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7) 김현(1942∼1990)
한국문학의 '뜨거운 상징'이자 비평계의 신화
좋은 문학은 오늘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 묻고, 나쁜 문학은 아예 물음 따위를 은폐해버린다. '오늘'이 허황된 수사학에 의해 가려졌다면 그 문학은 가치가 없다고 믿어도 좋다. 이때 '오늘'에 대한 이해는 간단하지 않다. '오늘'이라는 층위 안에서 지금-여기라는 뜻을 머금은 '현재'만이 아니라, '현재적 미래'와 '현재적 과거', '미래적 현재'가 삼투되어 '오늘'은 복잡한 양상을 띤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교통사고에 대비해서 미리 자동차 보험을 드는 게 '현재적 미래'에 속한다면, 과거사 진상위원회의 역사바로세우기 활동 따위로 이미 지나간 과거사 진실이 밝혀지며 현재의 규준들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현재적 과거'에 속할 것이다.
문학은 바로 그 복잡한 양상을 띤 '오늘'에 반향(反響)하면서 그것을 가로지른다. 아울러 문학, 그 위대한 이야기들은 바로 그것, 우리를 자주 의문에 빠뜨리던 과연 삶은 살 만한 것인가 하는 물음들 앞에 서게 한다. 우리를 바꾸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런 형이상학적 의문들이다.
하지만 문학은 권력으로 나아가는 지름길도 아니요, 출세의 방편도 아니다. 더구나 가난한 자의 주린 배를 채워주지도 못 하고, 폭력에 노출된 약한 사람들의 방패막이도 되지 못한다. 문학은 써먹을 수 없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그 써먹지 못함을 써먹는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들의 부정적 힘을 드러낸다.
그 부정적인 힘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한다. 문학은 그것을 논리로써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이나 혼의 울림'으로 보여준다. 즐거움 속에서 그런 인식이 마음에 젖고 스며들도록 해서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렇듯 타자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나와 타자가 실은 같은 존재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문학은 우리를 윤리적으로 계도하는 대신에 마음에 감동을 심어줌으로써 우리를 스스로 윤리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비평가 '김현'을 인문학 산책에 호명한다.김현(1942~1990)은 '문지 에콜'의 창업자, 후학 비평가들의 멘토로 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렸다. 그를 호명한 것은 그가 이미 비평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점, 그리고 마침 6월 27일이 그의 20주기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현'이란 이름보다 더 한국문학의 '뜨거운 상징'을 감당할 만한 이름을 찾기 힘든 까닭이다. 김현이 펼친 비평-이론-문학사의 핵심은 '당대적 맥락'에서 사유하기다. ' 새로운 것, 외국의 것을 우리 문학의 속성'('한 외국문학도의 고백', 1967)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그의 차가운 고백은 자기 한계에 대한 뜨거운 고해성사일 터다.
김현 비평의 지도에 남긴 사유의 여정은 사르트르·바슐라르·골드만 등을 거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문학사회학에 대한 급작스러운 관심에 이어 푸코와 지라르의 욕망이론에 이르는 궤적을 그린다. 이 궤적은 분석적 해체주의자 비평가로 일생을 보낸 그가 '외국' 문학에서 한국 '문학'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가 그 귀환에 성공하며 문학 보고서로 제출한 것이 '한국문학의 위상'이다. 얇지만 사유의 내공이 충실한 이 책은 우리 문학에 대한 도저한 자긍심으로 넘쳐난다. 마침내 김현은 1984년 무렵에는 '외국' 문학과 한국 '문학'의 경계 없음에 이르렀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비평행위를 '외국'을 리퍼런스 함으로 시작한 그의 내면에 숙변처럼 달라붙어 있던 문학적 딜레마를 털어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김현이 민음사에서 펴낸 '오늘의 시인 총서'나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최초 기획자라는 점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시집은 안 팔린다는 출판계의 그릇된 인식을 바꿔놓고 시의 문화적 외연을 확장하며 시가 문화의 전위에 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날렵한 판형, 값싼 보급판 장정, 파격적인 시인 선정, 날카로운 해설 등으로 시 독자의 평균 연령층을 낮추는데 기여했다.
김현은 4·19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평가다.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 있었다. 나는 거의 언제나 4·19세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
그것은 씁쓸한 인식이지만 즐거운 인식이기도 하다."('분석과 해석')라는 고백도 있거니와 열아홉 살 때 4·19혁명을 겪으며 제 안에서 싹튼 자유의지와 합리적 시민의식은 그의 사유와 분석과 해석이라는 잎과 열매를 낳는 씨앗이 되었다. 그는 '순수'와 '참여'라는 가짜 대립을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비평의 제국을 일군, 한국문학이 낳은 거장 비평가다. 김현에게 와서 비평은 비로소 창작에 업혀가는 비평이 아니라 저 자신을 의미화하며 제가 서야 할 영토를 만들었다.
그 사유의 유연함과 역동성, 한국문학을 종횡으로 가로지른 부지런함, 독자적인 스타일, 감각적 깊이 등으로 비평도 문학 장르의 황홀경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김현은 대체가 불가능한, 유일한 비평가다. 김현 비평은 직물 짜기에 견줄 수 있다. 텍스트와 제 체험·상상력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비평이라는 아름다운 피륙을 짜내는 것이다. 김현 비평은 거칠게 자르고 찢어 재단하고 양을 계측하는 비평이 아니라 텍스트를 감싸고 그 안으로 스며 주·객이 함께 공감을 일구는 비평이다.
얼마나 많은 시들이 김현 비평의 따뜻한 감싸기를 통해 감각의 깊이를 얻고 풍요해졌던가! 그는 거친 문장과 거친 사유를 미워했다. 그 '거?'이 대개는 폭력으로 변질하기 쉬운 속성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통속과 폭력과 문학을 유용한 도구로 바꾸려는 조급함을 미워하고, 작품의 결을 따라가는 섬세함과 '모호하고도 생생한 우글거림'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사유의 유연함을 사랑했다.
"문학은 써먹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유용하다"라는 유명한 에피그램을 남긴 김현이 육체의 집을 허물고 돌아간 지 20년, 그는 이미 비평계의 신화다. 그의 빈자리는 날이 갈수록 더욱 큰 공동(空洞이자 恐動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토록 많은 시의 공방(工房)들에서 하루도 망치소리가 끊일 날이 없음에도 한국 시가 침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를 보는 밝은 눈을 가진 김현 같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의 공방들은 늘지만 공방 작품들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품평해줄 명장(明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시와 비평은 활기를 잃고 깊은 침체에 빠져 마치 폐업한 상가 같이 적막해 보인다.
생전의 김현은 문학교도(文學敎徒)였다. 김현은 모든 것이 문학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고, 문학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해석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제 시간과 노고를 그 문학의 성전에 바쳤다. 그 존재 자체가 문학의 육화(肉化)였던 사람! 그리하여 김현이 생전에 설계하고 지은 비평집들은 우리 문학을 감싸는 외연(外延)으로 오늘의 비평이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울 성전이 되었다.
아울러 그 성전은 바깥으로 열려 있고 속으로 깊어지며 한국문학의 내면(內面)으로 건재하다. 김현은 한국문학 비평이 낳은 성자(聖者)다. 그는 바슐라르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늘도 내게 일용할 문학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나는 날마다 책을 쌓아놓고 읽으며 날마다 책상 위에 엎드려 뭔가를 끼적인다. 그렇다면 나는 확실히 김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문학교도이다.
장석주 시인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김현, '말들의 풍경', 문학과지성사, 2002●김현, '문학과 유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00●김현, '행복의 시학/제강의 꿈', 문학과지성사, 2000●김현, '한국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 문학과지성사, 2000●김현, '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 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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