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이어짐)

도스 산토스는 초반부터 이렇게 타이밍 싸움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절대 급하게 카윈을 몰지 않았다. 흔히 산토스 하면 상대의 카운터를 두려워하지 않고 수사자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밀고 들어가는 걸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산토스는 상대의 펀치를 결코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절대로 대주면서 치고받는 타격전을 하는 선수가 아니다. 복싱의 아투로 가티나 종합격투기의 레오나르도 가르시아처럼 경기 후 승패에 상관없이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파이팅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카윈 전에서도 산토스는 카윈의 펀치는 절대 맞지 않고 계속 스피드와 타이밍을 이용해 때리기만 하겠다는 '이기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산토스가 라이트 단발을 날리고 뒤로 빠지는 장면이다. 격투기를 수련해 보면 오른손잡이의 경우 뒷손, 즉 오른손을 날린다는 게 생각보다 부담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뒷손을 날리는 순간, 그리고 날린 직후가 상대방 입장에서 받아 때리기 아주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 운영이 신중하거나, 소극적이거나, 아니면 아예 상대방과 주먹을 섞지 않고 아웃파이팅을 하고 싶어 하는 선수들은 100% 뒷손보다는 앞손에 의존한다. 오른손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몸을 뒤틀어야 하기에 자세가 전환되며 틈이 생기지만, 왼손은 원래 기본자세에서 큰 부담 없이 상대를 보며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K-1 챔피언 세미 슐트를 보라. 왼손 왼발로 먹고 살지 않나. 완벽한 찬스가 아니면 오른손은 아예 쓰지도 않는다. 복싱의 플로이드 메이웨더를 보라. 오른손 펀치는 오픈성이 굉장히 많고, 때린 후 방어를 늘 생각하기에 오른손에 체중을 절대 많이 싣지 않으며, 공격 직후엔 몸을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밸런스를 완벽히 유지해 놓는다.

(세미 슐트는 원래 왼손잡이기에 앞손 앞발의 위력이 더욱 강력하다.)
그래서 산토스는 UFC 헤비급 최고의 핵주먹을 자랑하는 카윈에게 오른손 사용을 최소화하고 왼손을 최대한 많이 활용했다. 오른손은 100% 타이밍이 왔을 때만 전광석화같이 날리고 사진에서처럼 뒤로 빠졌다. 지금은 한물갔지만 한때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칭호까지 들었던 로이 존스 주니어의 특기는 번개 같은 라이트 스트레이트였는데, 위에서 설명한 메이웨더처럼 존스 또한 라이트를 날린 직후 방어를 굉장히 중요시했다. 오른손을 날리는 동시에 인사이드를 점유한 후 레프트 훅을 날리는 마이크 타이슨 식의 인파이터들과는 달리, 존스는 상대가 절대 카운터가 나오지 못할 순간에만 그 공격을 던졌고 혹시 카운터가 나오더라도 절대 맞지 않을 위치에 본인의 머리를 옮겨 놓는 데 능했다. 그래서 전성기 시절 로이 존스 주니어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리다가 정면으로 상대 크로스에 걸리는 장면을 찾아보기란 아주 힘들다. 기술은 좀 달랐을지 몰라도 기본 원리에서는 산토스의 이날 움직임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된다.
계속 우위를 점하던 산토스는 1라운드 종료 딱 1분을 남기고 카윈을 본격적으로 몰기 시작한 후 다운까지 뺏어냈는데, 약 15초 동안 이어진 이 공방 속에 산토스 타격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계속 왼손 잽으로 카윈을 괴롭히던 산토스는 갑자기 왼손 훅을 날린 후 왼손 잽을 꽂아 넣었다. 2~3번 사진의 왼손 훅 모습을 보면 산토스의 팔 동작은 커 보이지만, 그의 왼발은 카윈 쪽으로 거의 들어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구르다시피 한 걸 알 수 있다. 들어가서 꽂아 넣으려는 레프트 훅이 아니라, 카윈을 놀라게 만들어 양쪽으로 문이 열리듯 커버링을 벌어지게 만들기 위한 훅인 것이다. 그리고는 벌어진 커버링 사이로 잽을 '퍽!'하고 집어넣은 것이다. 종합격투기 글러브는 복싱이나 킥복싱의 그것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이정도의 공간만 생겨도 충분히 스트레이트성 펀치를 정타로 찔러 넣을 수 있다.

당황한 카윈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산토스는 곧바로 오른손 펀치를 날리며 들어간다. 이전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이렇게 들어가는 타이밍을 잡는 산토스의 능력은 정말 귀신같다. '난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라이트 크로스로 받아 걸 생각을 하고 뒤로 빠지는 거야!' 혹은 '난 이번에는 진짜로 놀라서 뒤로 빠지는 거야. 네가 지금 들어오면 난 받아칠 수가 없어. 이미 밸런스를 잃었거든.' 이라고 말하면서 빠져주는 상대는 없다. 전자의 경우에 깊숙이 들어가면 카운터를 얻어맞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 들어가지 못하면 상대가 쉴 찬스를 내주고 마는 것이다. 산토스는 카윈이 잽에 얻어맞고 옆으로 도는 그 짧은 순간 피 냄새를 맡은 사자 마냥 앞으로 치고 들어갔다. 사진 2~3번에서 보면 그 순간 카윈이 레프트 카운터를 날리긴 했으나 이미 산토스의 머리는 라이트를 날리며 왼쪽으로 푹 숙여져 있는 게 눈에 띈다. 중, 근거리에서 펀치를 잘 때리는 선수들은 이렇게 펀치와 함께 머리가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상대 펀치를 그 위로 흘려버리거나, 맞더라도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펀치와 함께 머리를 따라서 못 움직이는 대표적인(?) 선수가 K-1의 폴 슬로윈스키다. 원래 킥커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유난히 이 방면에서는 재주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안면 펀치를 얻어맞고 KO를 당하는 경우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MMA에서는 스캇 스미스가 비슷한 예가 될 것이다.)
그 다음 5~6번 사진을 보면 산토스가 빠지는 동작이 나온다. 라이트를 치고 몸을 반대쪽으로 멀찍이 빼버리는 것이다. 본인의 오른쪽으로 멀찌감치 빠져 버렸기에, 따라오는 카윈의 펀치는 결코 닿지 않는다. 그러면서 7번 사진에서 레프트 훅을 날린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뭘까? 바로 산토스가 각을 만들어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류 타격가는 절대 정면에 서서 상대를 때리지 않는다. 옆으로 빠져서 사각을 만들어 친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상대의 시야에서 나는 사라지고, 나는 상대의 측면에서 마음 놓고 펀치를 날릴 수 있는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허리를 유연하게 흔들어야 하며, 발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산토스가 앞뒤로 빠지는 게 아니라 대각선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 순간에 그냥 뒤로 빠지면 상대방이 치고 들어오기가 쉽지만, 대각선으로 빠지면 상대가 들어오기 애매한 동시에, 본인은 라이트 스트레이트까지 측면에서 박아 넣을 수 있는 각도가 완성된다.

(이 '애매한 사각'을 만드는 최고수는 다름 아닌 마이크 타이슨이었다. 타이슨의 전성기 시절 영상을 보면 결코 정면에서 무모하게 펀치를 뻗지 않고 어떻게든 사각을 만들어서 때리는 모습 뿐 이다. 때리는 동시에 상대의 펀치는 흘려버리는, 즉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이룬다는 커스 다마토의 이상을 몸으로 구현해 냈다고 할 수 있겠다.)

들락날락하는 산토스의 움직임에 당황한 카윈은 얼른 정신을 추스르고 왼손 잽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카윈의 우직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 순간 산토스는 기다렸다는 듯 매서운 레프트 훅을 날린다. 아까 레프트 훅-잽 콤비네이션에서 나왔던 상대 커버링을 벌려 놓기 위한 레프트 훅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 방에 팍 보내려는 레프트 훅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이런 기술 하나하나를 적재적소에 꽂아 넣는 선수가 진짜 일류다. '레프트 잽이 들어올 때 받아버려야지.' 생각하며 레프트 훅을 날릴 때 상대가 빠른 원투로 치고 들어오면 오른손에 제대로 얻어터질 수 있다. 상대의 주먹이 헛주먹인지 진짜 주먹인지, 이번에 카운터를 한 번 걸 타이밍인지 뒤로 한 번 빠져 줄 타이밍인지 아는 게 일류 타격가라는 얘기인데, 산토스는 이날 그런 흐름들을 완벽히 읽고 있었다.

깜짝 놀란 카윈은 전진을 멈추고 뒤로 슬금슬금 빠진다. 또다시 피 냄새를 맡은 산토스가 다가와서 펀치를 날린다. 하지만 이 영리한 수사자 산토스는 그냥 단발로 타격을 날리지 않는다. 전사의 심장을 가진 카윈이 그 순간 받아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럴 때 일류 타격가들은 속여주고 얼러 줘서 상대 카운터 타격을 미리 끌어내든지, 상대 몸을 방어 태세로 얼어붙게 만들어 반격을 못하도록 만든 후 때린다. 2~3번 사진을 보면 산토스가 한번 왼손을 날릴 듯 귀신같이 페이크 모션을 주는 게 보인다. 그리고 4번 사진에서 레프트 훅을 날리는데, 이건 거의 훅이 아니라 두드리는 모션 정도다. 옆으로 한 번 '팡!'하고 빠르게 주고 벌어진 커버링 사이로 5번 사진에서처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재빨리 찔러 넣기 위한 동작이다. 그리고는 6~8번 사진에서 보듯 카윈의 반격을 경계해 또다시 뒤로 빠진다. 카윈은 한 마디로 속수무책이다.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얻어맞은 카윈이 오른쪽으로 돌자 산토스는 1번 사진에서 왼손 훅으로 그 길목을 막아준다. 상대가 좌우로 움직이는 길목을 능숙히 막아놓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마이크 타이슨이 오버랩된다. 레프트 훅에 걸려 길목이 막힌 카윈은 멈춰 서게 되고, 산토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라이트를 치고 들어간다. 그 다음 4~6번 사진을 보라. 위에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산토스의 몸이 완전히 사각으로 빠져 있지 않나. 이미 옆으로 쭉 빠져 있기에, 카윈의 펀치는 닿지 않고 산토스의 레프트 훅은 꽂히는 각도가 완성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카윈은 쓰러졌고 파운딩을 잔뜩 얻어맞고는 피범벅이 되어 버렸다. 그 후 2~3라운드에서 카윈은 남다른 투지를 보여 주긴 했지만, 타격에서는 산토스에게 몇 수 아래란 사실을 확인하며 패배의 쓴맛을 봐야 했다.

(1라운드가 끝난 후 코너로 돌아가는 카윈의 모습)
영상이 아닌 사진과 함께 설명을 드렸기에 이해가 어려운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날 산토스가 보여준 타격 동작들이 비록 휙휙 빠르게 지나가긴 했으나 그 순간순간 일류만이 가진 내공이 녹아 있다는 걸 꼭 격투팬들에게 자세히 설명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카윈과 달리 머리를 부지런히 흔들며 다양한 펀치와 함께 밀고 들어오는 챔피언 케인 벨라스케즈가 산토스와 맞붙는다면 과연 어떤 양상의 경기가 될까? 산토스는 카윈 전 때처럼 우월한 스피드와 스탭을 이용해 치고 빠질까? 아니면 수사자의 본능 그대로 치고받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두 사나이의 일전은 UFC 헤비급 역사상 가장 치열한 승부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때까지 남은 다섯 달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캄캄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