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반가운 사람을 오랜 만에 만났습니다. 김학범 감독(51)입니다. 제가 한국 지도자 중 전술 전략적으로 가장 능하다고 평가하는 소수 감독 중 한분입니다. 김 감독은 얼마 전 중국프로축구 허난팀에서 경질됐습니다. 이유는 성적 부진이었죠. 8경기(3무5패) 동안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건 중국 언론보도, 팬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감독을 쫓아낸 것은 성질 급하고 참을성 없는 중국축구단이 한국 정상급 감독이 자신이 추구하는 축구를 제대로 꽃피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칼질을 한 거죠. 중국축구가 축구에 대한 철학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김감독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5개월이었습니다. 훌륭한 감독이 좋은 팀을 맡아도 감독의 철학과 지도력이 발휘되려면 최소한 2,3년은 필요합니다. 초반 성적이 좋지 않아도 감독이 능력이 있고 추구하는 축구가 올바르다고 판단해 그를 믿고 끝까지 지원한다면 그런 기다림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실을 맺는 거죠. 2시간 동안 김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옮겨봅니다.

-먼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감독을 그만뒀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죠. 공부와 배움이라는 건 끝이 없으니까요. 지금도 책도 보고 연구도 하는 등 축구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대학경기도 가끔 보러갑니다. 오는 9월 영국으로 건너가 P라이센스 보수교육도 받을 예정이고요. 활동량이 줄어드니까 살이 약간 쪘어요. 그래서 석촌호수가 한바퀴에 2500미터 정도 되는데 그걸 하루에 3바퀴씩 돕니다. 앞으로는 배낭 하나 메고 등산도 할 생각입니다."
-허난팀에서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경질된 것 같습니다."초반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많은 걸 바꾸면서 제대로 준비했는데 말이죠. 웨이트트레이닝장도 없어서 만들었고요, 선수들이 먹는 음식도 너무 형편없어서 영양식으로 바꿨습니다. 미니 골대도 하나 없는 등 턱없이 부족한 훈련기구도 구비했고요. 선수들의 체력도 65분용에서 80분용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중국언론에 따르면 허난이 지난해보다는 경기력에서는 많은 발전을 했다는 평가를 하던데요."허난은 수비만 하다가 역습을 골을 노리는 팀이었습니다. 중국축구협회 조사자료에 의하면 중국슈퍼리그팀 중에서 공이 PA안으로 도달되는 횟수가 가장 적은 팀이었고요. 그런 팀을 맡아 공격적으로 많이 바꿔놨어요. 올시즌 허난의 볼 점유율은 평균 63%였습니다. 그런데 골을 넣을 선수가 없어서 부진했던 거요. 용병을 모두 공격수로 뽑을 걸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배력에서 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페널티킥을 내주거나 골키퍼의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오면서 이길 경기를 비기거나 패한 거죠."
-중국은 보통 감독을 경질할 경우 구단과 언론이 합심을 해서 감독을 비난한 뒤 자릅니다. 그런데 허난 언론은 김감독에게 무척 관대한 것 같아요."제가 마지막 경기를 하는데 허난 방송국에서 중계를 했어요. 그리고 하프타임 15분 동안 저에 대한 스페셜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국말로 '잘 가세요. 김학범 감독'이라는 멘트까지 나왔고요. 나중에 알았는데 떠나는 감독을 위해 방송국이 스페셜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한 것은 제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초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제가 추구하고 있는 축구철학과 선수단을 이끄는 방향이 올바르다고 판단해준 거죠."
-서포터스도 김감독을 지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중국프로축구는 올해부터 2군리그를 합니다. 2군경기를 하는데 서포터스가 많이 봐서 경기를 봤어요. 그런데 우리는 졌습니다. 그 때 코치들은 서포터스쪽으로 가지 말고 피하라고 했죠.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포터스들에게 가서 뚜에이부치(미안하다)라고 했죠. 그런데 서포터스는 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메이꽌시(상관없어요)라고 소리치더군요. 선수들의 플레이가 좋아지고 있다는 걸 서포터스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선수들의 마인드도 많이 달라졌다면서요"처음 허난 선수들은 65분만 지나면 다리에 쥐가 났어요. 그런 선수들을 동계훈련을 통해 80분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도 만들었죠. 그리고 이전에 허난 선수들은 주말 휴가도 못나갔어요. 그런데 저는 주말마다 선수들을 내보냈고요. 무엇보다 중국 선수들은 포지션을 왜 지켜야하는지, 자기 위치에서 어떤 플레이를 해야하는지 잘 몰라요. 중구난방으로 뛰어다니는 선수가 많아요. 포지셔닝, 역할분담 등에 대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중국축구선수층은 무척 얇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한번 주전이면 영원한 주전이라고 생각해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아왔죠. 그런 선수들에게 축구를 열심히 해야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지루하지 않고 재밌고도 효율적인 훈련을 통해 축구를 하는 재미를 느끼게 하고 있었죠. 그리고 중국프로축구는 매년 바꿀 수 있는 선수 숫자가 5명으로 한정돼 있어요. 한팀에서 선수를 왕창 빼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죠. 그만큼 선수단을 개혁하고 바꾸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경질됐다고 생각하나요."글쎄요. 너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사람은 모기업 부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회장이 캐나다에 간 사이 회장이 저를 전격적으로 경질한 거죠. 그리고 이런 저런 소문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오기 전 허난을 맡은 감독이 선수들에게 패하라고 종용했다는 말도 들리고요. 오죽하면 허난 구단이 저를 경질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이전 코칭스태프를 다시 불러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겠어요. 그런데 그 감독이 얼마 전 수석코치로 왔어요.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죠.(지금 허난 감독은 본프레레 감독입니다. 그리고 허난는 지금 1승7무6패로 16개팀 중 14위에 랭크돼 있고요)"
-시진핑 등 중국고위층이 계속 축구에 대한 발언을 하고 있는 등 중국축구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중국프로축구 승부조작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이 구속됐죠. 그것도 시진핑의 지시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국 최고위층에서 축구판을 주시하고 있다는 거죠. 중국은 정부가 축구단 운영권을 지금 기업에게서 빼앗아 다른 기업에 줄 수 있습니다. 중국은 정부가 어느 정도 잇권을 기업에게 주고 그 기업이 혜택을 보는 대신 축구단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축구단 운영권리를 빼앗아 다른 기업을 넘긴다는 것은 정부가 그 기업에게 사업상 잇권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죠. 중국 축구가 긴장을 할 수밖에 없고요. 중국프로구단 예산이 지난해보다 평균 배로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죠."
-김감독이 조기 경질된 데에도 그런 것들도 영향을 미쳤겠네요."아마도 없지는 않았겠죠. 지금 중국프로구단들은 시진핑 앞에서 알아서 기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시진핑은 앞으로 중국의 국가수석이 될 지도자입니다. 축구단을 운영하는 기업들이 시진핑에게 찍히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중국은 인구가 많고 많은 종목에서 국제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데 왜 축구는 그렇지 못할까요."인구는 많지만 선수층이 너무 얇아요. 등록선수가 한국의 10분의 1도 안될 겁니다. 왜냐하면 중국에는 학교팀이 없기 때문이죠. 유소년 선수들이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은 프로구단 산하 유소년팀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17세, 19세팀 밖에 없습니다. 10세 전후 어린 아이들이 제대로 축구를 배우고 정기적으로 공식경기를 할 곳이 없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선수들이 축구를 늦게 배우기 시작하고 선수 숫자 자체가 부족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프로선수들의 의식도 안일합니다. 한번 주전은 영원한 주전이라고 생각해 노력을 하지 않는 거죠.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약할 수밖에 없고요. 그렇기 때문에 중국축구가 국제대회에서 부진한 거죠. 그러나 중국 정부가 만일 학교에 축구팀을 만들기로 한다면 중국축구는 엄청나게 성장하고 많이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 중국축구협회는 지금 좋은 지도자 만들기 5년짜리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어요. 그걸 위해서 한 축구계 고위층이 1억달러를 내놓기도 했고요."
-국내축구 이야기도 해보죠. 지금 K리그는 승부조작에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큰일입니다. 제가 알기에 모든 구단에 승부조작이 만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소위 명문팀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강력한 교육과 강한 징계를 통해서 이참에 뿌리를 확실하게 뽑아야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이런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거죠. 군대에서 사병 한명이 죽거나 사고를 치면 국방부 고위관계자, 상급부대 최고 간부들이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사병이 죽은 게 진짜 그분들 때문은 아니죠. 그래도 모든 걸 책임지는 최고위층으로서 도의적으로, 상징적으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거죠. 축구계에서도 선수 2명이 죽고 많은 선수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죠. 어떻게 보면 선수들만 불쌍해지는 겁니다."
-K리그 감독으로 복귀하는 걸 고려하고 계실 텐데요. 김감독은 국가대표 출신도 아니고 아직 축구계 비주류에 속하는 명지대학교 출신이라서 이른 바 '빽'도 없을 겁니다. 금방 팀을 맡지 못하면 축구계에서 쉽게 잊혀질 지도 모릅니다."상관없습니다. 앞으로 감독이 다시 된다고 해도 제 나이를 감안하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또 프로팀 감독 자리가 비웠다고 해서 이력서를 내고 로비를 하거나 애걸을 하지도 않을 거고요. 자연스럽게 저를 원하는 팀으로부터 제의를 받게 된다면 생각을 해볼 겁니다. 그러나 빨리 자리를 찾지 않으면 감독을 다시 하지 못할 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팀이나 맡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감독으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겠죠. 감독으로 복귀하지 못하면 많이 섭섭하고 아쉽겠지만 하는 수 없죠. 아직도 우리나라는 스타 출신의 지도자를 선호합니다. 스타 출신 지도자는 80%를 이뤄놓은 뒤 출발하는 거고 저같이 무명 선수 출신 지도자들은 0에서 시작하는 거죠. 출발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즉 저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100%에 도달할 수 있는 거죠. 우리나라도 이름값, 인기도가 아니라 실력으로 감독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승강제가 절실한 거죠. 승강제가 이뤄지면 실력 없는 지도자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고요. 2부리그에서 1부리그를 올려놓은 지도자가 있다면 그가 정말 훌륭한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거죠. 좋은 선수가 없는 팀을 지도하면서 1부리그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선수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팀의 조직을 잘 만들었다는 뜻이니까요."
-앞으로 계획을 설명해주세요."9월 영국에서 있는 P라이센스 보수 교육을 받을 겁니다. P라이센스를 받는다는 것은 최고 지도자 과정을 통과한 것과 같은 거죠. 최강희 감독, 최만희 감독 등도 함께 교육을 받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안익수 감독, 최진한 감독 등 몇몇이 안 될 겁니다.(김감독은 2005년 델파이 방법을 활용한 축구 훈련방법에 관한 내용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공부하는 학구파 지도자의 선두주자입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담배 좀 줄이세요."좀 쉬다보니까 몸무게가 늘었고 배도 나왔어요. 등산을 해서 몸관리를 좀 해야죠. 담배도 줄어야하는데 쉽지 않네요. 허난 감독으로 있을 때는 하루에 세갑을 피웠으니까요. 그 때 몸무게가 4킬로나 빠졌어요. 그리고 저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겨 마십니다. 담배도, 커피도 강한 걸 좋아하죠. 제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그렇지 만일 술까지 마셨다면 독주를 즐겼겠고 그랬다면 아마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겁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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