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1> 악(evil)

2010. 8. 2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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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악의 역사군중은 악과 파시즘의 좋은 먹잇감… 혼란과 무질서에서 악은 자라난다

모든 악은 진부하다. 악을 향한 인류의 윤리적 저항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새롭지 않다. 이미 있었던 것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참척의 슬픔을 당한 임수경씨를 저주하는 인터넷 댓글을 단 이들이 멀쩡한 사람들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들, 누군가의 삼촌들, 누군가의 동생들이다. 그 '악플'에 드러난 벌거벗은 비열함과 야비함에 나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개인의 의식적 행동을 군중의 무의식적 행동으로 대체하는 현대 사회의 한 징후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악의 진부함이다. 내 삶이 개인의 의식적 행동을 군중의 무의식적 행동으로 대체하는 이 무리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 나 자신도 진리와 오류에 대한 분별 없이 오로지 자기 증식하는 군중에 포획될 수 있다는 인식론적 깨달음 때문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악'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복적이고 복수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와 피해자, 가해자를 열쇳말로 규정할 수 있는 이청준의 원작 '벌레 이야기'에 바탕을 둔 영화 '밀양'에는 악에 대한 피해자의 절규가 표현돼 있다.

사람은 저마다 고귀한 심연이지만 군중에 녹아들어 간 개별자는 이미 개인과 동일인이 아니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에 모여 열광하던 군중이 그러하듯 제 본래적 삶과 생각에서 떨어져 나와 군중에 녹아든 개인은 분별력과 창의력, 도덕적 품성과 취향의 고상함 따위를 쉽게 잃는다. 선에게는 악의 가면이 필요 없지만 악은 항상 선의 가면을 열망한다. 임수경씨의 이념이나 방북 행위를 두고 제 실명을 걸고 쓰면 비판이지만, 어둠 속에서 익명으로 쓰면 악플이다. 악플을 쓰는 사람들은 맥락을 잃은 사람이다. "맥락을 상실해버려 망가진 인간은 그저 부스러기로 살아가면서, 파편에서 파편으로 떠돈다."(막스 피카르트, '우리 안의 히틀러')

악은 인간 존재의 세포 단위에서 발호한다. 세포는 어떤 경우에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도덕의 위계에 포획되지 않는 그것은 욕망함 속에서 움직인다. 세포 단위에서 발호하는 악은 근절할 수 없다. "악은 바늘처럼 들어오고 떡갈나무처럼 뻗어간다"는 속담을 보라. 인류의 역사는 차라리 악의 역사다. 악은 일상 뒤에 숨은 괴물, 에일리언, 유령이 아니다. 악의 범속함은 일상에 녹아 있고, 일상과 함께 움직인다. 악은 사람과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우리 가까운 곳, 주변을 광기와 난센스로 떠돈다. 그것은 낯선 것, 새로운 것 뒤에 숨은 진부함이고, 타자의 순진한 얼굴과 미학적 숭고 뒤에 감춰진 기괴함이고 추악이다. "악은 무가 아니다. 단순히 무엇이 빠지거나 질서의 결여가 아니다. 악은 어둠의 권세다. 돌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거해야 할' 무엇이다."(폴 리쾨르, '악의 상징')

자, 여기 악과 용서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늦둥이로 태어난 아이가 한 악인에게 유괴된 뒤 살해당한다. 그 악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범인은 동네 주산학원 원장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내'는 아이를 잃은 고통을 누르고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한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내'는 내면에서 사투를 벌인다. 마침내 '아내'가 사형수로 복역 중인 범인을 찾았을 때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다. 범인은 이미 신에게 귀의하고 개과천선하여 누구의 용서도 필요치 않은 성인이 되어 있었다. '아내'는 그 상황 앞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이청준, '벌레 이야기')

피해자가 가해자를 향해서 베푸는 용서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악의 반복적 순환과 복수가 되풀이되는 일을 끊기 위해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용서만이 과거에 미래를 만들어준다. 용서가 숭고한 것은 그것이 "교환 경제학의 측면에서 불가능하고, 예측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것"(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위해서는 합리나 논리를 넘어선 초이성의 결단이 필요하다.

인간의 감정과 능력을 넘어서는 비범한 결단만이 용서에 이르게 한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서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베푸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피해자가 자기 구원을 위해 벌이는 필사의 몸부림이다. 그런데 신은 그마저도 앗아간다. '아내'의 절규는 그마저도 신에게 빼앗겨 버린 자의 절망과 그 납득할 수 없음에 대해 격렬한 항의를 보여준다.

혼란과 맥락 없음이라는 상황 속에서 악은 자라난다. 이 혼란과 맥락 없음 속에서 세계는 부스러져 내리고,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물들은, 맥락을 잃어버린 인간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막스 피카르트, 앞의 책) 히틀러는 질서와 연속성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내면으로 슬쩍 끼어든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특별히 노력할 이유도, 투쟁할 필요도 없다. 그저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가는 혼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움켜잡기만 하면 된다."(막스 피카르트, 앞의 책) 권력을 쥔 그 다음은? 히틀러는 자신에게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상징조작에 나선다. 권력의 위세를 과시하고, 미증유의 폭력과 학살로 제 존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히틀러란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 "악의 세계가 쏟아놓은 배설물"(막스 피카르트, 앞의 책)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 안에 숨은 히틀러도 그와 똑같이 혼란과 맥락 없음 속에서 발호한다. 무심코 인터넷 안에 악플을 쏟아낼 때 그 순간 당신 안의 히틀러가 바깥으로 돌출하는 것이다. 악플은 피와 저주, 과잉의 애국주의, 다름을 향한 분노와 증오의 수사학으로 자기 증식을 한다. 악플에는 부글부글 끓는 증오심들, 저급한 선동문화, 깊은 사유가 없는 피상성, '내 편이 아닌 모든 사람은 다 적이다'라는 식의 흑백논리가 돌출한다. 악플로 분출된 다중의 결집된 비정상적 열정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빈곤한 사유의 잔해들뿐이다. 악플은 다중에 휩쓸려 돌출함으로써 오늘날 악이 어디에서 어떻게 발호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악은 자유의 '바깥' 측면으로 사람에게 다가온다. (중략) 시험 또는 유혹의 구조다. 악은 사람 밖에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다. 칸트는 그러한 악의 외부성을 악의 중요한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죄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악은 2차적인 것이요, 악인은 시험에 걸려 악인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시험은 늘 있던 것이다. 지금 돌출되는 악은 이미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악의 시작은 알고 보면 악의 계속이다."(폴 리쾨르, 앞의 책) 악플은 이미 있던 것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악의 시작이 아니라 악의 계속일 따름이다.

양적인 무절제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깊이 느끼고 사유하는 '얼'이 빠진 사람은 파편에서 파편으로 떠돈다. 이 파편들로 이루어진 군중이라는 다중적 결집은 사회의 맥락 없는 소용돌이로 움직인다. 이 집단은 줏대도 규준도 없이 오로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와 같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 이들 속에서 지배적인 여론과 권력이 만들어지고, 이것을 틀어쥐고 제 잇속을 챙기는 집단이 나타난다. 한 방향으로 치닫는 군중은 늘 악과 파시즘의 좋은 먹잇감이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독재와 파시즘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리에 너무 쉽게 자기를 내주면 무리의 권력을 타고 홀연히 오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짐승'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어둠 속에서 악플을 쓰는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오염된 사람이다.

악은 오염 그 자체이고, 오염된 것이다. "오염의 구조는 자기에 의한 자기의 속박 이상을 뜻하고 있다. 오염은 파괴가 아니며, 퇴색시키는 것이지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오염의 상징은 뿌리깊은 악과 사람의 관계를 가리키며 인간의 귀착점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오염의 상징이 뜻하는 것은 악이 아무리 적극적이고 강한 시험이라 해도 사람을 사람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오염은, 사람됨을 이루었던 여러 가지 기능과 기질을 파괴하고 인간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때에 우리는 악이란 선의 대칭물이 아니고, 악함이란 선함의 대체물이 아니며 다만 인간 안에 있는 순결과 빛과 아름다움이 퇴색되고 희미해지고 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악이 아무리 뿌리깊다 해도 선만큼 근원적이지는 않다."(폴 뢰쾨르, 앞의 책) 최대다수에게 주어지는 최대행복이 선이라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최대다수에게 주어지는 최대행복의 원리로 작동하는 보편적 입법 규범들이 선이라면 악은 그에 반하는 것, 즉 소수자가 행복을 독점하고 최대다수를 희생시키는 것, 인류의 보편적 입법 규범에서 벗어난 의지의 준칙들을 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사소한 악들로 오염된 존재다.

그래서 철학자 니체는 인간을 극복되어야 할 존재로 본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염되지 않으려면, 악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피상성과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진정성에 굳건해야 한다. 스스로를 극복하라. 항상 진정성으로 돌아가라. 불연속성의 세계 속에서 의식의 깨어 있음, 자기 자신의 척도를 지키는 것, 내적인 통일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제 도덕성과 분별력을 키우고,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관용을 키울 때 가능해진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이청준, '벌레 이야기', 심지, 1988

●폴 리쾨르, '악의 상징', 양명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4

●막스 피카르트, '우리 안의 히틀러', 김희상 옮김, 우물이있는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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