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딸 스베틀라나 85세로 사망(종합)

유철종 2011. 11. 2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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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망명한 미국서 결장암으로 숨져

소련 체제 신랄하게 비판한 자서전 내기도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옛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스탈리나)가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결장암으로 사망했다고 미 일간지 뉴욕타임스(NYT) 등이 28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올해 85세인 알릴루예바는 위스콘신주 리치랜드의 노인 요양원에서 지난 22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6년 스탈린과 그의 둘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난 스베틀라나는 어렸을 적 스탈린에게 '작은 참새'라고 불리며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0대에 영어 잡지를 통해 6세 때 여읜 어머니 나데즈다의 사인이 자살이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유대계 시나리오 작가와의 첫 사랑이 스탈린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부친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딸과 사귀는 시나리오 작가 알렉세이 카플레르를 여러 번 총살하려고 했으나 딸의 심적 충격을 우려해 강제수용소에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부친과 갈등을 겪던 알릴루예바는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 알릴루예바를 따랐다.

독재자 딸의 반란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1967년 남편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던 인도인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허가를 받은 그는 인도에 도착한 뒤 곧바로 정치적 망명을 선언했다. 이 소식은 당시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인류 사상 첫 우주비행 성공(1961년)에 버금가는 충격을 국제사회에 던졌다.

잠시 스위스에 머물다 미국으로 망명한 스베틀라나는 미국 공항에서 '표현의 자유'를 찾아왔다고 밝히고 공개적으로 소련 여권을 불태워 냉전이 낳은 '스타'로 주목받았다.

그해 스베틀라나가 출간한, 스탈린과 크렘린의 생활을 다룬 자서전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소련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 책으로 그녀는 큰 돈을 벌수 있었다.

1970년 미국인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와 결혼해 딸 올가를 낳는 등 미국 생활에서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2년 뒤 결국 이혼하며 또한번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스베틀라나는 1984년 2명의 전 남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돌아와 소련 국적을 회복했다. 그녀는 고국에서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며 공개적으로 서방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 당국과의 불화로 2년도 못 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80년대 말 한동안 영국에서 지내기도 했던 그녀는 말년에 위스콘신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며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한동안 세간에서 잊혀던 스베틀라나는 지난해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며 "어딜 가던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라고 회한을 드러낸 바 있다.

스탈린에겐 스베틀라나 외에 첫 부인에게서 난 큰 아들 야코프와 둘째 부인 알릴루예바가 낳은 바실리가 있었다.

야코프는 2차 대전 중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혀 수용소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독일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독일 장군과 야코프의 교환을 제안했을 때 스탈린이 "나는 야코프란 아들을 둔 적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cjyou@yna.co.kr, mi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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