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3>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삶의 반쪽
태어날 때 타인의 고통을 빌리지만 죽을 때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저 혼자 죽는 게 사람이다. 태어나는 시각은 곧 죽음의 시작이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시간은 우회를 모르는 직선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액체 환경(양수로 가득 찬 자궁)에서 기체 환경(공기로 가득 찬 대지)으로 삶의 조건이 바뀌면서 우리는 곧 바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간다. 신생아의 분당 심장 박동수는 120회인데, 그것이 죽음을 향한 카운트라는 걸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제가 죽는 존재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바쁘게 살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 사람이 생겨난 것은 25만년 전부터다. 그동안 900억명이 살다 죽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이 초파리나 도롱뇽이나 열대어가 아니라 문자를 읽고 쓰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증거다. 당신은 11월에 가장 빠르게 자라고 7월에 가장 느리게 자라는 손톱 열 개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99%다. 이미 죽은 900억명이 아니라 살아 있는 65억명 중에 포함된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삶조차 몇십년 유예된 죽음이다.
◇죽음을 외면하거나 희미하게 하고 그 자리에 불멸의 존재라는 허망한 믿음을 들여 앉히는 것은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다. 사진은 호상놀이 한 장면.세계일보 자료사진 |
저 북유럽의 한 철학자는 죽음에 붙잡혀 있는 삶을 이렇게 간명하게 표현한다.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쇼펜하우어, 여기서는 데이비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재인용)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기특하게도 사람만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 언젠가 닥칠 죽음을 자각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죽음과 절멸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무의식에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한사코 멀리 달아나려고 애쓴다. 죽음을 회피하고 부정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라는 걸 한 문화인류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이 엄청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획책을 다한다."(어네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 여기서는 토머스 캐스카트·대니얼 클라인의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에서 재인용)
죽음을 외면하거나 희미하게 하고 그 자리에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는 허망한 믿음을 들여앉히는 것은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다. 어떤 의학자들은 노화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통제하고 수명을 결정하는 주요 유전자를 연구해서 수명을 연장하려고 한다. 아마도 의학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성공하겠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지는 못한다. 붉은 포도주에 들어 있는 항산화제 성분인 레스베라트롤을 투여받은 초파리들은 그러지 않은 초파리군보다 더 오래 산다. 이는 레스베라트롤 속의 시트루인이라는 분자가 포유류의 노화 속도를 늦춘다는 사실과 부합되는 실험 결과다. 당신이 붉은 포도주 적당량을 날마다 즐겨 마신다면 다른 사람보다 천천히 늙고 오래 살겠지만 수명 연장에는 한계가 있다. 마침내 당신도 언젠가는 늙고 쇠약해져서 결국은 죽고 만다. 아무도 이 사실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불멸에 대한 사람의 관심은 사람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졌다. 사람들은 죽지 않는 불사약을 찾아냈다. 인도의 감로수(Amrita), 그리스의 암브로시아(Ambrosia), 3000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는 중국의 천도복숭아가 그것이다. 이것들을 먹고 마시면 사람은 젊어지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꿈이다. 그 무엇도 우리 DNA에 내장된 죽음을 어쩌지는 못한다. 아무리 수명을 연장한다 해도 결국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자체는 불변이다. 수명 연장책은 미망(迷妄)에 기대는 일종의 불멸 전략이다. 자신을 송두리째 미망으로 밀어 넣고 그 위에 '불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불멸 시스템'은 종교·철학·문학·예술·의학의 층위에서 동시적으로 시행된다. 초시간화하는 예술작품에 새긴 서명 속에서, 그리고 모든 종교의 "신-종교-영원-내세의 풀 패키지" 속에서. 왜?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니 살기 위해서. 사람은 제가 죽을 운명이라는 뻔한 사실을 부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잘 삶(well being)'은 곧 어여쁜 삶이다. 천상병 시인의 "요놈 요놈 요 이쁜 놈!"이라는 시구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향한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예찬이다. 이때 "어여쁨이란 대개 흐름, 생성, 순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놈 요놈 요 이쁜 놈!'이라는 자각 속에는 '요 이쁜 놈'을 통해 그 속에 있는 생명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 생명 속에서 내 생명을 확인하는 순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동일성을 통해 힘을 얻고 재충전되는 과정들이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이지훈의 '존재의 미학')
'잘 삶'은 '잘 죽음(well dying)'과 잇닿아 있다. 모든 삶은 결국 죽음과의 동거라는 맥락에서 그렇다. 어쩌면 죽음은 삶이 불가피하게 불러온 비루함과 남루함을 정화(精華)하는 마지막 의식이다. 종종 악인의 삶을 살았던 이들이 죽음의 자리에서 참회하는 게 그 증거다.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삶의 반쪽이다. 따라서 죽음이 존엄하다면 그 삶의 존엄성도 드높아진다. 100세가 되었을 때 곡기를 끊고 자발적인 죽음을 맞고자 했던 스콧 니어링 같이. 그는 삶을 연장하기 위한 어떤 의학적 도움도 거절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죽기를 원했다. 이런 죽음이 존엄함 죽음이다. 우리 앞의 운명인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삶을 반만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철학자 하이데거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왜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 할까. 내가 죽을 존재라는 걸 각성하는 일은 살아 있는 순간을 더 날카롭게 느끼도록 이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지금-여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죽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삶이란 이미 제 안에 품고 있는 죽음에 자기를 내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대자(對自)가 완전히 과거로 사라져 버린 즉자(卽者)로 영원히 변해 버린다는 것이다."
삶이란 가능성은 차츰 줄어들고 대신에 죽음은 삶을 자양분 삼아 제 몸피를 키운다. 이때 죽음은 실재가 아니라 불안이나 공포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하나의 관념, 혹은 추상이다. "사는 것은 자신을 내놓고, 자신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어가고 자신을 내놓는 일은, 곧 죽는 일이다. 번식 행위가 엄청나게 즐거운 까닭은 어쩌면 죽음의 맛을 미리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 생명의 정수가 조금 흘러나온 것을 미리 맛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과 결합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은 분열한다. 가장 친밀하게 포용할 때 가장 은밀하게 우리의 뿌리가 뽑힌다. 성애의 즐거움, 곧 유전적 경련의 본질은 타인 속에서 자신이 부활하고 소생한다는 느낌에 있다. 우리는 오로지 타인 속에서 자신을 소생시키고 이어갈 수 있다."(미겔 데 우나모노의 '생의 비극적 의미')
자, 우리는 살아 있다. 아예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났으니 얼른 죽을 것을! 이렇게 징징거릴 필요는 없다. 어쩌면 죽는 건 누구나 다 하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정말 어려운 것은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궁리해 봐야 한다. 젊은 나이에 죽은 영화배우 제임스 딘은 이렇게 조언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라.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고.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토머스 캐스카트·대니얼 클라인, '시끌벅적한 철학자들 죽음을 요리하다', 윤인숙 옮김, 함께읽는책, 2010
●케네스 J. 도카·존 D. 모건 엮음, '죽음학의 이해', 김재영 옮김, 인간사랑, 2006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 이진 옮김, 이레, 2008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2010
●이지훈, '존재의 미학', 이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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