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25> 양주회암사 선각왕사비 복원

2010. 3. 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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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檜巖寺) 터는 경기 양주시 회천읍 회암동 산 일원에 남아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 인도 고승인 지공(指空)이 창건했는데 고려 우왕 때인 1376년 지공의 제자인 나옹(癩翁)이 다시 세웠고 조선 세조의 왕비 정화왕후의 명으로 3번째 건립되어 번창한 국가적인 사찰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머문 유명 사찰이었으나 16세기에 들어와 유교를 숭상하는 유생들이 불도 지르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맥이 끊겨 이제는 그 터만 남았다.

학자들의 문헌 조사를 통해 그 내력이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사찰의 규모와 특징에 대한 조사연구는 없었고 다만 사찰 터에 남아있는 선각왕사비, 당간지주 등 보호를 위해 사적 128호로 지정해 관리해 오고 있다.

특히 나옹의 업적을 새긴 선각왕사(禪覺王師)비가 보물 제387호로 지정되었다. 선각은 나옹이 죽은 후에 받은 시호(諡號)이고 비의 글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짓고 비의 글은 조선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중화(權㑖和)가 쓴 것으로 유명하다.

보호각 속에 잘 보존돼 온 이 비는 하지만 1997년 3월 30일 성묘객의 부주의로 일대에 일어난 산불에 보호각이 완전이 타면서 비도 함께 파괴되었다. 비의 보호를 위해 목조의 보호각을 마련한 것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크게 입었던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보호각이 없었다면 참담하게 불타는 피해는 모면했을 것이다. 문화재보존의 어려움을 일깨워 준 사례이다.

이 산불을 계기로 회암사 터를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져 문화재청과 양주시가 서둘러 전체적인 정비복원 계획을 마련했고, 그 해 가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해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불에 타 처참하게 파괴된 산각왕사비부터 복원을 서둘러야 했다.

복원을 맡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 팀은 그때까지 화재를 입은 석조문화재의 복원은 물론 불탄 대리석 문화재를 복원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우선 불탄 잔재를 옮겨 놓을 장소조차 마련되지 않아 별도의 가건물을 마련했는데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2003년 대전 문지동으로 옮겨감)는 현재의 경복궁 고궁박물관 북편에 있었다.

외국의 사례는 물론 열을 받아 손상된 것을 복구하고 바스러질 운명에 처한 파편들의 경화처리에 따른 실험 등을 거쳐 결국 3년여의 복원 작업 끝에 일단 완성했다. 그리고 2001년 경기도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다 지금은 서울 종로의 조계종 성보박물관으로 이관 보관하고 있다. 현재 회암사 터에 세워져 있는 석각왕사비는 1998년 새로 만들어 세운 모조 비이다.

회암사지 자료관도 곧 완공될 예정이다. 선각왕사비 복원은 보존과학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연구가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문화재의 화재예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남겼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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