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0> 사랑노래(love song)

2010. 8. 1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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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를 낳고 노래를 낳고…

어느 시대에나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랑노래가 있다. 양희은은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내 님의 사랑은', 1974)라고 노래했다. 고종석도 같은 말을 남겼다. "사랑은 외로움을 치료하는 행위이지만, 자주, 더 큰 외로움을 낳는다."(고종석,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사랑은 외로움의 발명품이고 외로움은 사랑의 파생상품이다. 사랑의 간절함이 도리어 외로움을 낳는데 이때 외로움의 이면은 고립, 유폐감, 소외이다. 사랑하는데 어느 순간 날카롭게 파고드는 외로움에 놀랄 수도 있겠다. 행동과 욕망의 과도함은 현실에서는 늘 비판받지만 유일하게 사랑 안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사랑은 아무리 꺼내 써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화수분이다. 사진은 첫사랑이라는 운명으로 묶인 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겨울연가'의 이미지 컷.세계일보 자료사진

"오직 과도함만이 여성이 몸과 마음을 내주는 것을 정당화한다."(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 이 과다함에서 다양한 역설들이 생겨난다. "정복하는 복종, 고뇌를 원하는 것, 눈 뜨고 있는 맹목, 기꺼이 병에 걸리는 것, 기꺼이 감옥에 갇히는 것, 달콤한 순교."(니클라스 루만, 앞의 책)외로움은 사랑의 과다함에서 비롯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사랑의 과다함은 사람을 환상에 빠뜨리고 현실에서 도망가도록 만든다. 그 과다함은 대상과 현실을 망각으로 이끌고 자기 환상에 빠뜨린다. 그리하여 사랑함 자체를 사랑하도록 만든다.

정작 사랑의 과도함은 사랑하는 대상을 비켜간다. "'외롭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다. 활달히 움직이고 있는 동작동사다. 텅 비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딜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낱말을 찾는다."(김소연, '마음사전')

사람은 사랑이라는 관계 속의 친밀함을 열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금빛 햇살 아래 갈매기가 되어 혼자 날고 싶어한다. 날기 위해서는 자유라는 왼쪽 날개와 사랑이라는 오른쪽 날개가 함께 필요하다. 우리가 죽음을 향하여 있는 존재이듯이 외로움도 뿌리칠 수 없는 실존의 본래 조건이다. 제대로 사랑을 하려면 도망가지 않고 그것을 투명하게 응시하기, 조용히 끌어안기, 그 너머의 세상 보기를 해야 한다.

신라시대의 사랑 노래는 어떨까. "붉은 빛 바윗가에/ 잡고 가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헌화가(獻花歌)') 이 시가는 누군가에게 꽃을 바치며 부른 노래다. 이것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신라 때의 노인이 지은 4구체 향가인데, 그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는다. 길옆에는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가 바다를 두르고 있는데 매우 높고 가팔랐다. 그 가파르고 높은 언덕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여 불붙는 듯했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이 철쭉꽃에 취해 그 꽃 한 가지를 갖기를 소원했으나, 벼랑이 높고 험해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지나가던 한 노인이 벼랑을 올라가 철쭉꽃을 꺾어 부인에게 바친다. 그리고 '헌화가'를 지어 불렀다는데, 그 노인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순정공과 수로부인이 임지로 가는 중에 두 번 기이한 일을 겪는다. 설화의 후반부에 가면 "수로부인의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깊은 산이나 큰못을 지날 때마다 번번이 신물(神物)에게 납치되곤 했다"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이 피납담은 수로부인의 용모가 자연에 깃들인 신들조차 홀릴 정도로 빼어나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준다. 꽃을 따 바치는 자가 노인이라는 것은 이 시가가 여성에게 바치는 구애의 노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단서다.

이 설화 속의 노옹은 촌로가 아니라 초자연적 존재다. 아울러 천길 벼랑 위의 꽃을 따다 바친다는 대목은 이 노인이 비범함을 드러낸다. '헌화가'에는 아름다움의 신비함과 초월성에 대한 신라인의 외경심에 가까운 탐미의식이 드러난다. 여자의 아름다움에 홀린 역신(疫神)이 여자와 동침한다는 처용설화나 비천한 지귀(志鬼)가 선덕여왕을 연모해 정념의 불로 탑을 태운다는 지귀설화와도 한 문맥 안에 놓고 볼 수 있겠다. '헌화가'는 사랑의 노래이되 초월적 존재와의 사랑 노래다. 사랑보다는 자연에 깃들인 신조차 불러내는 여성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을 담은 노래다. 수로부인의 요청에 화답해서 천길 벼랑에 올라 꽃을 따는 노인의 행위는 비장하며 영웅적이기까지 하다.

오늘의 사랑 노래들은 어떨까? 황동규는 '즐거운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이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저를 사소함에 묶어두고 대상을 이상화하는 소극성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차가운 이성(理性)이다. 이성은 사랑의 대상을 저 불가능의 지평 속에 두고 기다림의 자세로 일관하게 만든다. 그 사랑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일을 그대를 향한 한없는 기다림으로 바꾸었다는 이상한 언술이 생겨난다. '헌화가'에서 노옹은 수로부인의 요청에 자발적으로 응답하며 나아가는 능동성에서 빛나지만 황동규의 화자는 연모하는 대상과 거리를 두고 마냥 기다리며 자폐적 정서를 키운다. 저를 숨기고 연모의 대상을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풍경 속에서 훔쳐보겠다는 태도는 인격이 덜 여문 자의 관음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즐거운 편지'는 애틋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흔쾌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화자가 느끼는 즐거움이란 행동 없이 그저 고난이 예상되는 현실과의 매개가 끊어진 내면으로 도피하는 사람이 갖는 자학적인 즐거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너'는 오지 않는 존재, 다시 말해 부재의 존재다. 화자는 당연히 '너'의 부재의 공간 속에 놓여 있다. 화자는 부재하는 '너'를 기다릴 뿐이다. 이 애매한 소극성은 소월과 만해 이후 한국 현대시에 자주 나오는 부재하는 임(님)의 의미론적 맥락과 상통한다. 부재하는 임은 우리 근대사의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에서 누적된 부재와 상실의 상습화된 경험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없는 임은 자아가 빚어낸 비극적 정한에서 찾아내고 채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시인들은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임을 기다린다. 소월이나 만해 이후의 시인들은 이 피동적인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여전히 수난과 당당하게 맞서기보다는 여물지 못한 인격에서 나오는 감상과 자기연민에 갇혀 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우리 현대시의 화자들이 정신의 외부성을 갖지 못한 채 일인칭 리비도로 충전된 '나'의 사적 경험의 전유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성립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억압과 고통의 정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뚫고 '너'에게로 가 닿으려는 의지와 행동이 없는 이런 화자들은 수난과 고통의 책임을 외부에 전가한다. 기다림이란 욕망의 유예 속에서 대상을 욕망하는 소극적 정서다. 이 욕망은 사회화하지 못하고 반성할 줄도 모르는 사적 영역에 머무는 욕망이다. 이 피동성과 협소성은 필경 자아의 소외와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화자들은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재빨리 무책임한 자기변명과 도취적 정서로 도망감으로써 제 불행한 운명과 깨어진 사랑을 지나친 비극으로 장식한다.

최영미는 '가을에는'에서 이렇게 쓴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시인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으로 들어온다"고 쓰는 것은 마음에 파인 공허의 자리 때문이겠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는 시구는 외로움 탓에 무기력에 빠져 있음을 드러낸다. 어떤 경우에도 외로움을 핑계 삼아 의존적이 되는 건 치명적이다. 상대방을 소유·지배하려는 건 결국 관계의 종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배려, 상호 이해, 친밀감 만들기, 기대치의 의도적 감소, 유순함, 겸손, 정직성, 변함없는 충실성, 자기 갱신의 노력 등이 사적 영역을 공유하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들이다.

사랑은 시를 낳고, 노래를 낳는다. 사랑이 없다면 시인과 작사가들은 소재 빈곤에 허덕였을 터다. 사랑은 아무리 꺼내 써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화수분이다. 최근에 들은 사랑 노래 중에 이은미의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너 혼잔거니 물어 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 건가 봐/ 좋은 사람 있다면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애인 있어요', 2005)

사랑은 숨길 수 없고, 사랑의 말들은 유치하다. 사랑의 말들이 형이상학적 숙고에서가 아니라 수다에서 파생되는 까닭이다. "사랑이란 모든 감정 중 가장 수다스러우며 그 대부분이 수다로 이루어져 있다."(로버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수다의 씨앗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시와 노래들은 사랑의 한 본질인 수다의 압축이고 승화인 셈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 정성훈·권기돈·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9

●고종석,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6

●김소연, '마음사전', 마음산책, 2008

●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시공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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