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 TO FACE] 기로에 선 안정환, "날 원하는 K리그 팀 있지만 고민"
[스포탈코리아] 연어에게 삶의 출발점은 곧 종착지이고, 마지막이 시작이다. 어찌보면 한국 나이 36세의 안정환의 현 상황은 연어와 흡사하다. 최근 3년 간의 중국 생활을 마감한 그는 선수 은퇴를 앞두고 축구 인생을 시작한 한국에 돌아왔다. 인생 2막을 펼칠지, 마지막 불꽃을 더 태울지 장고에 들어갔다. 사업가 안정환, 여전한 판타지스타 안정환. 그 앞에 놓여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지난 22일. 서울 청담동에서 만난 안정환은 퍽 여유로워 보였다. 이미 중국 다롄 현지에서 '스포탈코리아'와 단독으로 두 차례를 만난 그는 삶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이같았다. 어쩌면 그의 축구 인생 자체가 늘 도전하는 삶이었으니, 긴장과 불안 속에서 여유를 찾는 방법을 알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안정환의 여유는 그의 딸 리원이에도 찾아볼 수 있었다. 부모의 감정은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달되는 법. 이혜원 씨가 운영하는 사업체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된 터라 마침 그곳에 있던 여덟 살 꼬마 숙녀는 취재진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 나이 또래 아이의 발랄함을 보였다. 리원이는 중국에서 외국인 학교에 다녔던 기억에 대해 도리질 치며 "7시까지 학교에 가는 게 싫었다. 8시까지 가도 되는 한국이 좋다"며 아빠의 선택이 무엇이 될 지 힌트를 주기도 했다.
인터뷰는 3년 간의 중국 생활을 물론 프로의 시작이었던 대우 로얄즈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안정환은 이제는 먼 추억이 돼버린 이야기는 회상에 젖어서, 다소 민감한 이야기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겼다. 의외의 사실도 드러났다. 그가 크리스챤이었고, 선교사역에도 꿈이 있었다는 사실. 동네 친구 또는 형과의 만담처럼 자연스레 진행된 인터뷰는 시간이 흐를수록 흥미진진함을 더해갔다.
- 다롄 스더에서 3년을 뛰었다. 부산 시절을 제외하곤 한 팀에 1~2년 정도 머물렀는데 다롄에 오래 남았던 이유는?
일단 한국과 가깝고 지내기 괜찮았다. 여러 가지 환경도 나았다. 팀도 원해서 계속 지냈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고 배려도 잘해줬다. 가족이 있기에 심적으로 편하게 주요했다.
- 넬루 빙가다 감독이 온 뒤 출전 기회가 줄었다. 불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빙가다 감독이 온 뒤 새로운 팀으로 개편하는 과정이었다. 불화는 없었다. 난 올해까지만 하고 팀에 떠난다고 전달했었다. 은퇴를 생각하고 쉬려고 했었다.
- 중국에서 3년간 뛰면서 중국축구의 발전을 몸으로 직접 경험했다. 앞으로 중국축구가 어떤 모습이 될지 누구보다 잘 알 것 같다.
국내 언론에서도 이야기가 나오는데, 투자를 많이 하니 매년 지날 때마다 급속히 발전한다. 뛰면서 느꼈지만 발전할 수 밖에 없다. 환경이 좋으니 개개인의 실력도 금방 향상된다.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다.
- 국내에서는 중국 선수들의 프로 의식이 미흡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프로 의식이) 많이 떨어져있는데, 좋은 감독과 선수가 온 뒤 보고 배우면서 느끼는 것 같더라. 서서히 바뀌고 있다. 조만간 한국과 대등한 수준이 되지는 않지만, 중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면 판도가 뒤바뀔 수도 있다. 한국도 월드컵을 통해 바뀐 것처럼 중국도 할 수 있다. 큰 계기가 오면 많이 발전할 것이다.
- 휴식을 취하면서 향후 진로를 정리해가고 있나? 1~2년 더 현역 생활을 할 것인가?
아직은 반반이다. 어떻게 할 지 고민이다. 어떻게 보면 원하는 팀이 있으니 더 할 수도 있다. 그만하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여러 생각을 하고 있다. K리그에서 원하는 팀이 있다는데, 고민이다. (Q:최근에 인천에서 원한다는 말이 있던데?)(갸우뚱거리며) 그건 모르겠다.
- 수도권 팀을 원하는가?
수도권이나 지방이나 상관 없다. 가족을 생각한다면 환경이 중요하지만 감독이 날 얼마나 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편해야 잘 할 수 있고, 나이가 있는 만큼 배려를 많이 받아야 한다.
- 2002년 월드컵 멤버였던 황선홍 감독이나 유상철 감독은 어떤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나를 잘 알지만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 호칭은 어려운게 아니지만 팀을 이끌어가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잘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 이동국과 함께 전북에서 뛰는 것은?
동국이와는 한 팀에서 뛰어보지 않았다. 나야 동국이와 한다면 좋다. 그런데 전북이 원할지. (웃음)
- 해외에서 뛸 생각도 갖고 있는가?
고민이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해외는) 사는 환경을 따지고 조목조목 판단해야 한다. 육아 문제도 있다. 가족이 날 위해 11년간 힘든 외국 생활을 했다. 해외에 나가는 것은 가족에게 미안하다. 외국이 좋은 점도 많지만 아무래도 한국보다 불편하다. 자기 나라가 좋다.
- 한국 나이 36세의 나이가 축구 선수로는 환갑이겠지만 일반인에게는 한창 미래를 향해 돌진할 시기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일반 회사에서는 자리 잡고 위로 올라갈 나이다. 그런데 난 지금 거의 다 내려온 단계다. 쉽게 판단이 안 서고 애매하다. 올 초, 올해까지 하고 은퇴하려고 마음 먹었었다. 전반기만 한 뒤 은퇴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몸 상태가 되고 성적이 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내가 몸이 안 좋으면 그만하겠지만 지금은 마음만 앞서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체력이 된다. 원하는 팀이 없으면 은퇴지만 어떤 식으로든 원하는 팀도 있어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중에 은퇴하면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더 하면 팬들이 좋은 모습을 기대할 건데 잘 안될 때는 아쉽게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도 고민한다.
- 본인과 비슷한 나이대의 팬들은 어떤 말을 하는가?
한국에서 중국까지 응원왔던 팬들이 매우 많다.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린 분들도 많다. 같이 만날 때 더 뛰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굉장히 고맙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분들에게는 일종의 대리만족이라는 느낌도 있는 것 같다.
- 1998년 부산 입단 당시 언제까지 프로 선수를 하겠다고 생각했나?
서른 살에 은퇴한다고 밥 먹듯이 얘기했다. 이리 오래할 지 몰랐다. (웃음) 그 당시 너무 많은 게 한꺼번에 와서 힘들었다. 지금은 잘 먹어서 오래하지만 그 때는 은퇴를 빨리 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그리 생각한 듯하다.
- 2000년 여름 이탈리아 페루지아에 입단해 2002년 여름까지 보냈다. 이탈리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곳인가?
축구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최고의 선수들과 뛰면서 우물 안 개구리라고 느꼈다. 직접 부딪히면서 축구가 이런 것이라고 알게 한 나라였다. 거기서 한 게 축구의 시작이라고 보는 게 맞다.
- 일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당신이 페루지아에서 방출된 것에 안타까워 하더라.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국내에서 사랑 받고 얻은 것이 많았다. 잃은 것도 많았고... 축구 인생에서 제일 아쉽다. 이탈리아 대신 스페인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이탈리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 이탈리아에서 뛰면서 기억에 남은 선수는?
호나우두를 봤을 때 깜짝 놀랐다. 지단을 봤을 때는 후광이 나오는 것 같았다. TV에서 보던 사람들을 직접 보니 내가 TV를 보는 것 같았다. 축구게임을 하는 것 같이 느껴졌었다. 벤치에 앉아 지켜보기만 해도 동작 하나하나가 습득됐다. 그런 것을 처음 봤고 본 뒤에는 연습을 했었다.
- 그 당시 습득한 기술은 어떤 것이었나?
세르세 코스미 감독님이 공격수인데 헤딩이 취약하다고 헤딩 연습을 많이 시켰다. 거긴 머리로 정확히 받아서 넣는 게 아니고 각도만 트는 헤딩이었다. 페루지아의 한 선수가 각도만 트는 헤딩으로 골을 많이 넣었는데 코스미 감독님이 가르쳐주고 그 선수를 보면서 배우고 많이 연습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 때 헤딩으로 골을 넣은 장면 같은 것이다. 연습했던 게 그 경기 때 나온 것 같다.
- 한 팀에서 오래 뛰지 않았다.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다른 팀으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서 리그 준우승을 했지만 우승이나 다름없고 MVP도 탔다. 득점도 많이했다. 일본에 가서는 우승을 했다.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는 나가야 했다. 나가보니 워낙 실력 있는 선수들이 많았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한 곳에 계속 있기에는 젊었다. 가서 뛰면서 경험해보고 싶었다. 우승을 하면 끝이다. 그 다음에 2연패를 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 때마침 나를 원하는 팀도 바로 있었다.
-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에서 뛰었다. 그 나라 언어는 하는가?
조금씩 한다. 깊은 대화는 못 나누지만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다.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 득점하기 직전에 박지성에게 일본어로 볼을 흘려주라고 했다던데?
나도 몰랐는데 지성이가 일본어로 "스루"라고 말했다고 알려줬다. 지성이도 일본에서 뛰었으니 서로 통했다. 지성이가 일본어를 몰랐으면 내가 받아서 좋은 자리에서 슈팅할 수 없었을 것이고 골로 연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유럽으로 간지 얼마 안 됐을 때라 그게 몸에 배었던 것 같다.
- 지난해 남아공 월드컵 때 안정환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일각에서는 당신에게 한 방을 기대했지만, 현실적인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표했다. 그 때 당신은 솔직히 어떤 생각을 했나?
월드컵에 가기 전에 국가대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정해성 선생님께서 경기 보러 오셨는데 오실 때마다 골을 넣었다. 만났을 때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경기력을 바라서 뽑은 게 아닌 듯했다. 2002년, 2006년 모두 고참이 어느 정도 있었고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갔다. 젊은 선수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원했던 것 같다. 남아공에서 재미있었다. 베이스캠프 안에 오락실이 있었는데 어린 선수들과 오락도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박)주영이가 "형도 오락해요?"라고 말하더라. 2002년에는 (김)병지형, (최)용수형, (윤)정환형이 경기를 나서지 못했지만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줬다. 그런 역할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도 그런 역할을 했고 잘 지내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후배랑 같이 시간을 보내서 좋았다.
- 우루과이와의 16강전 때 당신이 한 방 터뜨릴 것 같은 감이 왔었다고 하던데?
그 감이 오더라. 뛰고 싶었다. (이)동국이가 들어갔는데 골을 넣길 바랐다. 다른 사람이 들어갔더라면 화가 났을 것이다.
- 반대로 예전 핌 베어벡 감독은 2007년 아시안컵 당시, 본인에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대표팀에 뽑지 않지만 추후 회복되면 뽑겠다고 말했고 본인도 좋게 받아들였다. 한국 감독과 외국인 감독의 생각에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어느 것이 맞다고 보나?
지도자를 하지 않았기에 모르지만, 많은 지도자를 겪은 경험으로 볼 때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이 명장을 만드는 것 같다. 선수 교체부터 선수의 심리, 몸 상태를 보고 판단을 내리는 외국 감독들이 많다. 큰 팀을 맡으면서 얻은 경험이다. 절대 우리나라 감독님, 선배님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좋은 팀, 좋은 리그에서 더 높은 수준의 경험을 하지 못하면서 차이가 생기는 것 같다. 유럽에서 뛴 선수들이 나중에 공부해서 지도자가 된다면 그 경험은 플러스 알파가 될 것이다.
- 최근 대표팀 경기를 봤는가?
1-2로 패한 레바논전을 봤다. 개인적으로 볼 때 팀에 젊은 선수만 있다. 세대교체 과정이지만 아쉬운 면이 있다. 대표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는 이기고 좋은 결과만 보겠지만 이런 일도 있을 때가 있다.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다. 다음에 잘 할 것이라는 기대로 응원을 해야 할 것이다. (Q:흔들릴 때 베테랑이 잡아주는 것도 필요해 보이는데?)맞다. 그런 것이 없다. 흔들리고 있을 때 말 한 마디 해주고 20분이든 30분 뛰면서 분위기를 몰아줘야 한다. 백전노장이 팀을 이끈다는 그런 말처럼 필요하다.
- 화보집과 표지모델로 나온 음반이 있다. 한국에서 상품화된 첫 번째 축구 스타로서 자연인의 삶과 간극이 컸을 텐데?
보는 눈이 많아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집 앞에 잠깐 나갈 때도 잘 차려 입고 나가야 한다. 친구들과 맥주 한 잔 마시는 것도 편하게 못한다. 운동 선수가 음주를 하는 것을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있어서다. 친구들과 있으면 밥 먹으면서 가볍게 반주 한잔 할 수 있지만 주위에서는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런 것이 다 들리다 보니 스스로 생활을 규제한다. 놀이동산도 편하게 못갔다.(웃음) 대신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데 여러 도움이 되고 있다.
- 박지성이 "축구 선수로 성공하고 싶지만 유명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공감이 가겠다. 사실 일반인에게는 욕심으로 보인다.
공감한다. 지성이는 더 그럴 것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유명한 게 낫다. 사랑을 받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행복한 고민이다.
- 화보집, 음반을 냈다. 자서전을 낼 때가 되지 않았나?
아직 젊다. 더 나이가 든 뒤 인생의 깊이를 알면 모를까, 지금은 책을 쓸 위인이 아니다. (Q:박지성은 벌써 자서전을 두 권이나 냈다.)(미소를 지으면서) 그런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언젠가 마케팅용이 아닌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을 쓰고 싶다. 정말 있었던 일을 재미나게 전하고 싶다.
- 예전 인터뷰에서 유소년 축구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한 적이 있다. 자신이 한국 유소년 축구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는다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은가?
지금 한국이 어떻게 유소년 축구를 운영하는지 잘 모르지만 유럽을 보면 굉장히 체계적이다. 최상위 1군팀의 시스템을 규모만 작게 옮겨서 한다. 17~18세의 어린 선수들이 프로에 올라가도 똑같이 경기하고 생활하게 한다. 그런 것을 만들고 싶다. 어린 선수가 1군팀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머리에 입력된 것이 몸이 커지면 자연스레 나오게 된다.
- 아내와 함께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는데?
준비한 지 오래 됐다. 운동을 하다 갑자기 관두거나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 있어서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 빨리 준비했다. (Q: 아내 이혜원 씨의 사업 수완이 좋은 듯 하다.)아내가 있어서 든든하다. 그전부터 식당, 쇼핑몰 등 작은 사업을 했다. 그걸 하면서 경험을 쌓아 이걸 하게 됐다. 전문적인 것은 아내가 한다. 생소한 분야지만 남자가 해야 할 부분도 있다. 내가 그런 것을 하고 있다.
- 어렸을 때 꿈이 선교사라고 들었다. 그 동안 종교가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믿음이 부족했나 보다. (웃음) 초등학교, 중학교 때 선교팀에 있었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뒤 운동했고 주일에도 교회를 다녔다. 이후 사춘기가 온 뒤 멀어졌지만 아내를 만난 뒤 10년 전부터 다시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건(선교사는) 안 되겠지만 도움을 많이 주며 살고 싶다. 여건이 안돼 운동을 못하고 축구화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무상으로 축구교실을 열어 축구를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도 있다.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인터뷰=이민선/김성진 기자
사진=이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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