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항쟁> ① 역사적 평가

2010. 6. 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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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남권 기자 = 굴욕적인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던 대학생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한 6.3 항쟁이 3일로 46주년을 맞는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지난달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은 무효'라는 성명을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하면서 6.3 항쟁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어느 때보다 더 높다.

항쟁은 1964년 3월24일 대학생들이 '밀실에서 이뤄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며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밀실협상은 계속됐고, 급기야 6월3일 성난 시민들까지 시위에 대거 가세하기 이르렀다.

거리로 쏟아져나온 1만5천여명의 시민과 대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시내에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어 박 정권은 시위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이명박(현 대통령)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비롯, 이재오(국민권익위원장), 손학규(민주당 전 대표), 김덕룡(대통령 국민통합특보), 현승일(전 국민대 총장) 등 시위 지도부 348명을 내란 및 소요죄로 붙잡아 철창에 가뒀다.

이러한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은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면서 한일수교 논란은 13년8개월 만에 `일방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6.3 항쟁은 이처럼 박 정권에 의해 진압되며 당장에는 좌절을 겪었지만 이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현대사에 면면히 이어진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는데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다.

특히 4.19의 저항정신을 계승하면서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과 1973년 유신체제 반대운동으로 이어지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유형렬 6.3 동지회 부회장은 "일본의 부당함에 맞서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3.1 운동의 맥을 잇는 동시에,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한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4.19 혁명의 정신을 계승했다"며 "특히 6.3 항쟁은 향후 군사정부 퇴진 운동에 첫 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일수교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분분한 것도 6.3 항쟁의 의미에 빛을 더해주고 있다.

한일수교는 경제개발을 위한 외화도입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물론 있다. 3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청구권자금)이라는 `종자돈'으로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전시 중 개인피해의 청구권이 소멸되면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대가로 받은 경제협력자금에서 개인배상금이 포함되지 않는 등 배상자금 규모가 적었고, 경제적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특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나 독도 문제 등 오늘날 `한일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미해결 현안을 큰 숙제로 남기면서 때만 되면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한.일 외교갈등의 씨앗이 된 실정이다.

일본과의 관계와는 별도로 6.3 항쟁이 민주화를 겪으며 선진화를 추구하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작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을 배제하고 국가가 독단으로 정책결정을 밀어붙일 때 국민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족의 생존이 걸린 대북문제나 국민의 살림살이와 직결된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등의 국가적 정책결정 과정에서는 투명성을 바탕으로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6.3 항쟁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46년 항쟁의 `주역'들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6.3 항쟁 정신을 자양분 삼아 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과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김덕룡 국민통합특보,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문희상 전 국회부의장 등이 정치권의 대표적 `6.3 세대'로서 현재도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6.3항쟁을 주도했던 주역 중 한 명인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보는 "4.19 혁명이 군사쿠데타로 좌절됐지만 6.3 항쟁을 계기로 3선개헌 및 유신개헌 반대, 광주민주화항쟁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민주화운동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며 "젊은 세대들이 6.3 항쟁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린다면 21세기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ou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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