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잇는 사람들] <3>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오옥진씨

2009. 4. 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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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잃은 나무에 문명의 魂 새기다

꿈 새기는 장인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철재 오옥진씨가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각자 작품을 만들고 있다. 각자를 위해 조각은 물론 서예와 한학까지 연마한 그는 "나무에 글씨를 새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樂天知命 和光同塵오옥진씨의 각자 작품 '낙천지명(樂天知命) 화광동진(和光同塵)'. 천명을 즐기고 빛을 감추고 세속에 섞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목판(木板)에 글씨를 새기는 공예를 각자(刻字)라 하고, 그러한 기능을 가진 장인을 각수(刻手), 또는 각자장(刻字匠)이라 한다. 각자는 정서각(正書刻)과 반서각(反書刻)이 있다. 정서각은 공공건물이나 사찰 또는 재실에 거는 현판 등 글자를 목판에 그대로 새기는 것이고, 반서각은 인쇄하기 위하여 글자를 뒤집어 새기는 것을 말한다. 즉, 생기 잃은 나무에 전통 방식으로 살아 있는 문명의 혼을 새겨 넣는 작업인 셈이다. 나무에 꿈을 새기는 예술이다. 중요성이 인정돼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이번에 만난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철재 오옥진(75)씨다.

봄기운이 꿈틀대는 지난 주말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오씨의 공방을 찾았다. '낙천지명(樂天知命?천명을 즐기고) 화광동진(和光同塵?빛을 감추고 세속에 섞인다)'이란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반평생 나무를 껴안고 살아온 예인답게 한 자리에서 굳은 듯 글을 새기는 모습이 거룩하기까지 했다. 곧 있을 전시회에 낼 작품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기에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나무에 글을 새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각자 작업은 크게 치목(治木), 배자(配字), 각자(刻字) 등 세 가지 공정으로 나뉜다. 치목은 인쇄나 작품용으로 쓰이는 돌배나무, 현판용으로 쓰이는 은행나무?피나무 등 용도에 맞게 나무를 고르는 과정을 뜻한다. 요즘은 수입목도 많이 사용한다. 나무를 정하면 바닷물에 담가 건조과정을 거친다. 건조는 온도나 습도의 변화에 나무 형태가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치목 과정을 거친 나무는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표면을 고른 다음 글씨를 늘어놓는다. 이를 '배자'라 한다. 비교적 간단한 배자 과정이 끝나면 작업의 하이라이트인 '각자' 과정에 돌입한다. 칼과 끌, 망치 등을 사용해야 하는 이 과정은 글씨의 맛과 특징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예인의 손길오옥진씨가 끌과 망치를 이용해 각자 작업을 하고 있다.
각자 도구들오옥진씨가 사용하는 다양한 각자 도구들.
가훈 필통오옥진씨가 가훈의 내용을 담은 필통을 살펴보고 있다.

오씨가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50년대 말 군생활을 마친 뒤 당시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있던 국립중앙직업보도원의 목공예과를 1기로 졸업하면서부터다. 조선시대 말기 면암 최익현 선생과 가깝게 지냈던 증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아이들을 위한 학습용 서책을 만들기 위해 각자를 했고, 이것이 가문에 면면히 이어져 각자장 오씨의 토양이 된 것이다.

60년대 기업체 등에서 목공예 일을 하다 70년 서각을 하던 신학균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각자의 길에 들어선 오옥진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한창 물이 오른 그는 단순히 주어진 글씨만을 새기는 일에서 벗어나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서 서예를,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서 한문을 익혀 자신만의 독특한 각자세계를 이루게 된다.

오씨는 자신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해 목판에 새긴 조선시대 서울 그림지도인 '수선전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와 79년 돌배나무를 책판의 재료로 써서 만든 '훈민정음 영인본'(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을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다. 또한 90년 말 경복궁 복원공사 때 지어진 자선당 등 6개의 현판작업과 2006년 10월 현판식을 한 조계사의 일주문 현판작업도 잊지 못할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세상 떠난 아들과 다정했던 모습각자의 길을 함께 걸어오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아들과 작업을 하고 있는 오옥진(오른쪽)씨 부자의 다정했던 1990년대 중반 모습.

각자인들의 모임인 '철재각연'을 조직해 80년 첫 철재각연전을 개최한 이후 매년 자신과 제자, 회원들의 작품을 한데 묶어 전시활동을 해온 오씨는 국내 전시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작가들과도 교류하는 전시회를 통해 한국전통의 각자를 세계에 선보이고 있다.

훈민가'아버님 날 낳으시고'로 시작되는 훈민가 작품.
萬物新오옥진씨의 각자 작품 '만물신(萬物新)'. 모든 것이 새롭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평생 즐거운 마음으로 나무와 싸워 왔다고 자부하는 오옥진씨는 요즘, 지난해 화마로 잿더미가 된 숭례문의 현판 복원을 위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숭례문 현판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이라면서도 구슬땀을 흘리는 그를 보면 왠지 믿음이 생긴다.

남은 삶도 사람의 혼을 나무에 새기는 각자 작업에 바치고 싶다는 노대가의 은은한 미소 속에 전통 각자에 대한 자신감이 뚝뚝 묻어난다.

글?사진 허정호 기자 h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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