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1% 시대⑤흔들리는 연변자치주

'코리안머니'로 부자 자치주..가족해체 등 부작용
(옌지=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인 옌지(延吉)에서 가장 번화가인 옌지서(西)시장.
한글로 된 대형 간판이 빼곡히 들어찬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한국 땅을 밟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전혀 낯설지 않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의류가 실시간으로 공수되고 쇼핑을 즐기는 20대 젊은 여성들의 차림은 서울에서 유행하는 패션과 별반 차이가 없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로 한국행 노무 송출 길이 열린 이후 연변은 더는 낯선 이방인의 땅이 아니다. 해방과 더불어 40여년 간 지속했던 냉전 이데올로기로 단절됐던 장벽도 지금은 느낄 수 없다.
한중수교는 동북 변방의 낙후한 농업지대에 불과했던 연변을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확 바꿔놓았다. 한국에서 벌어 송금해 온 외화는 연변 경제를 발전시키고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
수교 이후 지난해까지 한국을 다녀간 조선족은 복수 방문자를 합쳐 23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들 상당수가 연변 출신이다.
◇ 연변 GDP 33%는 '코리안머니'
연변주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98년부터 10년 동안 연변 조선족이 해외 노무를 통해 벌어들인 외화는 62억8천만 달러에 달한다. 이 기간 연변주 재정 수입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연변 조선족이 벌어들이는 외화는 연간 10억달러를 넘어 연변주 GDP(국내총생산)의 33%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변주 농촌경제 수입액보다도 많은 액수다.
한국에서 유입된 외화는 연변을 중국 내 소수민족 자치지역 가운데 손꼽힐 만큼 부유한 자치지역으로 탈바꿈시켰다.
공장에서 일하다 정년퇴직했다는 옌지 주민 남(61)모씨는 "아내가 10년간 한국에 가서 일한 덕에 아파트 두 채를 장만했고 딸도 의대 대학원까지 졸업해 의사를 하고 있다"며 "한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돈 벌러 간 조선족이 한 집 건너 한 집꼴은 될 것"이라고 전했다.
◇ 연변 조선족 비율 36%로 급감
그러나 급격한 인구 유출은 연변 조선족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준 대신 적잖은 사회 문제를 야기시켰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가족 해체다. 옌지에서 해마다 평균 1천800쌍의 부부가 이혼하고 있으며 이혼의 주된 이유는 부부 한쪽이 오랜 한국생활을 하면서 생긴 부부간 불화 때문이라는 게 현지 사회학자들의 분석이다.
한국으로 떠나면서 부모와 헤어진 조선족 자녀 가운데 비행 청소년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변주 공안국이 관리하는 마약사범 3천여 명 가운데 미성년자가 66%에 달하고 있다.
한국이나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중국 동부연안이나 남방으로 떠나면서 연변자치주 지위도 흔들리고 있다. 1953년 첫 조사 당시 70.5%를 차지했던 연변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은 최근 36%까지 떨어졌다. 인구 수로는 80만 명에 불과하다.
지난해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내 티베트족이 10년 전보다 28만 명 증가, 자치구 내 전체 인구의 90.4%를 차지한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이농하면서 조선족들이 버린 연변자치주의 농토는 대부분 한족(漢族)이 차지했다. 농촌지역에서는 조선족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까지 됐다.
연변의 택시 기사 가운데 더는 조선족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한국인이나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 종업원 가운데도 한족이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해야 하는 조선족 가이드가 부족해 연변주 정부가 400여 명의 한족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가이드로 삼는 '고육지책'을 내놓는 형편이다. '연변에서는 중국어를 못해도 불편이 없다'는 말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
소수민족으로서 겪어야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에 자녀를 한족(漢族)과 결혼시키고 그 2세를 한족으로 호적에 올리거나 한족 학교에 보내는 '한족 동화' 현상도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학생 수 감소에 따라 통폐합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농촌에서 조선족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부모가 중국어 교육에 매달리면서 조선족 청소년 가운데는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족자치주' 지위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리룽시(李龍熙)연변주장은 지난해 3월 양회(兩會)에서 "연변자치주를 연변시로 전환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조선족 일각에서는 "중국에는 소수민족 자치구나 자치주는 있어도 자치시에 관한 규정은 없다"며 "연변시로의 전환이 조선족 자치주의 해체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 중국 전역 및 한국 잇는 한민족네트워크에 기대
그렇다고 연변 조선족의 미래가 암담한 것만은 아니다. 조선족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민족의 뿌리를 찾고, 인적 네트워크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박웅걸 중국 조선족기업가협회 비서장(사무국장)은 "올해 연변과 다롄(大連), 베이징, 상하이에 조선족기업가협회가 설립됐으며 동북3성에만 설립됐던 지회를 조만간 30개까지 늘릴 계획"이라며 "조선족의 상생과 협력, 2세들의 정체성 확립을 지원하는 구심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이나 대도시로 떠났던 젊은이들의 귀향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옌지의 피부미용실에서 일하는 김민정(26.여)씨는 "상하이와 광저우에서 4년여간 일하다 지난해 돌아왔다"며 "대도시보다 급여는 적지만 물가가 싸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저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변대 윤승현 교수는 "좋은 일자리만 있다면 한국이나 대도시로 떠난 젊은이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며 "한국 기업들이 전략적 차원에서 연변에 투자, 조선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조선족은 한국의 중국 진출 교두보 역할을 하는 훌륭한 지원군"이라며 "한국이 국제적인 한민족 인적 네트워크 강화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조선족을 중국 내 우수한 사회 구성원으로 육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pj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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