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6> 불면의 밤들

2011. 4. 1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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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은 공허 속으로 끊임없이 존재를 방출하는 것"

[세계일보]

잠이 건강을 목표로 삼는 근력운동은 아니지만 잠을 잘 자는 사람은 건강하다. 잠은 이성에 들린 광기와 야만성을 진정시키고, 흐트러진 생명 리듬을 바로 잡아주는 효과가 있다. 분명한 것은 삶의 질이 수면의 질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잠이 얕고 불규칙하다면 삶은 조잡하고 칙칙해지며, 잠이 깊고 규칙적이라면 삶은 평화롭고 화사해진다. 낮의 활동과 결과가 삶을 만들지만 그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드는 게 밤의 잠이다. 숙면에의 욕구는 세계의 안전성에 대한 신뢰와 하나로 겹쳐진다. 잠을 잘 자는 사람들은 안정된 인격과 편안한 심성을 갖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잠이 '후천적 능력'(빌 헤이스, '불면증과의 동침')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잠이 다섯 단계의 수면 주기로 나뉘고 밤잠을 자는 내내 수면 주기가 다양하게 변하면서 반복한다는 걸 알지 못한다. 사람은 렘수면(REM sleep) 중에 그날 있었던 여러 가지 기억을 정리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낮잠'. 고된 노동의 틈새에 단잠으로 피로를 푸는 모습이 평화롭다.

"렘수면 중 해마에 임시 저장된 기억을 뇌의 피질에 분산, 보관하는 것이다. 이때 불필요한 것을 버린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꿈을 다 기억하지 못할까? 그것은 해마에서 피질로 정보가 이동할 때 뇌의 기억을 관장하는 회로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기 때문이다."(이영돈, '마음')

렘수면 중에 뇌가 기억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꿈을 꾼다. 아울러 감정을 진정시킨다. 따라서 렘수면을 오래 박탈당한 사람은 기억력이 나빠지고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이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

잠에 관한 연구에서 렘수면의 발견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유진 아제린스키는 우연히 그 사실을 발견하고 1953년 9월4일자 '사이언스'에 관련 연구논문을 발표한다. 렘수면에 대한 연구로 수면이 항상적으로 똑같고 불변이 아니라는 것과, 꿈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꾼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제린스키는 사람들이 급속 안구 운동을 하는 주기에 깨어날 때 꿈을 자세히 기억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꿈을 잘 꾸는 수면 주기를 찾아낸다. 그게 바로 렘수면이다. 렘수면은 90분 주기로 반복하고, 그래서 하룻밤에도 여러 번에 걸쳐 꿈을 꾼다.

"렘수면 중인 성인의 신체는 소란스럽다. 심장 박동·호흡·혈압은 변덕스럽게 오르내리고, 남성은 발기하고 여성은 음핵이 확대되며, 뇌파는 연속 방출된다. 이런 신체 활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모든 운동 근육들은 마비돼 있다."(빌 헤이스, 앞의 책)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잠이 아니라 불면이다. 처음 찾아온 불면의 밤들을 대개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겪는다. 그런데 불연속적으로 찾아들고 그 빈도가 늘면서 이 하찮은 것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면의 밤들이 늘면서 몸은 차츰 무거워지고(만성피로증후군!)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불면은 존재의 잉여들을 남김없이 빼앗아가면서 의식은 조각조각 나고 삶은 내면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깨져버린다. 불면증 환자란 사실은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아니라 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다. 평생을 불면증과 싸워온 사람은 이렇게 고백한다.

"잠은 마치 천국 같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천국이기도 하다. 초기 인류는 잠자는 동안 영혼이 신체를 떠나 환상적인 장소들을 여행하고 그것이 꿈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고, 이는 영혼과 사후 세계의 존재성에 영감을 줬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천국은 영원한 환상적인 꿈과 같은 것이라 널리 여겨지고 있다. 지옥은 악몽인 동시에, 인페르노에서 단테가 상상을 펼쳤던 것처럼, 끝없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공간이다."(빌 헤이스, 앞의 책)

불면의 밤들이 숨기고 있는 메마름과 괴로움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취하던 그 달콤한 잠들이 축복이었음을 새삼스럽게 일깨운다. 불면의 밤을 겪기 전에는 잘 잔다는 것이 떠도는 존재를 이 세계 어딘가에 고정시켜 온갖 수고에서 우리 몸과 영혼을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삶을 온전하게 향유하는 데 꼭 필요한 활력과 역동성을 되돌려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했다.

잠잔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장소에 연루시키고, 그 장소를 신체와 현존의 일부로 승인했다는 표시다. 잠은 생리 심리학적으로 몸·영혼의 떠돎을 멈추고 하나의 장소를 부동성 속에서 존재의 기반으로 사유화하는 방식이다. "잠을 청하는 것, 그것은 암중모색 같은 것을 통해 이와 같은 접촉의 길을 찾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자는 껍질 속의 알처럼 그 자신의 부동성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기반 속에 버려져 있는 것은 동시에 잠을 구성하는 은신처를 제공한다. 잠을 통해 존재는 파괴되지 않고 중지된 채로 머문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잠은 모든 교육과 훈육의 고단함과 지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아울러 노동의 의무와 척박하고 위험한 세계 조건에서 우리를 끌어내서 안전한 피난처로 이끈다. 이 피난처에서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도구들을 놓고 생각으로 달궈진 의식을 쉬게 하며 그 무엇도 굳이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잠은 일과 생각과 기억에서 우리를 떼어내고 그것에서 달아나게 한다. 잠은 단절이자 중지이고, 망각이다. 마침내 잠이 우리 몸을 혼곤하게 덮친다. 잠은 존재의 안쪽에 휴식의 무늬들을 아로새기면서 몸과 영혼에게 달콤한 휴식을 수유(授乳)한다.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동안 그 장소 바깥 어디에도 나는 없다. 잠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이 세계 어디에도 부재한다. 잠은 그 부재에 대한 완벽한 알리바이다.

잠드는 것은 하나의 장소를 전유한다는 뜻이다. 잠들려는 사람은 잠들 곳을 차지해야 한다. 그곳이 자기 방이든, 누구의 다락방이든, 호텔의 침대든, 노숙자가 차지한 공원의 의자든, 잠들려는 사람은 장소를 찾아야 하고, 그 장소를 유일무이한 곳으로 수락해야 한다.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그 한 장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잠 못 이루는 자는 돌아눕고, 또 돌아누우면서 이 진정한 자리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그곳이 유일무이한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오로지 이 지점에서만 세상이 거대한 방황을 포기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블랑쇼, '문학의 공간', 여기서는 서동욱, '일상의 모험'에서 재인용)

잠든 장소는 우리가 두리번거리는 행위를 멈춘 곳이고 존재가 웅크리며 현전이 자기동일성으로 다시 출현하기까지 저를 숨기는 은신처이다. 잠은 존재가 어떤 장소와의 은밀한 공모를 했다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장소들은 존재함의 순간들을 끌어안으면서 자기 정립의 절대 조건으로 드러난다. 잠과 삶은 이 장소들 위에서 일어나는 순간의 사건들 그 자체다.

불면이란 무엇인가? 신체의 활동을 중지하고 이완되는 것에 대한 태만, 수면 리듬의 거부, 최종적으로는 잠의 가능성에 대한 태업이다. 잠의 가장자리에서 깨어 있는 존재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공회전을 계속한다. 불면은 공허 속으로 끊임없이 존재를 방출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이 다 불면인 건 아니다. 그냥 깨어 있음은, 롤랑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중립적 깨어남'(롤랑 바르트, '중립')이다. 잠에 들려는 욕망이 있는 한에서 또는 육체의 거부로 그 욕망이 좌절되는 한에서 깨어 있음은 불면이 된다. 잠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육체는 눈 뜨고 잘 수 없다는 한 가지 걱정으로 뻣뻣해진다.

"깨어 있음은 익명적인 것이다. 밤에, 불면 속에 나의 깨어 있는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는 것은 밤 자체이다. 그것은 깨어 있다. 이 익명적인 깨어 있음 속에서 나는 완전히 존재에 노출되어 있다. 이 깨어 있음 속에서, 나의 불면을 채우는 모든 사유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중지되지(고정되지) 않는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앞의 책)

이때 깨어 있음은 존재의 잉여성을 남김없이 존재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일이다. 그들은 공회전을 멈출 아무 수단도 갖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불면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란 잠을 못 자는 사람들이 아니라(당사자들은 잠을 못 잔다고 생각하지만) 질이 낮은 수면을 이어가는 사람이다. 그들은 짧게 끊어지면서 불연속으로 이어지는 얕은 잠을 잔다. 한마디로 잠을 찔끔거린다. 그들은 모자라는 잠을 보충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벅꾸벅 졸며 늘 질이 좋은 잠에 목말라 한다.

잠은 불면의 필요조건이다. 잠잔다는 것은 의식이 망각(이것은 의식의 은신처이다!)이라는 층위로 사라졌다가 다시 잠들기 이전의 의식으로 돌아오며 자기동일성을 얻는 과정이다. 잠은 의식이 출현하는 기반이고, 깨어 있는 의식이 삶에 선행하는 것이라면 그런 조건 안에서 사람은 잠들 수 있는 능력 그 자체다.

"잠이라는 내면, 하나의 절대 사적인 영역을 '기반'으로서 가지지 않고서는 인간은(또는 인간의식은) 도저히 탄생할 수 없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잠이라는 '비세계적' 내면을 본질로 가지고 있는 실체이다."(서동욱, 앞의 책)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고레고르 잠자는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제 몸을 보고 경악을 한다. 이 놀람은 자기동일성이 깨진 것에 대한 놀람이다. 잠들기 전의 자기, 혹은 의식이 아무 손상을 입지 않고 다시 동일한 상태로 깨어난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잠은 편안해진다. '변신'은 그런 예측가능한 세계의 기초적 토대가 깨진 상황을 제시한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는 이토록 예측불가능한 불안과 혼돈이 내재해 있다. 이런 세계에서 누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잠은 신뢰의 행위 자체"(롤랑 바르트, 앞의 책)이다. 그 믿음이 깨어졌다면 잠은 불신될 수밖에 없다. 그레고르는 "사람이란 잘 만큼은 자야 해"라며 여전히 잠에 매달리지만, 이미 세계에 대한 신뢰의 바탕은 깨진 상태다. 그가 겪는 고통은 곧 세계의 기반 자체가 물렁물렁해져서 더 이상 안전한 삶을 향유할 수 없게 된 자의 악몽이 낳은 고통이다.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세계에 대한 불신과 불요불급한 걱정들 때문에 잠의 입구에서 한없이 망설이며 서성거린다. 밤이 다 새도록.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빌 헤이스, '불면증과의 동침', 이지윤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8 ▲서동욱, '일상의 모험', 민음사, 2005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롤랑 바르트, '중립',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이영돈,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 마음', 예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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