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이야기/4월 15일] 설유화 필 때
조팝나무에 하얀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꽃이 좁쌀을 튀겨 놓은 것 같아서 처음엔 조밥나무였다가 지금은 조팝나무가 된, 배고픈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꽃나무 이름이어서 더욱 마음 갑니다. 보릿고개 무렵에 이밥(쌀밥) 같은 꽃이 피는 이팝나무도 마찬가지지만 조팝나무 꽃 앞에서 꽃 속에 숨어 빛나는 남루의 색깔을 생각합니다.
평생 누더기 옷을 입고 오직 거문고를 벗하며 살았다는 신라 사람 백결 선생이, 가난하고 배고픈 아내를 위해 쌀 찧는 방앗공이 소리를 거문고로 연주한 것을 꽃으로 비유하자면 아마 조팝꽃과 같은 색깔일 것입니다. 조팝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입니다. 우리 나무, 우리 꽃이기에 더더욱 뜨거운 이 땅의 꽃입니다.
조팝나무 중에 관상용으로 심는 '가는조팝나무'가 있는데 꽃이 피면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아 그 꽃을 '설유화'라 부릅니다. 꽃이 피면 '꽃이 피었다'가 아니라 '눈이 내렸다'고 말하게 하는 꽃입니다. 이웃 마을에 설유화 묘목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분이 있습니다.
마치 성탄 전야의 산타클로스처럼 사월의 폭설을 선물하는 분입니다. 설유화가 필 때 은현리는 설국(雪國)으로 변합니다. 오늘은 은현리란 눈의 나라에서, 내게 늘 아뜩한 당신을 생각합니다. 한때는 차가운 슬픔이었지만 그 눈물에 찍힌 눈발자국을 따라 가다 만난 당신이라는, 저 하얀 꽃 앞에 섰습니다.
정일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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