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학자들이 함께 재조명한 임진왜란

2009. 9. 1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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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여수서 한ㆍ일 국제학술회의(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면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떠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일본의 학자 13명이 모여 19일 임진왜란의 주전장의 하나였던 여수의 오션리조트에서 한일문화교류기금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임진왜란을 주제로 한일 양국이 함께 하는 학술대회는 흔치 않은데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그동안 간과해왔던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맥락에서 임진왜란을 재조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한중 관계 전문가인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임진왜란 전 '이적(夷狄)'으로 치부되던 일본과 여진의 위상이 왜란 후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한 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표문에서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과 후금이라는 두 '이적(夷狄)' 국가가 떠오르고 중화질서의 주재자인 명의 위상이 실추됐다"면서 "조선은 명ㆍ청ㆍ일 삼국으로부터 밀려오는 외압에 맞서기 위해 악전고투를 해야만 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일본은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가운데 내부의 안정을 다지는데 몰두할 수 있었고 명에게 도전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서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해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며 전쟁에 집중하는 와중에 만주의 여진에 대한 견제력은 약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명ㆍ청 교체기 조선에서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해 망해가는 나라를 도와준 은혜(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해야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 호란을 겪었다며 "조선으로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기타지마 만지 일본 교리츠여대 교수는 이순신이 집필한 '난중일기'를 분석해 포작인(鮑作人.남해 연안 거주인), 항왜(降倭.투항 일본군) 등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러 유형의 일반인의 모습을 소개했다.

난중일기에는 수군 병사, 수군을 지원했던 목수 등 기술자들의 모습, 전란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에 왜적으로 변장하고 약탈행위에 나선 민중 등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포작인 등 해안가 주민이 바다를 잘 알고 있어 이순신의 수군을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포작인은 자신들의 생활체험에서 조류의 간만이 심한 경남과 전남의 해로와 암초가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다"면서 "이순신은 바다를 잘 알고 있는 이들 포작인이 필요했으며 그런 만큼 격군에 편성된 포작인이 도주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다"고 말했다.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임진왜란 이후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나타난 임진왜란 시기 조선 백성의 피해사례를 분석했다.

삼강행실도에는 겁탈에 저항하다 사지가 잘리고 살해당한 부인, 아이에게 젖을 먹이다 목을 베인 어머니 등 일본군이 저지른 각종 만행이 수록됐다.

손 교수는 삼강행실도를 통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이 커졌다면서 "이러한 인식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조선에 대한 외세의 침략이 시작될 때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으로 이어져 조선의 근대화에 장애가 됐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호리 신),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구바 다카시) 등이 발표된다.

kimyg@yna.co.kr < 실시간 뉴스가 당신의 손안으로..연합뉴스폰 >< 포토 매거진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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