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여행
여행을 떠나라 마음 속 황량한 들판으로
여행은 월경(越境),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시간에서 저 시간에로 넘어감이다. 저 상징적 횡단의 시발점들, 즉 공항과 역들의 문·문턱·창구·통로들은 늘 붐빈다. 그만큼 다른 공기를 숨 쉬는 기쁨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많은 것이다.
여행이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을 탐사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로구나." 첫 여자, 첫 키스, 첫 슬픔이 그렇듯이 여행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한 시인은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이진명)라는 도발적인 반문을 새겨놓는다. 우주의 시간여행자로서 사람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여행에 나선다. 이 삶이 편도여행이라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눈부신 사실인가!
여행은 장소들의 숭고함을 들이키는 문화적 행위다. 오랜 세월이 만들어놓은 절벽, 바다의 광활함, 사막, 고산(高山)들의 절경, 계곡, 황량하게 펼쳐져 있는 대지들조차 전능한 존재의 신비한 역할과 숭고함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재라면 자연은 재 속을 뚫고 나오는 불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왜 지금-여기에 있는지는 모른다. 자연이 품고 있는 숭고한 장소들은 지금-여기의 너머 저기에 있다. 저 너머는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이자, 우리의 내면에서는 이미 고갈되어버린 고요와 놀라움이 서려 있는 장소들이다. 우리는 그 시간과 장소들을 살아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떠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자연이 여행을 떠나지 않는 것은 자연은 고갈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나 고갈되는 것은 우리다. 어제 먹은 밥을 오늘 다시 먹고, 어제 잤던 잠을 오늘 다시 잔다. 반복들 사이에서 새로워지는 것들은 우리 안에서 오글거리는 근심이다. 근심들은 꾸역꾸역 몰려와 마음에 머물면서 존재를 갉아먹는다. 우리는 존재의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갉아 먹힌다. 존재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대신에 우리 안의 권태와 환멸은 뚱뚱해져서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해저(海底)로 가라앉는다.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그 속에 오래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부른 것은 큰 목소리가 아니다. 작은 속삭임들이다. 이것들은 낯선 것이기는 하되 우리 존재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중추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속삭임들, 먼, 속삭임들. 여행이란 우리 안의 낯선 속삭임들, 거기에서 나오는 불가사의한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17세기의 철학자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섭고 놀랍다. 나는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 다른 때가 아니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갖다 놓았는가?"(파스칼) 아무도 아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까닭은 여기가 아닌 저곳에서 이 생이 아닌 다른 생을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벗어나 치외법권 지대에서의 또 다른 생을 꿈꿀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다른 생이란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에서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호사(豪奢)와 고요와 쾌락"이라고 노래한,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의 생들이다.
일상의 반복과 제약들은 우리를 쉽게 지치게 한다. 그때 피로는 존재를 덮치는 작은 질병이자 고갈이다. 일상은 존재를 착취해서 헐벗게 만든다. 메마른 사고들이 판친다.
삶은 나날이 좀스럽고 피폐해진다. 육체의 고갈과 영혼의 고갈은 불가피하다. 어느 날 그 고갈과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으로 여행을 떠난다. 공항과 기차역, 그리고 여객선의 터미널들은 어디론가 떠나는 자들로 붐빈다. 그 장소들은 국경과 국경 사이에 가로놓인 문턱이자, 이곳과 저곳을 가로지르는 '사이'들이다. 이 '사이'를 통과할 때 우리는 존재의 질적인 변환을 겪는다. 이전의 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 형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김연수는 이렇게 쓴다. "공항에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나 자신 사이의 어떤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 둘은 같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다." 여행자들은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을 때보다 기후에 더 민감해지고, 어떤 전조(前兆)들에서 더 자주 영감을 받고, 더 계시적인 상상력을 펼쳐낸다. 그들은 여행을 떠나오기 전의 사람과는 마치 다른 사람과 같다. 여행이 그들의 무딘 감수성을 깨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라고 썼을 것이다.
도시에서 우리는 거의 유령들이었다. 유령들은 그 본질에서 무국적자들이다. 그러나 유령과 이방인은 다르다. 이방인들은 조국이 없는 자들, 혹은 조국을 버린 자들이다. "조국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은 향락주의자다. 온 대지가 조국인 사람은 이미 용기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온 세계가 유배지인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다."(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1993) 여러 지식인들이 제 고향에서 내침을 당한 뒤 온 세계를 유배지로 삼고 살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렇고, 발터 벤야민이 그렇고, 에밀 시오랑이 그렇다. 그 혼성적 지식인들! 굴원이 그렇고, 두보가 그렇고, 소동파가 그렇다. 망명의 고독을 내재화한다는 점에서 여행자들 역시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들, 즉 디아스포라(diaspora)의 운명을 품는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오르탕스 블루, '사막')
여행자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사이'의 존재들이다. 안과 바깥, 산 것과 죽은 것들, 떠남과 머묾, 나와 너, 영원과 찰나, 모순과 비모순, 있음과 있어야 함과 같은 대립하는 것들의 중간들을 거처로 삼는다. '사이'는 중간지대다. 중간지대는 개와 늑대가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곳, 여행자와 도둑과 부랑자와 살인자들이 섞여 떠도는 공간이다. 중간지대는 내 안의 야성과 길들임 사이의 카오스가 일어나는 지대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가는 자들은 제 신체에 새겨진 법과 권위, 관습의 포획에서 자신을 탈영토화하며, 반드시 이 중간지대를 지난다. 자크 데리다는 이 '사이'를 "정의되지 않은 방향 전환의 거처"라고 말한다. 사실 삶이란 것이 '사이' 아닌가! 대립하는 두 힘들의 '사이' 속에서 맹렬한 멀미를 느낄 때가 있다.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중간에 걸쳐져 있는 내 식어버린 마음의 복판에 어느덧 '사이'가 들어와 있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여행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행은 권태와 환멸의 형태로 주어진 삶의 모욕에 대한 보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떠나리라! 여행을 떠나려는 욕망은 때때로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갑자기 솟구치는 불꽃 같아서 무엇도 그 욕망의 격정을 잠재울 수가 없다. 낡은 정원도, 황량한 불빛도, 아이에게 젖 먹이는 젊은 아내도. 저기에 폭풍우와 난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떠나는 자들을 붙잡을 수 없다. 저 유명한 말라르메의 에피그램,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말라르메, '바다의 미풍')라는 구절은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의 계시(啓示)다. 여행은 낯선 곳, 미지의 시간을 향한 첫걸음이다. 우리 모두는 이 세계의 편도 여행자들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레비 스토로스, '슬픈 열대', 박옥줄 옮김, 한길사, 1998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정영목 옮김, 이레, 2004김연수, '여행할 권리', 창비, 2008파스칼, '팡세', 이환 옮김,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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