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뉴스] 우리는 왜 6월 항쟁을 기억해야 하나
[CBS 권영철 선임기자]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시원히 짚어 준다. [편집자 주]
6월 10일은 6월 항쟁 24주년 기념일이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물었더니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취재기자가 대학생들을 만나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6월 항쟁에 대해서 잊고 있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주변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금요일 아니냐?' 라거나 '그런 건 왜 물어보냐' 이런 반응들이었다. 6월 10일이 6월 항쟁 기념일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장년층들도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하다가' 6월 항쟁은기억하느냐?' 이렇게 물으면 '알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이후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날'이라고 답변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 주제를 우리는 '왜 6월 항쟁을 기억해야 하나?'로 정했다.
▶정부차원의 기념식을 비롯해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지 않나?
= 물론 다양한 기념식이 열리긴 한다. 제24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이 10일 오전 10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김황식 국무총리,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다. 기념식은 경과보고와 정성헌 이사장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 낭독과 김황식 국무총리가 '대통령 기념사'를 대독할 예정인데 지난 200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5회째 열리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10일 SNS 기습번개를 계획하고 있다. 6.10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6월 10일 6시 10분 SNS 친구 610명이 참가하는 행사다. 6월 민주항쟁계승사업회는 10일 낮 12시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대강당에서 함세웅 대표이사장과 김근상 대한성공회 전국의회장, 최민희 국민의 명령 집행위원장이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연다. 오늘 행사에는 영상물 '날자, 민주주의야' 상영, 노찾사의 기념공연과 '임을 향한 행진곡' 합창 등도 마련돼 있다.
오히려 지방에서 더 다채로운 행사가 예정돼 있다. 부산에서는 10시 24주년 기념식에 이어 11시 부산민주공원 추념의 장에서 '부산지역 6월 민주열사 합동추모제'가 열리며 오후 6시 30분에는 6월 민주항쟁 24주년 기념 학술 집담회가 열린다. 11일 오후 3시에는 송기인 신부와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참여하는 이야기 콘서트 '유월愛, 세대공감'이 열려 노래공연과 함께 각각 '민주 부산의 힘, 3040세대들에게', '갑시다! 행복의 나라로'라는 주제로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성남에서도 10일 오후 성남시가 주최하는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다. 그러나 10일자 신문을 보면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6월 항쟁 관련기사를 주요기사로 다루고 있지만 조선. 중앙. 동아 등 이른바 보수언론들은 6월 항쟁 관련 기사를 다루지 않거나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다.
▶6월 항쟁 기념일인 오늘 전국적으로 등록금 집회가 예정돼 있지 않나?
= 24년 전 오늘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던 6월 항쟁의 날이었지만 오늘은 '반값 등록금' 요구가 주요 화두가 되고 있다. 전국 40여개 대학에서 동맹휴학에 동참할 예정이며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는 시민단체와 정당 시회단체들까지 동참할 예정이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6월 항쟁을 기념하는 전국적인 행사가 열리지만 행사의 핵심은 '반값 등록금'에 맞춰져 있다.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등록금이 취업난-비정규직-늦어지는 결혼-저 출산으로 얽히는 구조적 악순환의 출발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24년 전의 6.10과 오늘의 6.10의 차이인 것이다.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왜 6월 항쟁을 기억해야 하는 거냐?'
= 6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었다. 물론 4.19나 5.18 등등 분수령이 많았지만 6월 항쟁은 군사독재와 싸워 이겼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은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독재에서 민주로 그리고 개발과 성장 중심에서 분배의 조화와 삶의 질을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분수령이었다. 물론 6월 항쟁이 미완의 혁명이라는 평가가 많다. 지금도 6월 항쟁은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민주주의를 제약했던 많은 악법이나 제도, 그 운용을 뒷받침했던 관행과 의식 그리고 사람에 대한 청산이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큰 사건이었다.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7년 발간된 '6월 항쟁을 기록한다'는 책 발간 기념사에서 "6월 항쟁은 다시는 이 나라에서 독재나 군사쿠데타가 불가능하도록 확고한 토대를 확립한 것"이라며 "4.19혁명, 5.18광주항쟁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금자탑이며 독재를 종식시킨 데 있어서 대미를 장식한 승리"라고 밝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낸 함세웅 신부는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5백만 명, 6월 이후 계속된 노동자투쟁까지 포함하면 연인원 1천만 명 이상이 참가했던 말 그대로범 국민적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었다"며 그해 6월 전국의 거리를 뒤덮었던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뜨거운 함성은 암울했던 80년대를 넘어 우리 민족에게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정의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나팔소리였다"고 정의했다.
현대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가 많고,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많지만 6월 항쟁은 국민 스스로 주인임을 자각하고 오랜 군사독재를 몰아낸 사건이므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날인 것이다. 그래야 4.19와 5.18, 6.10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잊지 않게 되는 것이다.
▶ 6월 항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거냐?
= 6월 항쟁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위키 백과에는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사전에는 "6월 항쟁은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기도 한 박용길 장로는 "6월 민주항쟁은 기념해야 하는 한때의'사건'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있는 한 영원히 계승해야 할 위대한 '정신'이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6월 항쟁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참가해 20여 일 동안 전개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지대 정대화 교수는 "6월 항쟁은 해방 후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했던 민주화와 그를 위한 모든 운동의 총체적인 종합이자 그 귀중한 성공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정의했다. 민주당 천정배 최고위원은 "6월 항쟁은 국민들이 직접 일어서 전두환군부 독재정권을 굴복시켜 민주주의를 회복한 역사적 사건"이라며 "이를 통해 우리 국민은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며 민주주의의 보루임을 확인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늘 깨닫고 행동해야만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도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조국 교수는 "6월 항쟁이 없었다면 현재 정도의 정치적 자유는 불가능하다"라고 평가했다.
▶6월 항쟁하면 기억나는 것이 넥타이 부대의 활약인데
= '넥타이 부대'를 6월 항쟁의 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넥타이 부대라는 말은 명동을 중심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직장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초기에는 '명동 넥타이 부대'라는 말이 있었다. 명동지역은 금융권의 본사가 밀집한 지역이어서 명동성당 농성과 함께 이들 금융권 직장인들의 가담이 큰 물줄기를 튼 것이다. 1987년 당시의 거리시위는 대학생들이 주도했다. 그러던 것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은폐조작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국적으로 넥타이를 맨 일반 직장인들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시위의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강경대응으로 일관하던 전두환 정권이 넥타이 부대의 등장으로 결국 6.29선언이라는 항복조치를 하게 됐던 것이다.
▶최루탄이 몇 발이나 사용됐나?
= 당시 언론보도를 찾아보면 6월 10일부터 6월 26일까지 17일 동안 35만발이 넘는 최루탄이 사용됐다고 한다. 하루 2만발 넘게 사용된 것이다. 24년 전 6월 항쟁 당시의 거리는 최루탄과 돌멩이, 화염병으로 자욱했다. 20여년이 지나 6월 항쟁을 쉽게 얘기하고 있고 그 열매를 따먹고 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백골단의 곤봉에 머리가 터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조직사건으로 고문으로 피해를 당한 민주투사가 한 둘이 아니었다. 6월 항쟁 당시를 취재했던 일본 교도통신 히라이 히사시씨는 "6월 항쟁은 '사망자'가 '생존자'를 이끈 투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히라이 씨가 말하는 사망자는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군과 시위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이한열 군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제 오늘 트위터에는 이한열 군의 최루탄 맞은 장면의 사진이 많이 리트윗되고 있다. 트위터에 올라온 글을 보면 6월 항쟁을 잊지 말자는 글들이 많다. 박용길 통일맞이 이사장이 말한 대로 "6월 민주항쟁은 기념해야 하는 한때의 '사건'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있는 한 영원히 계승해야 할 위대한 '정신'이어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bamboo4@cbs.co.kr
● '6월 항쟁' 이한열 열사 추모 기념사업회 출범
● 87년 뜨거웠던 부산의 6월…이제는 빛바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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