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6> 정치'들'

2011. 3. 29.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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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생명 태어나자마자 국가권력의 메카니즘에 귀속돼정치와 무관한 삶은 불가능정치, 생명에 '인권' 부여해 보호…내버려진 인생들은 수용소로 보내국가의 본질적인 기능은 포획

[세계일보]

한 사람이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용케도 살아남아 무인도에 가 닿는다. 그는 무인도의 황량함과 적막함 속에서 모든 생물학적 필요를 스스로 발명하고 조달하며 혼자서 살아간다. 영국의 작가 대니얼 디포의 장편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에 나오는 이야기다. 1719년에 나온 이 소설의 원제는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이다. 과연 사람은 혼자 살 수 있을까?

◇정치에 관심이 있든 없든 우리는 언제나 정치'들' 속에서 숨을 쉬며 살아간다.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는 순간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생기며 정치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의지로 정치를 떠나거나 국가 권력에 의해 정치에서 배제된다고 해도 정치와는 떨어질 수 없다.세계일보 자료사진

무인도에 표착한 주인공은 배에서 식량·의류·무기를 가져오고, 살 집을 짓고, 염소를 기르며 거친 자연 속에서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28년 만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로빈슨 크루소의 삶은 상상으로나 가능하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그는 목소리라는 음성신호의 능력은 있으나 사람의 말은 잃어버린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오로지 동물로서의 생존만이 가능하다. 말이 없는 세계에서 그는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유명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말의 공유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말은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고 그 기반이다. 차라리 말은 정치행위를 이루는 성분 그 자체다. 본능으로 내지르는 소리나 외침이 아니라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고 드러내는 언어를 가진 생명체라는 기반 위에서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국가를 만든다. 그런 까닭에 말하는 존재 속에서 정치가 출현하고, 정치행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로 만든다.

사람은 '차이들'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살기 위해 정치공동체를 발명한다. 정치공동체는 그 '차이들'에서 비롯된 갈등들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관리·조정·타협·개량하려고 권력기구와 각종 위원회들을 만든다.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필요 없었지만 문명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치가 필요하다. 푸코라면 권력이라고 불렀을 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라면 욕망의 미시정치학이라고 불렀을 것을 나는 뭉뚱그려 정치'들'이라고 부른다. 정치'들'은 사회관계 속으로 스미고 몸을 관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의 절단면들이 덧나지 않게 하는 항생제로 작동한다. 정치는 현실을 만들어 도처에 흩뿌린다. 정치는 사람을 포획하고, 아울러 사람은 정치를 포획함으로써 현실을 생산하고 흩뿌린다. 사람은 정치 '안'에 있으면서 항상 자신을 정치 '밖'에 두려고 한다. 사람들은 정치적 삶에 포획되어 있으면서도 정치의 공백지대, 예외상태로 미끄러져 달아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정치'들' 속에서 숨 쉬며 산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정치에 관심이 있든 없든 정치'들'은 벌거벗은 생명에 관여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그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정치'들'에 포획당해 산다. 당신이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착각하는 것은 당신의 벌거벗은 생명에 관여하는 정치적인 것들이 은폐의 층위에 숨어 있는 까닭이다. 실은 아주 정교하게 발달한 정치 기술들은 우리를 감싸고 존재 내부로 스며든다. 미셸 푸코는 '앎에의 의지'에서 "근대적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이다"라고 적는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국가 권력의 메커니즘에 귀속되는데, 중요한 국가 자원으로 관리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 따위와 같은 형태의 식별 번호를 부여받는다. 갓난아기는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국가의 납세 자원, 노동 자원, 병역 자원으로 관리되는 것이다. 자기가 낳은 태아를 유기하거나 죽인 미혼모들이 처벌받는 것은 그들이 국가 자원에 손실을 입혔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은 태어나기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존재하는 것은 정치적인 다양한 체계들의 구속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그것은 곧 정치'들' 속으로 속절없이 붙잡혀 정치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권력의 규율적 통제 아래서만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을 부여받고 정치적 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푸코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우리의 생명이 정치에 포섭되는 동시에 거꾸로 정치 그 자체가 우리의 자연적 신체 속에서 포섭된다는 이중적 구속의 맥락에서 '생명정치'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내놓는다. 정치'들'은 벌거벗은 신체로 태어난 사람을 생명정치적 신체로 탈바꿈하는 과정이고, "정치라는 장소에서 '삶'이 가치 있는 삶으로 변형"(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하는 방식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은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이중적인 속성을 가진 것, 즉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이라고 말한다. 벌거벗은 생명은 법적·정치적 질서와 그 장치에서 미끄러져 나가며, 끝없이 다시 그것에로 귀속한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이 "국가 권력이 조직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장소"이고 국가 권력에 의해 작동되는 "규율화 과정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더 이상 정치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 즉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이라는 또 다른 과정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다"(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고 적는다.

정치의 발생론적 목적함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벌거벗은 생명의 보전이고(법으로 구현된 모든 정치에서는 살인을 금지한다), 삶의 쾌청함이며(모든 개별자에게 행복 추구의 권리를 보장한다),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삶의 부양에 있다(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금지한다). 그러나 정치는 분쟁이 있는 곳에서만 제 존재를 드러낸다. "정치가 의존하는 소여는 항상 분쟁적일 수밖에 없다"(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그밖에는 항상적으로 신체는 정치의 바깥, 즉 예외지대에 놓인다. 예외의 본질은 바깥으로 밀려남이다. 중요한 것은 밀려남, 즉 배제는 바로 그 배제로 인해 다시 규칙과의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예외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배제된 것은 바로 배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규칙과 완전히 무관해지지 않으며, 반대로 규칙의 정지라는 형태로 규칙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예외로부터 철수하는 가운데 예외에 적용된다."(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정치는 벌거벗은 생명에 '인권'이라는 옷을 입혀 그것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아무런 사회적 가치도 갖지 않은 생명을 살 가치가 있는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벌거벗은 생명에 입혔던 '인권'이라는 옷을 다시 벗긴다. 그 많은 수용소들은 '인권'이라는 옷이 벗겨진 채 벌거벗은 생명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히틀러가 만든 수용소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들이 그렇다.

1992년 10월 29일 밤, 나는 서울 외곽의 한 수용소(법이 정한 명명법에 따르면 구치소다)에서 벌거벗겨지는 경험을 한 바 있다. 한 필화사건의 종범으로 내 몸은 긴급하게 구금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당히 위험한 풍속 위반 사범이라는 혐의로 처벌받는 '정치적 신체'로 변신한다. 강제 구금 그 자체가 처벌이다. 그에 따라 자고 일어나는 것, 먹는 것, 운동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국가의 법이 정한 바에 따라야만 했다. 나는 비좁은 공간 속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갇힌 채 그들이 깨우는 시각에 일어나고, 그들이 정한 시간에 주는 밥을 먹고, 그들이 정한 시간에 나가 운동을 했다. 그들은 포승줄로 묶인 내 신체를 검찰청으로 소환하여 몇 가지를 묻고 다시 수용소로 되돌려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내버린 법을 준수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법을 향해 무력하게 내버려졌다. 장뤼크 낭시는 그것을 "주권자의 추방령에 넘겨진 존재"라고 말한다. 나는 그 수용소에서 내버려진 존재의 빈궁함을 온몸으로 겪었다. "내버려짐이란 이런저런 법원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법 그 자체이자 전체성으로서의 법 앞에 무조건 출두하라는 강제이다. 마찬가지로 ― 동일한 것이지만 ― 추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의 절대성 앞으로 불려 나온 추방된 자는 또한 법의 모든 판결 외부로 내버려진다."(낭시, '정언 명령', 여기서는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에서 재인용) 무엇이 무엇을 내버렸는가? 그때 내가 구금되어서 깨달은 것은 항상적으로 나는 존재자의 내버려진 존재로 살고 있었다는 것, 다만 그것이 일상에 의해 은폐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정치는 항상적으로 나를 감시하고, 나를 소환할 준비를 완료하고, 언제라도 나를 법의 모든 판결 외부로 내버릴 준비가 끝나 있었던 것이다. 국가-기계는 체포와 구금을 하고, 대량 살상 명령을 내리거나 그에 대한 사후 승인을 한다.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질서를 위한 권력기구와 그 규범들에 위임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바깥에 있는 국가-기계에 의해 생산되는 정치'들'이었다. 국가의 본질적인 기능은 포획이고, 나는 국가-기계라는 포획으로 그것의 내부에 지층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때 강제된 구금의 경험은 일종의 생명정치적 현상 중의 하나로 내가 잠재적으로는 추방된 자, 늑대 인간, 소각로에서 한 줌의 연기로 사라질 수도 있는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깨달음을 낳았다. 그 깨달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력했다. 그 무력함으로 나는 절망했다. 그 절망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국가-기계가 아니라(그것은 언제라도 정치'들'에 의해 끔찍한 폭력-기계로 탈바꿈할 수 있다) 나 자신의 약함과 강함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양심의 예민한 자각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함이고, 생명의 뜨거움으로 발현하는 나쁜 정치'들'에 대한 나의 능동적 저항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폴 패튼, '들뢰즈와 정치', 백민정 옮김, 태학사, 2005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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