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무죄 판결 후폭풍 거세다

고제규 기자 unjusa@sisain.co.kr 입력 2009. 6. 4. 10:18 수정 2009. 6. 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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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편법 승계 의혹에 시달려온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 일가가 10년 만에 사실상 법적 굴레를 벗었다.

대법원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5월29일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과 관련해 이 전 회장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상 배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대법원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 사건은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파기 환송심에서 손해액을 다시 산정해 50억원을 넘으면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가 적용돼 유죄가 확정되지만 지난해 7월 1심 판결처럼 50억원 미만이면 업무상 배임 혐의가 적용되면서 공소시효(7년)가 만료되어 면소 판결이 난다.

에버랜드 사건의 무죄 판결이 확정되면서 이 전 회장 일가를 괴롭혀온 경영권 편법 승계 논란이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제기한 법학계에서는 논란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법학계에서는 '삼성'이라는 변수를 빼면 유죄라는 주장이 여전히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86~88쪽 인터뷰 참조).

경영권 편법 승계 의혹의 핵심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이다. 비상장 회사인 에버랜드는 1996년 10월 주당 최저 1만4825원에서 최고 23만4985원대인 이 회사 전환사채를 주당 7700원에 헐값 발행했다. 이후 이건희 당시 회장 등 삼성 전·현직 임원으로 이뤄진 개인주주와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8개 계열사 및 계열 분리된 법인주주들이 인수를 포기한(실권) 뒤, 같은 해 12월3일 이재용 전무 등 이 회장의 자녀에게 배정했다.

이 전무 등은 그해 12월17일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에버랜드 주식 64%(125만4777주)를 획득했다. 결국 이 전무 등은 당시 96억원으로 자산총액 8000억원이 넘는 에버랜드의 지배권을 넘겨받았다. 나아가 이 전무가 에버랜드의 최대 주주가 된 뒤 에버랜드는 삼성생명 주식 확보에 들어가 이재용→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완성하면서, 이 전무는 수백조원대 가치를 지닌 삼성그룹 경영권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법학계가 들고 일어났다. 2000년 6월29일 곽노현 한국방송대 교수 등 법학교수들은 이 전 회장 등 에버랜드 임원진 33명을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고발 뒤 4년 동안 '폭탄 돌리기'를 하며 손을 놓고 있던 검찰은 시효 만료를 하루 앞둔 2003년 12월1일 허태학·박노빈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사장 두 명만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허태학·박노빈은 2005년 10월4일 1심, 2007년 5월29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두 사람의 상고심 재판이 진행되던 지난 2007년 10월 삼성 법무실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 선언을 했다. 그 결과 삼성특검이 활동에 들어갔고 이 전 회장을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과 관련해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법학계 장외 공방 치열

그러나 지난해 7월16일 이 전 회장에 대한 1심 판결과 10월10일 2심 판결은 허태학·박노빈의 1·2심 판결과 180° 달랐다. 기존 판결을 뒤집고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하급심 판결이 엇갈리면서 대법원 판결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이 사건의 핵심은 단순하다. 과연 주식과 맞바꿀 수 있는 전환사채를 시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으로 발행한 것이 회사에 손해를 끼쳤느냐이다.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면 이사들은 임무를 위배한 것으로 배임죄에 해당한다.

이 논쟁은 법정뿐 아니라 법학계에서 장외 공방이 치열했다. 허태학·박노빈 1심 판결 이후 이철송 한양대 교수(법학)는 2006년 7월 '자본거래와 임원의 형사책임'(<인권과 정의> 359호)에서 유죄 판결을 비판했다. 이 교수는 "전환사채 발행과 인수는 손익거래와 무관한 자본거래에 해당해, 전환사채를 저가로 발행해도 회사 재산은 실질적인 증가(순증)가 있어서 (회사에) 손해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회사의 손해나 이익과 관련된 손익거래가 아니라 기업의 내부에서 주주 간에 이루어지는 투자를 조정하는 자본거래이기에 배임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주주우선배정 방식으로 전환사채나 신주를 저가에 발행하든 고가에 발행하든 에버랜드 회사 처지에서 보면 재산이 늘었기에 손해를 입지 않았고, 이사의 업무상 배임죄도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교수의 이런 논리는 허태학·박노빈뿐 아니라 이건희 전 회장 재판까지 삼성 변호인단의 논리와 똑같다.

장덕조 서강대 교수(법학)는 2006년 10월 '전환사채의 저가발행과 회사의 손해'(<법조> 610호)에서 이런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장 교수는 "회계학 개념인 '자본거래'를 끌어와 전환사채 저가 발행이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라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회사법적 시각에서 보면 저가 발행으로 회사에 손해가 발생한다는 명제가 정당한 법리이고 판례이다"라고 비판했다.

기존 판례나 법학계에서는 회사를 독립된 실체(법인격)로 보아, 에버랜드 전환사채가 7700원인 헐값이 아니라 적정가로 발행됐다면 회사 처지에서 그만큼 더 자산이 늘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해 장래에 취득할 이익을 상실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를 소극적 손해라고 하는데, 에버랜드 전환사채도 저가 발행에 따른 그 차액만큼 회사가 손해를 봤기에 이사의 배임죄가 성립한다는 논리이다.

예컨대 주당 시가 10원을 받을 수 있는 신주나 전환사채를 주당 1원에 10주 발행했다고 치자. 회사 처지에서는 10원으로 발행했다면 자산이 100원 늘었겠지만, 헐값인 1원에 발행해 결국 10원밖에 늘지 않아, 그 차액인 90원만큼 소극적 손해를 봤기에 배임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게 장 교수의 핵심 주장이다. 검찰이나 조준웅 특검은 장 교수 주장과 똑같이 주당 8만5000원 시가보다 크게 낮은 7700원에 전환사채를 발행·배정 받아 이재용 전무 등은 이득을 얻었고, 에버랜드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며 이 전 회장, 허태학·박노빈 등을 배임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장 교수의 반박에 이 교수는 2006년 12월 '자본거래와 임원의 형사책임 재론'(<법조> 609호) 논문에서 재차 반박했다. 이 교수는 "1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시가 주당 2만원, 5000주를 발행해 조달한 경우와 주당 1만원으로 1만 주를 발행해 조달한 경우 회사에는 똑같이 1억원이 들어왔기에 저가로 발행하든 고가로 발행하든 회사에는 어떤 손해도 생겼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

2006년 법학계에서 벌어진 장외 공방은 이건희 전 회장 재판이 진행되면서 법정으로 옮아붙었다. 이 전 회장 재판 과정에서 특검과 삼성변호인단은 두 교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법리 다툼을 벌였다. 두 교수의 논거는 실제 판결문이나 각각 항소 이유서의 주요 골자를 이루고 있다.

절차상 문제 등은 중요하지 않다?

허태학·박노빈 1, 2심 판결은 장 교수 쪽 논리인 소극적 손해를 인정했다. 특히 특경가법상 배임죄를 적용한 2심 재판부는 장 교수 쪽 논리와 가장 유사했다. 그러나 기존 판결을 뒤집은 이건희 1·2심 판결은 이철송 교수의 논리와 가깝다. 이는 또 변호사 때 허태학·박노빈 변호를 맡아 전원 합의체에서 빠진 이용훈 대법원장의 논리이기도 하다. 변호사 시절 이 대법원장은 허태학·박노빈 1심 재판부에 '전환사채 발행은 자본거래로 주주와 관련이 있을 뿐 회사의 손익과는 무관하다'는 변론서를 낸 바 있다. 특히 주주배정이든 3자 배정이든 자본거래로 회사 손해를 입지 않는다고 밝힌 2심 재판부 판결이 이 교수의 논리와 가장 유사했다.

마지막 최종심인 대법원은 5월29일 이 교수의 주장과 같이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은 주주우선 배정이고, 에버랜드에는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전환사채 발행을 결의한 이사 정족수 미달 등 절차상 문제나 기존 주주 실권 과정에 비서실 개입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신영철 대법관 등 여섯 명이 무죄로 보았고, 반면 박시환·김영란 대법관 등 다섯 명은 주주배정이 아닌 제3자 배정으로 회사가 손해를 입었다며 유죄 취지의 소수 의견을 냈다. 한 명 차이로 유·무죄가 갈린 셈이다.

대법원 판결로 법적 심판은 끝났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두고 법학계에서 비판은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진실을 좇는 학자는 최종심도, 공소시효의 제약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고제규 기자 /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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