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를 위하여 - 박경리와 최인훈

2010. 11. 1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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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윤식의 문화산책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국민 가수 이미자씨의 노래 한 대목. 가시가 많으며 작은 잎은 길둥근 모양에 톱니가 있고 또 솜털이 있다는 것. 5월에 짙은 붉은 색 꽃이 피고, 8월엔 황적색의 열매를 맺으며 바닷가 모래땅이나 산기슭에 자라며, 우리나라와 일본, 사할린, 만주, 캄차카 반도에 분포한다는 것. 사전에 적힌 이 꽃의 첫 번째 특징에 주목할 것이오. 왈 가시가 많다는 것.

이 나라 최고 소설로 꼽히는 <토지>(박경리, 1994)는 1897년(대한제국 원년) 추석에서 비롯해, 8·15 해방으로 끝나오. 역사는 최참판 댁을 여지없이 휩쓸었고 그 역사의 종언이 8·15이오. 그 종언을 작가는 다만 이렇게 적었소.

"서희는 투명하고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해당화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라고. 생각건대, 필시 최서희의 손바닥엔 피가 낭자하지 않았을까. 심한 통증도 잇따랐을 터. 이에 대해 작가는 냉담했소. 한마디 언급도 없었으니까.

이 결말 장면 탓이었을까. 해당화를 대할 적마다 가슴이 베인 듯한 섬뜩함을 물리치기 어려웠소. 바이칼 주변에서도 그러했고 용유도 갯가에서도 그러했소. 그래도 그럭저럭 견디어 왔소. 현실의 해당화는 실물이니까. 실물인지라 냄새도, 빛깔을 볼 수도, 또 만져볼 수도 있으니까. 곧 가시에 찔려 통증도, 피도 흘려볼 수 있고, 또 사람들을 향해 "여기 해당화가 있다"라고 외칠 수조차 있었으니까.

그러나 저 <토지>에서처럼 작품이라면 어떠할까.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소. 최서희가 모시 치마저고리 입고 또 해당화 가지 휘어잡았음에 그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가문을 위해 두 자식까지 최씨이기를 실천한 최서희가 해당화 가지 휘어잡기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 단호함이야말로 창작의 위대함이 아닐 것인가.

그대는 혹시 무대 위에서 <달아 달아 밝은 달아>(최인훈, 1978)를 보셨는가. 염치도 없이 딸을 팔아 눈을 뜨고자 한 못난 아비가 있었소. 황해도 황주군 도화동의 심학규. 고려 중기쯤(채만식)이었을까, 아편전쟁쯤(황석영)이었을까. 최인훈은 임진왜란 때라 했소. 중국 기루에 팔린 딸을 구해준 것은 불교도 연꽃도 용궁도 아니고 교포 인삼장수 김 서방. 그런데 귀국 도중 왜적 떼를 만났고,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노파가 되어 귀국한 이 딸 좀 보소.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달 밝은 밤 용궁 갔다온 얘기를 들려주고 있소. 그야말로 허황한 얘기. 여기에다 작가는 천금의 무게를 달았소. 딸을 흥정하는 장사치 세계의 도입이 그것.

"(매파) 조선서 온 꽃이오. (손님) 조선? (매파) 조선나라 도화동 포구에 고이고이 피어 있던 한 떨기 해당화. 눈덩이 같은 해당화 꽃이랍니다."

심청전 하면 으레 연꽃, 용궁, 천상, 불교, 구원의 세계. 채만식, 황석영, 윤이상의 경우도 마찬가지. 어째서 최인훈은 극력 연꽃을 물리쳤을까. 작가는 산문을 쓰고자 했으니까. 현실 그것 말이외다. 희곡도 이 작가에겐 산문이었으니까.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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