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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하의 크로스바]니포 축구의 마지막 보물 '이을용'

입력 2011. 10. 24. 17:57 수정 2011. 10. 2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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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에서 마르세유 턴을 가장 깔끔하게 구사하던 이을용 선수가 은퇴했습니다. 그는 알려진 대로 굴곡이 많은 과거를 보냈지만 화려한 선수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월드컵 출전과 해외 진출 등 선수로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봤으니까요. 아, 우승 트로피와 거리가 있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을용 선수의 옛날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97년부터 시작해야겠네요. 당시 부천SK는 '러시아 신사' 발레리 니폼니쉬가 지휘봉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은 K리그에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줬죠. 니폼니쉬는 기존의 선이 굵던 한국 축구에서 탈피, 짧은 패스를 바탕으로 아기자기하게 경기를 풀어나갔습니다. 부천은 늘 좋은 경기를 펼치며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는데, 다만 생각만큼 성적이 뒷받침되지 못했습니다. 경기를 잘하고도 패하는 경우가 많았죠.

부천SK는 1997년 라피도컵 프로축구대회에서(지금의 K리그 정규 시즌) 10개 구단 중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덕분에 구단은 신인 드래프트 1순위를 손에 쥐었고 1998년 중요한 두 선수, 곽경근과 이을용 선수가 부천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올림픽팀과 국가대표를 거친 스트라이커 곽경근은 전체 1순위로 지명될 정도로 관심을 받던 선수였지만 부천이 두 번째로 지명한 이을용 선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업축구 한국철도에서 선수 생활을 하던 정말 무명선수였죠.

하지만 니폼니쉬 감독과 코칭 스텝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실업 무대에서 니폼니쉬의 패싱 게임에 어울리는, 기본기가 잘 갖춰진 보석을 발굴한 거죠. 이을용 선수는 입단 첫해부터 쟁쟁한 허리진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컵 대회를 포함) 33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는 윤정환, 윤정춘, 김기동의 뒤를 받치는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죠.

지금은 이을용 선수가 시야도 좋고 좋은 킥을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중앙 미드필더만 당시는 수비적인 선수였습니다.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지금과는 달리 킥이 정확한 편이 아니었거든요. 기본기도 좋고, 마르세유 턴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드리블 실력도 있었지만 긴 패스가 어이없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코칭 스텝도 유일한 단점이라며 그 부분을 참 아쉬워했죠. 대신 강하게 때리는 왼발 한 방은 있었습니다.

이을용 선수는 그렇게 첫 시즌부터 K리그에서 손꼽는 선수가 됐고 이듬해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에 발탁,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는 처음 소집된 1999년 3월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김도훈 골로 1-0 승리)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았죠. 그리고 계속 대표팀에 합류하며 국가대표로서도 입지를 단단히 합니다. 부천에서의 위상도 달라졌습니다.

이을용 선수는 1998년 니폼니쉬가 떠나고 2000년 윤정환이 일본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차츰 공격적인 비중을 늘려갔습니다. 대표팀을 오가면서 쌓은 자신감도 큰 힘이 됐죠. 부천 허리는 윤정환이 떠났지만 샤리의 가세와 이을용 선수의 진화 덕분에 큰 문제를 겪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윤환 감독이 오면서 긴 패스가 가미됐고 경기는 더욱 박진감 넘쳤죠. 니폼니쉬 축구가 드디어 빛을 보는 시즌이었습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준비하면서도 이을용 선수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축구에서 상징적인 의미인 '등번호 10번'을 주며 팀의 핵심 선수임을 알렸죠. (물론 나중에 번호가 바뀌었지만) 화려하지 않아 비교적 덜 알려진 그가 10번을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느낀 팬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딩크는 이을용 선수를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기용했습니다. 오히려 같은 왼쪽 측면 자원인 이영표 선수는 상황에 따라 중앙으로 이동하기도 했죠. (지금까지도 궁금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코너킥과 프리킥 등을 전담시켰죠. 소속 팀에서도 코너킥이나 프리킥은 거의 시도한 적이 없었기에 꽤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냥 시키기에 했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히딩크는 왼발 키커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대표팀 선수 중에는 왼발을 다룰 줄 아는 선수가 부족했고, 이을용 선수가 정확한 킥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그는 월드컵을 거치면서 왼발 킥 정확도가 무척 향상됐습니다. 페널티킥 실축도 있었지만, 이를 만회하는 긴 패스가 있었고 터키와의 3-4위전에서는 멋진 프리킥 골도 터트렸습니다. A매치 3득점 중 2골이 프리킥 골이었으니 얼마나 킥이 정확해졌는지 알 수 있죠. 정확한 킥까지 장착한 그는 완벽한 중앙 미드필더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에 다녀온 뒤에도 소속 팀에서 왼쪽 미드필더로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없었을 때 남기일 선수가 중앙에서 득점을 펑펑 터트리고 있었거든요. 두 선수를 다 살리는 길은 이을용 선수의 이동 밖에 답이 없었죠.

터키 트라브존스포르에서도 주로 비슷한 위치에서 뛰었는데, 터키에서의 첫 시즌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일단 개막이 임박해서 소속 팀에 합류한 것이 문제였죠. 월드컵을 치르고 휴식 없이 유럽에 가면서 몸이 무척 힘든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제 기량을 보여줄 수가 없었죠. 설상가상으로 부르사스포르와의 8라운드 경기를 마치고는 부상으로 4개월가량을 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휴식은 오히려 이을용 선수의 체력을 충전시키는 시간이 됐고 20라운드부터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을용 선수는 유럽 시즌이 끝나고 2003년 5월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이전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데, 미드필더 지역에서 거칠게 몸싸움을 시도하고 태클을 마구 날리는 등 터프한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서는(터키) 이렇게 안 뛰면 안 되더라.'라는 말을 하더군요. 유럽에서의 긴장감이 선수 성향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첫 번째 터키 생활은 한 시즌으로 짧게 끝났습니다. 부천에서 건너갈 당시 완전 이적인 줄 알았던 계약이 임대였던 까닭이었죠. (지금처럼 에이전트가 활성화됐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죠?)

그래서 이을용 선수는 부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양 유니폼을 입었고 2004/05시즌에 앞서 다시 트라브존으로 건너가 세뇰 귀네슈와 만났습니다. 그는 2006년 월드컵에 앞서 지난 월드컵과는 달리 제자리를 찾아 중원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특히 출정식이었던 보스니아와의 평가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역시 유럽파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죠.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부진했습니다.

터키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평가전을 가지고, 다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로 넘어가 훈련 캠프를 치르면서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진 게 화근이었죠. 현지에서 벌어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도 유일하게 경쟁력이 있었던 선수였지만 몸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이상저온이었던 글래스코에서 무더운 독일로 넘어가면서 몸살 증세까지 나타났다고 합니다. 결국 토고, 프랑스전에 연달아 교체 물러났고 마지막 스위스전에서는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월드컵에서의 부진은 소속 팀 결정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미 유럽에서 뛰고 있고 더구나 희소성이 있는 왼발잡이라 특히 프리미어 리그에서 관심을 나타냈지만, 월드컵에서 더 좋은 활약을 펼치면 몸값이 올라갈 것이라 믿고 계약을 하지 않았죠. 이을용 선수가 월드컵에서 부진하자 관심을 보인 클럽들은 발을 빼거나 몸값을 줄였습니다. 그는 그때 빅리그에 대한 꿈을 접고 K리그로 완전히 돌아오게 됐습니다.

서울과 강원 시절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니까요. 니폼니쉬 축구의 마지막 제자가 그라운드를 떠납니다. 이제 김기동 선수까지 은퇴한다면 니폼축구의 흔적은 더는 직접 느낄 수 없게 되겠죠. 이을용 선수는 니폼니쉬 감독이 만든 마지막 보물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1999년 타워호텔이 기억나네요. 꼭 좋은 지도자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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