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교주'길버트 아레나스 스토리 上

2001년 12월의 어느 날,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홈구장 오라클 아레나.골든 스테이트의 벤치에 앉아 있던 약관의 루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데뷔 이후 단 2경기에 교체 출장한 것에 그치고 있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했다. 좀처럼 코트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코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팀 훈련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되레 자신보다 못한 기량을 선보인 베테랑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갈 무렵, 그는 자신이 대학 시절 활약하던 모습이 담긴 테이프들을 돌려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그는 없었다. 눈을 번뜩이며 팀원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담기 위해 노력했고,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그 동안 소속팀인 골든 스테이트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했고, 브라이언 윈터스를 신임 헤드코치로 임명했다. 원터스는 부임 이후 팀의 리빌딩을 위해 젊은 선수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벤치에서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도 조금씩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교체 멤버로 꾸준히 코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쉽사리 내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데뷔 이후 48경기만에 첫 번째 선발 출장의 기회를 얻더니, 9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하기도 했다.
팀의 시즌 마지막 27경기에 연속 선발 출장하며 입지를 다진 그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시작했고 4월 한 달 동안 팀의 9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16.5득점, 4.7리바운드, 6.1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이 달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어떤 선수로 성장하게 될 지, 어떤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될 지를 예측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길버트 제이 아레나스 주니어 (Gilbert Jay Arenas Jr.).훗날 'Agent Zero'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게 될 길버트 아레나스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길버트 아레나스.그는 1982년 LA의 San Fernando에서 태어났다. 아레나스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약물 중독에 빠졌고, 이후 그는 아버지 길버트 아레나스 시니어(Sr.)와 함께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던 근육질의 조연 배우였다. 배우로써 인상적인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몇 차례의 영화 출연과 CF 모델 활동 등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동시에 어머니 없이 자라나고 있는 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레나스가 탈선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사랑이 있었다.
아레나스에게 처음 농구를 접하게 해준 인물 역시 아버지였다. 아레나스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농구공을 선물 받은 그는 농구의 매력에 매료되어갔다. 마이애미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아레나스는 뛰어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다. 이후 그랜트(Grant)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농구 선수로의 삶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의 득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레나스는 입학 이후 연일 고득점 행진을 이어갔다. 신입생이던 해에 시즌 평균 22.5득점을 기록하더니 이후 29.8득점, 33.4득점으로 그 숫자를 늘려갔다.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이미 교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4년 동안 총 2124점을 득점하며 학교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아레나스가 NCAA에서도 성공 스토리를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우선 고등학교에서의 활약상만으로는 농구 팬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줄 수 없었다. 그랜트 고교는 인근의 페어팩스(Fairfax)나 콤튼 도밍게즈(Compton Dominguez) 같은 농구 명문 고교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학교였기에 그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고 있었다. 덧붙여 빠른 생일로 인해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필연적으로 체격적인 부분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학업에 무관심했던 탓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만큼의 SAT 성적을 얻을 수 있을 지에 대한 여부조차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 공격적인 리쿠르팅에 나섰던 농구 명문 애리조나 대학에 의해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입학 제의를 받았고, 곧바로 제의를 받아들이며 진로를 최종 결정지은 아레나스였지만 대학에서의 활약은커녕 입학 가능성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아레나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낼 때, 단 한 사람만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농구는 물론이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만큼의 SAT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아레나스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SAT 점수를 취득하게 됐고, 농구 명가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백넘버 '0'
천신만고 끝에 애리조나 대학교 입학에 성공한 아레나스였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레나스가 약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겉멋만 들었을 뿐, 실력은 형편없을 거라며 그를 비웃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출장 시간이 0분에 그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억측들은 아레나스를 무릎 꿇게 만들지 못했다. 되레 그는 자신의 백넘버를 0번으로 결정하며 보란 듯 NCAA 무대로 뛰어들었다.
프리시즌이 시작되자 아레나스를 비웃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스는 프리시즌 첫 경기에서 22득점을 퍼부으며 인상적인 데뷔에 성공했고, 이후에도 맹활약을 계속하며 프리시즌 MVP에 등극해버렸던 것이다.
1999-2000시즌의 애리조나는 로렌 우즈, 마이클 라이트, 리차드 제퍼슨과 같은 재학생들과 아레나스, 제이슨 가드너, 룩 월튼 등의 신입생들이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전력을 뽐냈다. 아레나스는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평균 32분의 출장 시간을 기록했고, 평균 15.4득점을 기록하며 우즈, 라이트와 함께 팀 내 스코어링 리더로 맹활약했다. 애리조나는 27승 7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아레나스는 코트 안에서의 맹활약은 물론이고, 코트 밖에서의 재미있는 모습들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팀원들과 학우들에게 고대시를 인용한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교내 신문에 우스꽝스러운 메세지를 싣기도 하고, 유니폼을 마음대로 잘라 입고 나와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소포모어 시즌이 되자 아레나스는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0-01시즌 동안 평균 16.2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애리조나를 NCAA 토너먼트 파이널 무대에까지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정작 파이널 무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힘없이 물러났다. 상대팀이었던 듀크 대학은 막강한 전력으로 애리조나를 물리치고 전미 챔피언이 되었다.
비록 파이널 무대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아레나스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대학 무대에서 이룰 것이 없음을 직감했다. 처음 애리조나에 입학할 당시에는 당연히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단 2년 만에 NCAA 파이널 무대를 밟아본 아레나스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짧았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결정을 만료했지만, 아레나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댄 페건을 에이전트로 고용하며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좌절과 상처의 드래프트

'엄청난 사거리를 자랑하는 롱 레인지 점퍼와 훌륭한 운동 능력, 빠른 스피드와 타고난 득점 감각에 대한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슈팅가드로 뛰기에는 신장이 너무 작고, 포인트가드로 뛰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슛 퍼스트 마인드의 콤보 가드.'
얼리 엔트리를 선언한 아레나스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대개 이러했다. 지역 방어의 허용, 핸드 체킹 강화 등의 룰 개정으로 과거에 비해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이 갖는 가치가 높아졌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새로운 룰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기에 여전히 콤·/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애리조나 재학 시절, 아레나스는 포인트가드가 아닌 슈팅가드로 플레이했었다. 걸출한 포인트가드였던 가드너가 그의 동기였기 때문이다. 해서 드래프트를 목전에 둔 아레나스에게는 포인트가드로의 포지션 전환에 대한 성공 여부 또한 커다란 이슈이자 성공의 걸림돌로 비춰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각종 워크아웃에 임했다. 아레나스가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던 것에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얼리 엔트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아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며 동분서주 아들의 기량을 알리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아레나스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농구 인생을 위해 과감히 이를 거절했다. (아레나스의 아버지가 캐스팅을 거절했던 캐릭터에 최종 낙점된 인물은 'Laurence Fishburne', 우리에게 '모피어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였다)
이처럼 아레나스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 역시 아들의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 때 아레나스 부자에게 접근해오는 팀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새크라멘토 킹스.
2001년 드래프트 당시 1라운드 25번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새크라멘토는 아레나스에게 '네가 25번 이후에 지명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레나스와 아버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드래프트 준비 과정에 만족했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드래프트 중계를 지켜봤다.
2001년 NBA 드래프트. 드디어 새크라멘토가 보유하고 있는 1라운드 25번 지명권의 주인공이 호명될 차례가 다가왔다. 짧지만 긴 침묵이 흐르고,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Sacramento Kings select, Gerald Wallace from the University of Alabama."
결국 1라운드 지명권 행사가 모두 끝이 나도록 아레나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고, 이후 2라운드 31번 픽으로 그를 지명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NBA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레나스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도 드래프트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다음 편에 계속…]
글_ 송석규 NBA 웹진 뛰어닷컴 칼럼니스트 ( rap1324@naver.com)사진_ 아디다스 코리아 제공일러스트_ 김태형 작가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09-10-31 송석규 NBA 칼럼니스트( www.ddue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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