유럽 위주로 헤비급이 인기인 반면, 가장 큰 흥행카드는 메이웨더 주니어와 매니 파퀴아오이지요.
세계 최고 선수였던 무하마드 알리와 라이벌 조 프레이저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약간 분야는 다르지만 둘 간의 일화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핵심 선수는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와 마이크 타이슨은 팬들의 시선을 끄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최근엔 브록 레스너가 UFC에서 치고 나가곤 있지만 2011년 최고 흥행은 메이웨더 주니어가 기록했지요. 메이웨더는 카리스마보단 알리의 독설, 타이슨의 사건 사고를 결합시켜서 팬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파퀴아오와는 다르지만 뭐가 되든 흥행하는 장점은 있지요.
알리는 독설과 비상한 머리로 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당시 헤비급 복서들에 대한 팬들의 관심, 뉴욕에 집중한 미디어 덕분에 세계 최고 운동선수로 떠올랐습니다.
조 프레이저는?
어린 시절 부친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흑백 TV를 구한 덕분에 복싱을 일찍 접한 조 프레이저는 복서 조 루이스를 동경했고 큰 덩치와 파워 덕분에 동네에선 최고의 주먹으로 꼽혔지요. 백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쓴 뒤 고향을 떠나 아마추어 복서가 된 프레이저는 버스터 매티스에게 패해 1964년 올림픽 상비군이 되었지만 연습 경기 중 매티스가 골절을 당하자 대타로 나가서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그 역시 4강전에서 손이 부러졌기에 아슬아슬하게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고향에 돌아왔음에도 골절로 인해 정규 일자리를 잃게 되자 몇몇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프로로 변신합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켄터키 주에서 태어났던 알리는 12세에 자전거 절도를 시도하다가 경관 조 마틴을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백인인 마틴은 복서 출신이기에 알리에게 복싱을 가르쳤고 알리는 이후 같은 인종 프레드 스토너에게 지도 받으면서 복서로 출발했지요.
아마추어 통산 100승 5패를 이뤘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차별을 받자 금메달을 허드슨 강에 던지면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후 백인들에게 맞서기로 선언하면서 '캐시어스 클레이' 라는 이름을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습니다.
알리의 저항은 타이틀 박탈로 이어지다
알리는 상대를 폄하하는 도발 발언과 카리스마로 시선을 끌었습니다. 프로 데뷔 4년 만에 챔피언 소니 리스턴과의 경기를 앞두고서는 챔피언을 못생긴 곰이라고 조롱했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장담했지요. 팬들은 카리스마 있는 알리의 챔피언 등극을 원했고 기대대로 리스턴을 잡으면서 WBC와 잡지 '더 링'에서 선정하는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3년 뒤 에디 테럴을 잡고 WBA 챔피언십도 통합했지요
문제는 병역 거부였습니다. 백인의 이익을 공고히 하는 병역을 거부하겠다면서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기로 했고 결국 1967년 4월 타이틀을 박탈은 물론 선수 자격 정지를 당합니다.
프레이저의 비상
조 프레이저는 1965년 프로로 변신, 24연승을 거뒀고 알리가 병역거부로 1967년 4월 타이틀을 박탈당하자 챔피언을 다시 정하는 분위기에서 지미 엘리스를 잡고 챔피언에 올랐지요. 프레이저는 알리의 전성기 시절 두 번째 강자로 여겨졌고 알리의 언변이나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강하지만 약간 아쉬운 선수였지요.
프레이저는 원래는 알리를 좋아했다
프레이저는 챔피언에 오른 뒤 당시 대통령 리차드 닉슨을 만나자 알리를 복권시켜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알리가 금전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돈도 빌려줬지요. 둘의 이런 관계는 알리가 경기를 앞두고 도발발언을 했고, 프레이저가 그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틀어집니다.
3년 만의 복귀

(출처 : 연합뉴스)
알리는 3년의 징계를 마친 뒤 1970년 복귀했지만 최고 전성기는 지났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자신의 뜻을 위해 선수 경력을 일정부분 포기했던 알리, 그래도 흥행성과 이슈가 엄청난 대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무패의 기록을 자랑하던 두 강자는 1971년 '세기의 대결'을 펼쳤습니다. 4년을 기다린 대결로 홍보되던 이 경기는 당시 엄청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둘 다 무패였고 인종 감정이 결부되면서 더욱 과열되었습니다. 인종이나 민족, 지역감정은 스포츠에서 잘 이용하면 대박 흥행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바로 이 경기가 그랬지요. 백인을 거부하는 알리는 흑인의 영웅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미국의 기존 체제를 옹호했던 프레이저는 백인의 응원을 받았지요. 흑인들은 백인의 하수인이라면서 프레이저를 비난했습니다. 백인들은 프레이저를 적극 응원하기보단 알리를 미워하는 경향이 더 컸지요.
세기의 대결

당시의 신기술인 '폐쇄회로 TV'를 통해 방영이 되었기에 이 경기는 극히 일부만 볼 수 있었고 대부분은 라디오나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 세계의 관심이 있던 초대박 이벤트에서 초반엔 알리가 분위기를 잡았지만 중반 이후 프레이저가 분위기를 가져갔고 15라운드에 KO를 성공시켜 점수를 역전시킨 덕분에 판정승을 거둡니다.
경기의 승자는 프레이저, 여론의 승자는 알리
하지만 문제는 직접 본 이들이 많지 않았고, 알리가 억울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프레이저의 얼굴은 퉁퉁 부은 채 유명 스포츠 잡지 표지에 나왔던 반면, 알리는 얼굴 손상이 많지 않았지요. 결국 팬들은 알리가 인종차별의 희생양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고 억울하게 타이틀을 빼앗긴 것에 대한 동정도 커졌습니다.
알리의 언변은 프로레슬링에서 차용한 측면이 큽니다. 고져스 조지, 프레디 블레시 같은 이들을 보면서 배웠는데요, 훗날 알리는 이 부분을 인정했지요. 최근 차엘 소넨도 그런 측면이 크지만, 원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잘 활용하느냐가 의미 있지요. 알리는 영리한 머리로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였습니다.
흑인들은 거의 신처럼 숭앙하는 알리를 지지한 반면, 백인들은 프레이저에게 아주 열광적이지 않았기에 알리에 대한 동정여론도 생겨버렸지요.
조지 포먼의 등장
프레이저는 알리를 잡은 뒤 두 번 더 방어했지만 다음 상대는 엄청난 거물이었습니다. 알리와 프레이저를 뛰어넘겠단 포부의 무서운 후배가 치고 올라왔지요. 40연승을 거두는 파죽지세의 조지 포먼이 도전자로 떠올랐습니다.
강한 펀치, 타고난 맷집을 자랑하던 7세 연하의 조지 포먼과의 경기는 쉽지 않았지만 팬들은 그래도 프레이저의 우세를 예상했습니다.
둘은 1973년 1월 22일 대결했습니다. 그래도 프레이저가 이길 것이란 예상과 달리 너무 당황스러운 결과가 나옵니다. 프레이저는 2라운드까지 6차례나 다운을 당하면서 TKO패로 무너졌습니다. 힘이 좋으며 펀치가 강한 포먼을 프레이저의 스타일로는 넘기 쉽지 않았습니다. 상성이 안 맞았지요.
전설들의 화려한 승부

록키 마르시아노를 비롯해 무패의 복서들이 있다 하지만 승부의 공정성도 확실한 게 아니었고 상대 선수들의 기량이 의심받던 1900년대 초반이었기에 조지 포먼이야 말로 사상 최고의 복서라 봐도 무방했습니다. 훗날 마이크 타이슨이 1990년 일본 도쿄에서 무너지기 전의 분위기와 비슷했지요.
그런 조지 포먼에게 전성기가 지난 알리가 상대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알리는 공식기록상 프레이저에게 패했지요. 둘의 재대결은 흥행의 의미도 컸기에 1974년 1월 28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2차전이 펼쳐졌습니다. 이 경기는 포먼의 도전자를 가리는 성격이 컸습니다.
재경기에선 알리가 12라운드 판정승을 거뒀지요. 알리는 이제 도전자 자격을 차지했습니다. 알리는 다들 승산이 없다던 조지 포먼과의 대결에서 승리, 사상 첫 패배를 안겨주면서 감동의 드라마를 썼지요.
조 프레이저와의 마지막 대결은 1975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알리는 다시 한 번 승리를 가져가 상대 전적 2승 1패로 앞섰지요. 이후 프레이저는 조지 포먼에게 KO 당한 뒤 만 32세로 은퇴했고 알리는 통산 3회 챔피언에 오른 뒤 은퇴합니다.
알리와 프레이저가 틀어진 이유
알리와 프레이저는 처음엔 사이가 좋았지만 결국 원수가 되었지요. 알리는 경기 홍보를 위해 남들을 폄하하곤 했습니다. 조 프레이저와의 경기를 앞두고서는 고릴라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하지만 프레이저는 이걸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3차전 기자회견에서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습니다.
알리는 첫 경기에서 졌지만 팬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흑인들에게는 영웅이었습니다. 반면 프레이저는 백인들의 편에 붙은 흑인이었지요. 백인들도 알리를 미워했지만 점점 그에게 빠져들면서 프레이저만 허공에 떠버리고 말았지요. 팬들의 협박도 극심했기에 프레이저로서는 짜증이 날 만도 했지요.
양측의 서로 다른 감정
알리는 언론에서 폄하하던 것과 달리 프레이저를 좋은 상대로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프레이저는 본인과의 경기에서 이름을 알렸다고 평가했고, 이 말에 프레이저는 다시 한 번 분노했지요. 냉정하게 본다면 알리가 맞습니다. 프레이저도 스타는 맞지만 한 시대에 중심 선수가 있고, 주변에 있는 선수들이 같이 상승효과를 발휘해야 대박 흥행이 되지요. 비슷한 예로 에반더 홀리필드 혼자서는 큰 이슈로 어려웠지만 타이슨이 있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훗날 래리 홈즈나 마이클 스핑크스 같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잡지 못했던 걸 고려한다면 프레이저는 알리의 혜택을 받은 건 부인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자존심도 걸린 문제이며 이미 알리와 관련된 일은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억울한 마음도 분명 있었습니다. 알리의 복귀를 청원했으며 어려울 때 돈도 빌려줬지만 못생겼다는 말이나 들었으니까요. 프레이저는 자신이 더 잘 생겼다고 말했지만 팬들은 그걸 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알리의 발언도 팬들의 관심만 증폭시키는 것이었으며 이슈 몰이에는 감정보다 재미가 더 중요할 뿐이었지요.
후일 알리가 파킨스씨 병으로 고생하자 프레이저는 자신에게 맞은 후유증이라면서 농담을 던졌으나 주변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알리가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을 하자 그를 불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농담이 아니라 열등감으로 밖에 볼 수 없었지요.
재미있는 라이벌전
알리와 프레이저의 3차에 걸친 대결은 큰 이슈였지만 사전 합의를 거치지 않은 알리 특유의 화법과 카리스마로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프레이저는 외모에 대한 비하를 들었고 흑인들에게는 백인의 앞잡이로 비춰지면서 살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알리에게 패한 뒤의 허무감, 처음에 잘 해줬음에도 소용이 없었다는 분노가 이어지자 감정은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그래도 알리는 누군가 하나 택해 전쟁을 하는 경우는 프레이저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프레이저는 한동안 알리를 상대로 뒤늦게 저주를 퍼부었지만 대중들의 반응이 좋지 않자 알리에겐 아무 감정이 없다면서 말을 바꾸기도 했지요.
절대 강자들도 세월 앞에서는...
프레이저와 알리의 자존심 대결은 한 차례 더 있었습니다. 프레이저는 아들 마비스를 복서로 키웠으나 래리 홈스와 마이크 타이슨의 제물이 되었고 딸 재키도 복서로 키웠지만 알리의 딸 레일라에게 패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둘의 경기는 여성 복싱 사상 최고 이벤트 판매 기록을 갖고 있지요.
그렇게 세상을 주름잡던 강자 조 프레이저는 지난 달 간암으로 사망했고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는 알리도 최근 쓰러지면서 많은 이들의 우려를 주기도 했지요. 가끔은 절대 강자라는 화제에 부질없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이 만들었던 뜨거운 대결은 팬들의 가슴 속에 깊이 남아있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