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사리장엄구는 백제유물" 주장한 한정호씨 "왕궁리 5층석탑도 백제탑"

2009. 3. 2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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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통일신라 말∼고려초기 건립설은 잘못"석탑해체 보수성과통해 드러난 구조 비교설명

"왕궁리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백제 것이라는 것을 100% 확신했습니다. 당시 파격적인 주장이었지만 저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한정호(39·사진) 동국대 경주캠퍼스박물관 연구원은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가 백제 유물이라는 주장을 2005년에 한 학술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당시 통설은 사리장엄구가 8∼10세기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됐다는 것이었기에 그의 주장은 다소 파격적이었다. 한 연구원의 이 같은 주장은 지난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대세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639년 백제 무왕시대에 제작됐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은 미륵사 사리장엄구는 왕궁리 사리장엄구와 흡사하다. 따라서 왕궁리 사리장엄구가 백제 유물이라는 것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백제인이 300년을 더 살았다면 모를까 백제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유물이었습니다. 백제 금속공예는 유려함과 정교함이 특징입니다. 또 백제 사리기는 순금이 많이 사용됐다는 특징이 있어요. 신라가 사리기에 순금을 사용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리신앙이 삼국시대 유행한 것으로 볼 때 왕궁리 사리장엄구가 백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위)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등 백제 유물.

한 연구원은 이번엔 왕궁리 석탑 자체도 백제탑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그는 지난 21일 열린 신라사학회와 국민대 공동 학술대회에서 "미륵사지 발굴을 통해 왕궁리 석탑도 석탑 구조에 있어 목탑을 바꾼 게 아니라 원래 백제 석탑인 게 확실해졌다"고 말했다. 왕궁리 5층석탑에 대해서는 통일신라시대 말∼고려 초기에 백제시대 목탑이 있던 곳을 뜯어내고 현재의 석탑을 세웠으며, 그 양식에서 백제 전통을 따랐다는 이른바 '백제계 석탑설'이 학계에서 통용돼 왔다. 한 연구원은 "미륵사지 석탑 사리 봉안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이 아니라 '백제의 석탑'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궁리 5층석탑이 백제의 석탑이라는 근거는 바로 석탑 내부구조에 있다"면서 "1965년 석탑 해체 보수 당시 드러난 석탑기단 내부의 구조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내부구조를 그대로 축소한 백제 석탑이기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궁리 5층석탑을 백제시대 유산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제기한 적이 있지만, 한 연구원은 미륵사지 서탑 해체 보수 성과를 통해 드러난 구조를 서로 비교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는 현재 부여에 있는 탑을 연구 중이다. 이 탑 역시 백제 탑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올 하반기 발표할 예정이다. 그는 "현재 백제탑으로 알려진 것은 미륵사지 탑과 정림사 5층 석탑밖에 없다"며 "왕궁리 석탑과 지금 연구 중인 부여 탑도 백제 것이라고 판명된다면 백제시대부터 이후까지 탑의 변형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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