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6〉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2010. 11. 9.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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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유목민적 지식인

읽은 책마다 번호를 매겨서 목록을 만들었던 사람, 어디에도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 지식인으로 멸종해가는 종족에 속했던 사람, 거리·길·미로·아케이드에 대해 끊임없이 몽상하고 사유했던 사람, 언젠가 '시온'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히브리어를 배우던 사람, 존재의 안쪽에 유대인이라는 각인을 새기고 산 사람, 그가 바로 발터 벤야민(1892∼1940)이다. 벤야민은 국립도서관 열람실 의자에 하루 아홉 시간씩 앉아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곤 했다. 누구보다도 더 열광적인 독서광이었던, 파리의 골상학자라고 불러도 좋은 이 천재 에세이스트가 만든 상상의 지리학에서 그는 언제나 길을 잃는 몽상에 빠져든다.

그는 파리를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파리의 거리를 걷는 걸 좋아했다. 그가 파리를 좋아한 것은 그 도시가 헤매는 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파리를 사랑했기에 파리의 모든 장소들에 있기를 소망했다. "어떤 장소를 알려면 가능한 한 많은 차원에서 경험해보아야 한다. 어떤 장소를 이해하려면 동서남북에서 다가가 보아야 하며, 동서남북으로 떠나가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채 그곳을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우연히 가게 된다."(발터 벤야민)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약간의 우울증의 기질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토성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현의 행성."(발터 벤야민) 그는 생애 거의 전부를 무능한 고학력 실업자로 살았는데, 그 이유 역시 토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비극의 기원'에서 토성이 자기를 "무감각하고, 우유분단하고, 둔감하게" 만든다고 했다.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기질은 분명히 사회적 생존에 열등한 기질이다. 벤야민은 자신이 타고난 별자리를 빌미삼아 그 열등함에 기꺼이 안주했다. 벤야민은 흔히 사람들에게 '슬픈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벤야민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는 현대성이란 사나운 짐승을 낳은 부정한 자궁이다. 그가 파리에서 읽어낸 것은 현재성의 감각이다. 파리는 지금의 현존과 갖가지 유행, 소비주의와 소유에의 갈망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버무려져 균질하지 않게 체현된 광기가 공존하는 장소였다. 이때 현재성의 감각은 과거에서 뻗쳐 나온 것이고, 모든 과거들은 뿌리에서 부피를 이루며, 잎과 열매라는 형식을 선취해서는 은폐적 차원에서 비은폐적 차원으로, 돌연 지금의 현존으로 도약한다. 이 현재성의 감각을 물리적으로 체현해낸 게 바로 파리의 파사주(passages)였다. 파사주, 즉 아케이드는 "도시의 이성적 구조를 비이성적 미로로, 터널들을 잇는 악몽으로, 그리고 영혼이 붕괴될 때 정점에 이르는 소용돌이로 만들어버렸다."(제이 파리니,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 아케이드는 밖이며 안이고, 집이며 거리인 곳이다. 비나 눈과 같은 날씨 변화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아케이드는 유리로 뒤덮인 무수한 미로들을 품고 있는 통로가 아닌가!

베를린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벤야민의 사상적 편력은 꽤나 복잡하다. 그의 정치적 신념과 예술철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젖줄을 물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와 활발하게 소통하며 정치적 삶의 가능성을 급진적 공산주의에 찾으려고 하고(정작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읽지 않았다!), 하이데거와도 사상적 혈연관계를 이루며 뼈대를 만들고 몸집을 부풀린다. 문학, 정치, 영화, 미술, 철학 어느 하나에 고착하지 않고 그것들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중심을 현대성의 의미를 건져낸다. 철학과 시를 뒤섞고, 정치와 형이상학, 신학과 유물론이라는 재료들을 비비면서 독자적인 사유의 세계를 펼쳐나간 그는 프랑크푸르트대학교수를 지원했다가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와 함께 교수직을 거절당한 이후로 유목민적 지식인으로 어떤 소속도 없이 떠돌다 죽었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1940년 나치의 점령지가 된 파리에서 원고뭉치로 가득 찬 트렁크를 들고 피레네 산맥을 거쳐 국경을 넘으려고 했다. 망명의 최종목적지는 미국이었다. 국경 통과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모르핀으로 음독을 시도한다.

벤야민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신상품, 패션, 유행, 건축, 테크놀로지들이다. 그는 파리에 강박적 매혹을 느꼈는데, 그것은 파리가 모든 것들을 갖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사시사철 현대성이라는 비[雨]가 내리고, 현대성이라는 눈[芽] 이 날마다 수태되는 곳이다. 파리는 그의 댄디즘을 숙성시키고, 현대성의 사유를 펼쳐나가기에 적당한 도시였다. 꿈의 건축물들, 거리, 군중, 산책자, 상품, 패션, 유행 그 모든 것에 덧씌워진 자본주의의 아우라에 취한 그는 파리의 모든 것, 거기에 현시된 현대성을 탐식하며 골상학적 독해를 담은 대기획 '파사젠베르크'를 진행시킨다. 그가 단지 도시의 외관, 즉 아케이드, 그리고 물신화된 상품에 현시된 시각적 매혹에 따라 춤춘 광대는 아니다. 외관 너머의 심연, 그렇다, 그는 외관이 아니라 심연의 탐욕스러운 포식자다. 때이른 죽음으로 파리에 대한, 파리를 위한 철학적 대기획은 미완으로 그치고, 남은 것은 지식 유목민의, 변화하는 20세기 사회와 문화지형에 대한 사유의 균열과 협로, 포식의 흔적들뿐이다.

벤야민의 거의 모든 저작물들이 번역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책의 부피가 부담스럽다면 '일방통행로'를 권유하겠다. '일방통행로'는 장르가 모호하다. 철학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혹은 철학이면서 에세이인 단상들, 사유의 큰 고갱이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의 집합체다. 빛, 공기, 투과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은 글쓰기, 비평, 책, 인용, 텍스트에 대한 집요한 사유, 그리고 스쳐가는 것들, 즉 주유소, 아침식당, 전몰 용사기념비, 화재경보기, 여행 기념품, 안경점, 외래 환자 진료소, 세놓음, 재단장을 위해 폐업함!, 마권 판매소…. 등의 제목을 달고 소단위 사유체의 점들을 찍어나간다. 이 점들에 붙은 표제와 본문의 사유는 어긋나기 일쑤다. 이를테면 '주유소'라는 제목에서는 엉뚱하게도 참된 문학 활동은 유식한 제스처들로 가득 찬 '저서'보다는 공동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단지, 팸플릿, 신문기사, 플래카드가 더 유용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왜냐하면 "기민한 언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런 식의 엇박자는 계속된다. '알리는 말씀:우리 모두 산림을 보호합시다'에서는 "주석과 번역이 텍스트와 맺고 있는 관계는 양식과 모방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도무지 이해불가, 요령부득하다. 하나의 대상, 혹은 현상도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얘긴가? 그 다음 이어지는 얘기는 더욱 혼돈에 빠져들게 한다. 벤야민은 느닷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얘기를 꺼낸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제 연인의 보편적 아름다움보다 결점, 변덕,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빠진 옷, 비뚤어진 걸음걸이에 더 집착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미완의 책 '파사젠베르크'는 무수한 인용들로 이루어진 바벨탑이다. 자료들의 인용과 차용이 없다면 '파사젠베르크'의 부피는 형편없이 쪼그라들 것이다. 인용은 차이들을 횡단하며 전복적 사유를 즐기는 그의 몽타주적 글쓰기에 대단히 유용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인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 글 속의 인용문들은 노상강도 같아서 무장한 채 불쑥 튀어나와 여유롭게 걷고 있는 자에게서 확신을 빼앗아버린다."('잡화') 몽테뉴와 루소의 정신적인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 퇴행하는 사유의 흐름을 뒤집고 경이를 일으키는 인용이 노상강도, 삽입성교에 비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쯤에서 우리는 이 책의 부제가 왜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인가를 돌이켜 생각해봐야 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1, 2',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6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7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홍한별 옮김, 시울, 2005

●제이 파리니,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 전혜림 옮김, 솔, 2010

●게르숌 숄렘, '한 우정의 역사 :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 최성만 옮김, 한길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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