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커튼 콜] '배우 복서' 이시영의 스승 홍수환 '인생 4전5기'

한현우 기자 hwhan@chosun.com 2011. 3. 2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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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고 싶나? 딱 1라운드만 더 뛰어봐"

홍수환(61)과 조개찜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30대 초반의 사내가 다가왔다. "선생님, 여기 사인 좀…." 히죽 웃으며 그가 덧붙였다. "제가 이시영씨 엄청 좋아하거든요." 사내는 웃으며 사인해주는 '선생님'이 '지옥에서 온 악마'를 때려눕혔던 사실을 아는 것일까.

지난 17일 탤런트 이시영(29)이 아마추어 복싱대회에서 우승할 때, 그녀 옆에 홍수환이 있었다. 한동안 그를 중계석이나 토크쇼, 혹은 가발 광고에서 봐온 터라 좀 어색하기도 했다.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고사성어를 '사전오기(四顚五起)'로 바꿔버린 이 남자를 서울 대치동 그의 체육관에서 만났다. 체육관엔 실전 링의 3분의 2 크기만 한 사각 링이 있었고, 샌드백 4개가 링을 에워싸고 있었다. 벽 한쪽에 붙은 공(gong)이 3분마다 자동으로 "땡!"하고 울렸다. 그때마다 운동하던 사람들은 잠시 쉬었고, 30초 뒤 또 공이 울리면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두 체급 세계챔피언이었던 홍수환은 이곳에서 지도자로서 다시 '인생 4전5기'에 도전하고 있다.

―이시영 선수의 트레이너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작년 6월쯤 시영이가 여길 왔어요. 처음 보니까 권투를 안 해도 될 몸인데 운동을 하더라고. 코치가 와서 '누군지 모르세요?' 하면서 탤런트래요. 딱 3개월 만에 생활체육인 대회 나가서 졌지요. 그리고 작년 11월 27일에 생활체육인 대회 우승, 그리고 지난달에 서울시 신인왕 먹고, 이번에 또 먹고. 사실 처음 진 시합도 진 게 아니에요. 그 심판들이 내 후배들인데 내가 다시는 안 본다고 했어요. 권투가 이렇게 어려울 때 스타 한번 만들어줘야지 말이야."

그는 타이틀 딴 것을 두고 여전히 '먹었다'고 표현했다. 1974년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꺾은 뒤 어머니와 연결된 국제전화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던 그다. 그때 홍수환의 어머니는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대답해 덩달아 스타가 됐다. 체육관 링 맞은편 벽에 '엄마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있었다.

―권투는 얼굴을 상하기 쉬워서 탤런트가 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별종이에요. 승부욕이 자기 얼굴보다 더 중요한 거죠. 짐승으로 보면 암사자 비슷해요. 보통 체육관 오는 사람들 절반쯤이 한 달도 못하고 그만둬요. 여자한테 2분짜리 4라운드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이시영은 언제까지 선수를 할 것 같나요.

"한국 여자복싱의 잔 다르크예요. 말 타고 지금 막 나타났다니까. 인기도 있고 씩씩하잖아요. 주먹이 좋아요. 남자가 볼 때 주먹이 좋으면 여자가 맞을 땐 타격이 심한 거죠. 2012년 런던올림픽 출전은 솔직히 내 욕심이고…. 시영이가 '선생님, 한번 하겠습니다' 하면 시킬 겁니다. 일단 올해 전국체전 나갈 수 있나 봐야죠."

'홍수환 스타복싱체육관'은 지난 2003년 서울 방배동에서 문을 열었다. 대치동으로 옮긴 것은 2006년 9월이다. 현재 이 체육관에는 IBF 페더급 동양챔피언 이재성(29) 선수가 소속돼 있다. 홍수환은 외부 강연이 없을 때는 늘 이곳에 나온다고 했다.

―강연을 많이 합니까.

"한 달에 열번은 합니다. 대기업, 관공서, 대학교…. 이번 주에도 두 개 있어요. 확실히 권투를 하고 강의를 하니까 하체가 견디더구먼. 복싱을 관두니까 복싱이 좋은 운동이란 걸 알았어요. 94년부터 강연을 다녔으니 17년째예요. 권투는 10년 했는데."

―강연 전에 예전 경기장면 비디오를 보여준다면서요.

"아놀드 테일러 경기, 카라스키야 경기 두 개를 보여줘요. 그러면 시들했던 사람들도 업(up)이 돼요."

그는 아놀드 테일러를 15회 판정승으로 꺾고 WBA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다. 3년 뒤인 77년 파나마에서 열린 헥토르 카라스키야와의 경기에서는 2회에서 네 번이나 다운당하고 3회 50초 만에 KO로 이겨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당시 생중계로 이 경기를 보던 국민들은 "챔피언 다시 한번 먹었고요. 대한국민 만셉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열광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당시 인터뷰 영상을 보면 "(카라스키야) 자식이 건방져서 꼭 이기려고 했습니다"라고 홍수환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라스키야와의 경기는 생생히 기억나겠죠.

"그럼요. 그때 사실은 중계가 무산될 뻔했어요. 당시 TBC(동양방송)가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김태호 선수의 타이틀전을 중계하고 그 다음 주에 파나마로 넘어와서 제 경기를 중계한다고 했는데, 김태호 선수가 챔피언인 사무엘 세라노한테 역전 KO패 했어요. 저까지 지면 2주 연속 지는 거니까 중계를 포기하려고 했었죠. 그런데 TBC 사장이던 홍진기씨가 중계하라고 시켰대요. 그리고 삼성 이병철 회장도 권투를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그때 만약 내가 졌으면 애꿎은 TBC 스포츠국장만 목이 날아갔을 거야."

―세 번 다운이면 넉아웃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게 바로 카라스키야가 건방지다는 거예요. 걔가 룰 미팅 때 무제한 다운으로 바꿨거든요. 카라스키야가 그때 만 17세로 나보다 열살이 어렸는데, 11전 11KO로 승승장구했어요. 나를 아주 보내버리려고 했던 거지. 그때 2라운드에 세 번째 다운 당하니까 관중석에서 허공에 총을 쏘고 난리가 났어요. KO로 끝난 줄 알고 말이죠."

홍수환은 지난 1999년 TV 제작진과 함께 파나마를 찾아 카라스키야와 20여년 만에 재회했다. 카라스키야는 홍수환에게 참패한 뒤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21세이던 1981년 은퇴했다. 홍수환은 "나를 이겼으면 오래갔을 텐데 아깝게 나한테 꺾인 것"이라며 "이후 파나마 샌 미구엘리토 시장까지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카라스키야전을 앞두고 도끼질로 훈련했다던데요.

"알폰소 사모라(멕시코 선수)한테 두 번 지고 나서 사모라한테 배운 거죠. 2m 넘는 통나무를 사다 놓고 매일 오른손으로 200번, 왼손 200번씩 도끼로 내리찍었어요. 이게 하체 훈련이 되더라고요. 양반다리하고 앉았다가 왼발로만 일어나게 되더라니까. 골프·야구·권투 전부 하체야, 하체. 그러니까 네 번 쓰러지고도 일어난 거예요."

―당시 트레이너는 누구였습니까.

"조순현 선생이었어요.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하더군요. 근육이 경직돼 있으면 주먹에 스피드가 안 붙어요. 그런데 힘 빼고 쫙 올리면 맞히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딱 붙어요. 이게 보통 센 게 아니에요. 내가 이시영이한테도 이걸 가르쳐줬지. 도끼질도 마찬가지예요. 힘만 가지고 하면 잘 안 된다니까."

―왜 사람들이 강연에서 옛날 경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요.

"권투가 인생하고 비슷하니까요. 체중 빼야죠, 상대방 매를 견뎌야죠. 내가 육육이 삼십육(6×6=36) 평방미터 링에서 아무리 맞아도 표현할 수도 없고 그로기 상태라고 내려올 수도 없고, 맞으면서도 상대에게 '그것밖에 안 되냐' 해야 되고…. 그런 링에서 내가 세계챔피언이 됐지만 진짜 링은 인생이더라, 링보다 인생이 더 무섭더라는 얘기를 하죠. 나처럼 평생 매 맞던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사는데 왜 포기하느냐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문을 열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뭔가 해보려고 나온 거 아닙니까. 포기하고 싶을 때 1회전 더 뛰어야죠."

―권투는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어릴 적 우리 집이 종로구 내수동 87번지였어요. 지금 서울경찰청 앞이죠. 그때 집 근처에 김준호(홍수환을 챔피언으로 만든 트레이너) 선생님이 사셨어요. 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김준호 선생님 경기를 보러 다녔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죠. 1966년에 김기수 선수가 벤베누티를 이기고 귀국 카퍼레이드를 하는데 아버지 생각이 나면서 권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68년에 지도자로 변신한 김준호 선생님을 찾아가 권투를 가르쳐달라고 한 거죠."

부친이 작고한 뒤 그의 모친은 미군부대에서 식당을 하며 홍수환을 키웠다. 어머니는 매일 미군부대에서 버터를 가져와 운동하는 아들에게 먹였다. 홍수환은 "빠다(버터) 두 덩어리를 밥에다 비벼 먹고 된장찌개에 넣어 먹고, 그때 미제 빠다 정말 맛있었다"며 "요즘 선수들처럼 고기 먹으며 운동했으면 세 체급 챔피언이 됐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처음 챔피언이 됐을 때는 군 복무 중이었죠.

"일등병이었죠. 동양챔피언 된 다음에 입대했거든요. 근데 테일러가 나를 지명방어전 도전자로 부른 거예요. 군인이지만 반공교육 받고 남아공으로 갔죠.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권투를 좋아했었습니다."

―챔피언이 된 뒤 청와대에도 갔었죠.

"그게 74년 7월 18일인데, 한 달 뒤인 8월 15일에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국가에서 나한테 체육관 차려주겠다고 한 약속이 다 물거품이 됐어요. 김기수 선수, 레슬링의 김일, 장영철 선수 모두 나라에서 체육관을 받았는데 나만 못 받았어요."

―77년에 카라스키야를 이기고는 청와대에 안 갔습니까.

"못 갔죠. 그땐 뭐 차지철 세상이었으니까."

홍수환은 2003년에 낸 책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에서 아놀드 테일러와의 경기에 얽힌 일화를 자세히 소개했다. 당시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라곤 "아놀드 테일러가 로메오 아나야를 쓰러뜨렸다"는 신문기사 스크랩 한 장뿐이었다고 했다. 경기 전날 '테일러와 다투고 헤어진 전 트레이너'라는 사람이 홍수환의 호텔 방에 찾아와 말했다. "테일러가 괘씸해서 알려주는데, 그 녀석의 장기는 스트레이트니까 계속 움직여요. 계속 움직이면 당신이 이길 거요." 실제로 계체량 때 처음 만난 테일러는 키가 홍수환보다 크고 리치가 길었다. 홍수환은 "계속 움직이며 파고들어야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경기를 앞두고 찾아온 교포와 술을 마셨다면서요.

"외항선원이었어요. 경기 전전날 조니워커 블랙 한 병을 갖고 와서 '꼭 한 잔만 따라주고 싶다'고 해요. 계속 거절할 수 없어서 한 잔 받았는데, 결국 둘이 다 마셨죠."

―경기를 앞두고 술을 마시면 안 되잖습니까.

"그 사람은 내 경기를 못 보고 배를 타야 한댔어요. 결국 푹 자고 다음날 컨디션이 좋아졌으니 나쁘지도 않았지. 하여튼 챔피언 되고 처음 축하전보 쳐준 사람이 그 외항선원이에요. 두 번째 전보는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 세 번째가 김종필 국무총리."

―요즘도 술 많이 합니까.

"96년부터 교회에 다니는데 그때부터 안 마셔요."

홍수환은 동생이 목사로 있는 경기도 구리의 교회에 다닌다. 그의 동생은 한때 가수로도 활동했던 홍수철(54)이다.

―남아공에서 테일러를 이길 때도 대단했었죠.

"그때도 부부젤라가 있었어요. 굉장히 시끄러웠죠. 그런데 흑인들이 다 나를 응원하는 거예요. '야호시 맘바(최강자)! 야호시 맘바!' 하면서요. 유색인종 선수가 와서 백인 챔피언을 때려눕히니까 나를 응원했던 거죠."

―그리고 나서 사모라한테 두 번 연속으로 KO패 당했죠.

"첫 번째 경기는 솔직히 심판 때문에 졌다고 생각도 했지만…. 누구 탓을 할 수가 없어요. 도전자는 비겨도 진 거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사모라를 이겨서 챔피언 빼앗았으면 주니어 페더급으로 한 체급 올리지도 않았고, 그러면 4전5기도 없는 거죠. 내가 가장 비참하게 졌을 때 4전5기의 씨앗을 뿌린 거예요." 사모라는 역시 멕시코 선수 카를로스 사라테에게 참패하고 은퇴한 뒤 멕시코에서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더라고 했다.

―권투에도 '손맛'이란 게 있습니까.

"야구로 치면 홈런 칠 때 공이 수박만 하게 보이는, 그런 게 있죠.(주먹 쥐어 검지와 중지 밑 돌출부위를 가리키며) 요 부분이 관자놀이에 딱 걸리면 장사가 없어요. 거기를 정확히 때리면 손에 통증이 하나도 없지. 그러니까 가드도 늘 관자놀이에 있는 거예요."

―사인할 때 '챔피언'이 아니라 '참피온'이라고 쓰던데요.

"참고, 피하고, 온순하라는 거죠. 인내할 줄 알고 나쁜 걸 피하고, 싸움에 휘말리지 말자는 거예요."

―사사로운 싸움에 휘말린 적이 없습니까.

"권투에 입문한 뒤 링 밖에서는 안 싸웠어요. 실제로 권투를 6개월 정도 배우면 누구한테 맞지 않아요. 눈이 빠르니까. 검도선수보다 복싱선수 눈이 더 빨라요. 챔피언일 때 어떤 사람이 체육관에 와서 산에서 도를 닦았다며 한번 붙자고 해요. 한 서른두엇 됐을까. 그때 트레이너 선생님이 '저기 연습하는 애하고 스파링해서 이기면 수환이하고 붙으시오' 했죠. 그래서 임동래라는 선수하고 그 남자가 붙었는데, 한 30초 만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쓰러지더라고. 아주 사람 잡는 줄 알았어요."

홍수환은 그러나 링 밖에서 휘두른 폭력이 문제가 되어 선수생활을 접게 된다. 1978년 리카르도 카르도나에게 TKO로 타이틀을 빼앗긴 뒤 인기가수 옥희(본명 김광숙·58)를 때려 중상을 입힌 것이다. 당시 홍수환은 전처와 별거 중이면서 옥희와 사실혼 관계였다. 그는 이후 80년 12월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인 염동균과의 경기를 치르고 은퇴할 때까지 한국권투위원회로부터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었다.

―그때가 인생 최악의 시기였습니까.

"그렇죠. 매스컴에서는 좋은 기삿거리였죠. 둘 다 유명했잖아요. 옥희는 가수고 나는 선수니까. 카라스키야한테 네 번 다운당한 것도 내 인생의 다운이고, 옥희씨와의 스캔들도 다운이고, 그 뒤에 미국에서 고생한 것도 다운이고…."

―미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전처 가족들이 모두 살고 있는 알래스카로 가서 고생 많이 했죠. 택시 운전도 하고 티셔츠 장사, 신발 장사도 하고. LA로 이사해서는 자동차 세일즈를 했는데 그때는 돈도 꽤 벌었어요."

그는 말을 아꼈으나 홍수환은 미국에서 접시닦이부터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택시 운전을 하던 중 단골이던 미국인 손님의 '서류 심부름'을 갔다가 봉투에서 마약이 나오는 바람에 마약운반책으로 몰려 한 달간 수감된 적도 있다. 물론 무죄로 풀려났다.

―그렇게 헤어졌던 옥희씨와 어떻게 다시 결합했습니까.

"때리고 헤어진 게 미안하잖아요. 미국의 전처와 정식이혼하고 한국 돌아와서 한 번 만났다가 서로 통한 거죠."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는 책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나는 펀치력이 약해요. 50전 41승 14KO란 성적이 말해주죠. 그런데 주먹이 센 놈은 턱이 약해. 주먹이 약한 놈은 맷집이 좋고. 그게 인생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누구나 통뼈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누구나 한방은 갖고 있어요. 다만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해야 돼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서는 한방이 나올 수 없어. 이시영이가 우승한 것도 한 방이 있는 거예요."

―한국 권투가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좋은 프로선수가 나와야 해요. 요즘 선수들 아침에 안 뛰어요. 아침에 안 뛰면 2회전 이상 뛰기가 힘들어요. 시합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시영이 때문에 요즘 체육관이 얼마나 잘 됩니까. 내가 챔피언 때는 나 하나 때문에 한국 체육관들이 다 먹고 살았어요. 박종팔 선수 알죠? 박종팔 1차 방어전 파이트머니가 당시 프로야구 장명부 투수 연봉하고 똑같았어요. 한 사람 힘이 그렇게 큰 게 권투예요. 좋은 프로모터, 선수, 매니저가 한 몸이 돼서 '물건'을 만들어야 돼요. 아직도 권투 하면 홍수환이라는데, 그게 발전이 없는 거예요. 홍수환은 벌써 잊혔어야 하는 데 말이지."

그가 체육관 벽에 걸린 액자 속 글귀 '왼손으로 세계를 제패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권투선수한테는 왼손이 앞손이에요. 앞이 안 맞는데 뒤가 맞겠어요? 평상시에 왼손 잽으로 일을 열심히 해야 기회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오른손으로 때리는 거지. 권투하고 인생하고 똑같다니까."

―인생을 카라스키야와의 3회전에 비유한다면 지금 몇회쯤입니까.

"아직 2회전이에요. 지금도 넘어지고 맞고 쓰러져요. 은퇴하고 미국 갔을 때는 오히려 1회전이었어요. 나는 75년 3월 15일 사모라한테 깨진 날을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아직 3회전이 오지 않았어. 우리 체육관에서 세계챔피언이 나오면 내가 또 한 번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는 셈이지. 그게 3회전이고 내 꿈이에요."

홍수환과 헤어지며 그의 책에 사인을 부탁했다. 그는 "참피온 홍수환"이라고 쓰더니 그 밑에 "Just One More Round!(1회전만 더)라고 썼다. "우리 김준호 선생님이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에요. 카라스키야하고 싸울 때 그 한 라운드를 더 뛰는 바람에 30년을 먹고 살잖아." 챔피언이 왼손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 씩 웃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란 유명한 대사로 챔피언이 된것을 전 국민에게 알리며 한시대를 풍미했던 복서 홍수환. 그를 만나 지도자로써의 생활과 복서시절 에피소드들을 들어봤다.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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