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변사 신출.."제자가 없어"

2010. 4. 25. 08:2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8일 국립민속博서 '검사와 여선생' 해설(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야, 너 왜 학교는 안 가고 극장 앞을 왔다갔다해?"1940년대 초 평양 선교리의 극장 앞. 방황하던 한 소년이 기도주임(표 받는 사람)에게 딱 걸렸다. 의붓어머니가 한 살 아래 친아들에게만 흰 쌀밥을 주고 자기에게는 꽁보리밥을 주는 게 서러워, 쌀밥을 빼앗아 먹다 엄청나게 매를 얻어맞고 나온 터였다.

벌벌 떨며 기도주임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뜻밖에 "그럼 너 여기 극장 소제(청소)해!" 하는 것이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소년은 그날부터 김길자 악극단 공연이 끝나면 노래를 부르면서, 변사가 해설하는 영화가 끝나면 그 목소리를 흉내 내며 텅 빈 극장을 청소했다.

지금은 한국의 마지막 무성영화 변사로 남은 신출(본명 신병균.81)씨의 극장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28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검사와 여선생' 변사로 다시 마이크를 잡는 그는 2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자택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마지막 변사'로 살아온 삶을 회고했다.

당시 최고의 변사는 김선동이었다. 변사들은 사진주(필름 주인)와 함께 경성(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했다.

1929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는 신씨는 "그때는 김선동씨가 영화를 해설할 때면 늘 '어제'보다 '오늘' 관객이 많았다"며 "당시에는 이렇게 관객이 느는 것을 '게쓰아가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한데 150명 가까이 관객이 들어찬 어느 날, 영화 시작 시간이 다 됐는데도 김선동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다 '펑크'를 낸 것이었다.

초조해진 기도주임은 신씨에게 와서 "신꼬마 너 소제할 때 들어보니 목소리 좋고 크더라. 그대로 한번 할 수 있겠지?"라며 그를 변사 자리로 올려 보냈다. 그렇게 해서 당시 14살 신씨는 극장 밥을 먹은 지 2년 만에 얼떨결에 '대타' 변사로 데뷔하게 됐다. 자못 긴장될 만도 한데 그는 "어린 마음이라 그랬는지 아무 문제 없었다"고 그때의 느낌을 회상했다.

그때 처음 한 영화가 '장화홍련전'이라고 말했다. 데뷔작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라거나 '임자 없는 나룻배'라는 기록도 있어 되물어봤지만, 신씨는 "아니, '장화홍련전'을 먼저 했다"고 재차 말했다.

그 이후로 신씨는 김선동을 따라다녔다. 경성에도 가고, 흥남, 함흥, 신의주, 원산, 원주로 다니며 김선동과 번갈아 변사를 맡았다. 첫날 김선동이 변사를 해서 손님을 끌어모으면 신씨가 무대에 오르는 식이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다. 마침 해방 전까지 조선영화주식회사 경성출장소의 영사기사였던 큰형이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영화 필름들과 영사기를 손에 넣게 됐다. 또 당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발전기도 입수해 작은형에게 맡겨 돌리게 했다. 이를 가지고 세 형제는 전국을 돌며 영화를 틀었다. 물론 변사는 신씨가 맡았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던지, 장충동에 땅도 사놓고 포천에 극장도 하나 운영했다. 합동영화주식회사라는 회사도 차렸다.

그때쯤 윤대룡이라는 사람이 삼형제를 찾아왔다. 영화를 하나 찍을 테니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형제는 버는 족족 그에게 영화 자금을 댔고, 그래서 나온 영화가 유명한 '검사와 여선생'이었다. 형제는 그 영화의 판권을 사서 전국을 돌았다. 지금 국립영상자료원이 보관하는 '검사와 여선생' 필름도 신씨가 기증한 것이다.

"이거('검사와 여선생') 하나만 가지면 뭐 전국적으로 얼마든지 돼. 나이 먹은 사람들 내 목소리 못 들어본 사람 없을 거야."

본명이 신병균인 그가 예명을 신출로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경주에서 만난 극장주가 형에게 "만담가 신불출이 이북으로 갔으니 동생 예명을 '신출'로 합시다"라고 제안한 것이 계기였다. 포스터에는 '천진난만한 신출 변사', '천재소년 신출' 등으로 광고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신씨 형제가 내리막길을 걸은 것은 운영하던 포천의 극장에 화재가 나면서부터였다. 발전기에서 흘러나온 휘발유에 불이 붙으면서 불이 났는데, 문제는 이 불이 인근의 여러 집까지 다 태워버린 데 있었다.

그 바람에 필름도 대부분 팔고, 장충동 집도 팔아버리고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하지만 삼형제는 좌절하지 않고 극장 대신 천막 상영을 하며 다시 재기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신씨는 군에 붙들렸다가 얼굴과 다리에 총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회복되고 나서는 생계를 위해서 문화공보부에 영사기사로 취직하기도 했고,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쉬는 날이면 무성영화 변사로 무대에 올랐다. 주로 학교나 백화점 같은 곳에서 하는 행사였다.

지난 2004년에는 '변사'를 전수해야 한다는 의지에 따라 제자를 뽑기도 했다. 하지만 변사로 밥벌이가 어려운 탓인지 제자들은 배우기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모두 그만뒀다.

이제 80이 넘은 그가 세상을 떠나면, 한국에 변사는 더 이상 없다. 그에게 제자를 다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키우고 싶나 마나 배고프고 먹고 살기 바쁜데 어디 하겠다는 사람이 있겠나"라며 "내가 쫓아다니며 제자를 구할 수도 없고"라고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다.

얼마 전 일본에 가서 변사들과도 만난 그는 "일본은 참 대우가 대단한데…, 일본은 말도 못해요"라고 전하기도 했다. 일본에는 현재 20~30명의 변사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는 '아리랑'을 꼽았지만, 마지막으로 변사 해설을 조금만 들려달라고 부탁하자 '검사와 여선생'의 일절을 선보였다.

"오냐 사나이 우는 마음, 인정이 없는 여자로서는 모른다. 들어라 마시어라 탄식의 술잔이다, 마셔라."

comma@yna.co.kr < 뉴스의 새 시대, 연합뉴스 Live ><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 포토 매거진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