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연극인 이민재의 선(禪)과 무(舞)

2009. 1. 1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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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거나 격렬하게

연극배우 이민재에게 2008년은 제법 괜찮은 한 해였다. 무자년 새해 벽두 < 굿모닝 배뱅이 > 공연으로 시작, 12월 17일부터 21일까지 인천 학산소극장에서 공연한 < 리어왕 > 으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연극 인생 40년, 그동안 숱한 작품에 출연하고 연출도 맡았지만 작년 한 해 주연으로 출연한 이 두 편의 작품은 그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 굿모닝 배뱅이 > 는 그가 지난 10여 년 가까이 미쳐 있었던 춤을 가미한 뮤지컬 공연이었고, < 리어왕 > 은 말 그대로 40년 연극 인생을 결산하는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2009년 또한 그에 못지않다. 1949년 기축년 생이니까 올해로 육십갑자를 맞는다. 그 반은 지금의 아내 '꽃(그는 아내를 '꽃'이라고 부른다. 꽃처럼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꽃보다 아름다워서다)'과 함께 해온 세월이다. 올해 다들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자기 띠인 소띠해이니만큼 소처럼 '느긋하면서도 힘차게' 헤쳐 나갈 자신도 있고, 가난 속에서도 고락을 함께 해온 가족이 뒤에 든든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뒤늦게 시작했지만 그에게 제2의 인생을 펼쳐준 춤의 세계가 있다.

그가 50이 넘은 나이에 새삼 '댄스'에 빠져든 것은 순전히 아내 때문이다. 1969년 연극에 뛰어든 이래, 그에게는 대표작이랄 수 있는 < 왕이 된 허수아비 > 를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무려 823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마감한 후 그에겐 자신의 연극 인생에 대한 전환이 절실히 필요했다. 한참 마당놀이 같은 놀이극에 빠져 있던 때라 처음엔 그 계기를 마술과 같은 새로운 놀이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배울 여건도 마뜩지 않았고 그 세계가 너무 가볍고 단순한 듯해서 중도에 그만두었다. 다음으로 공부삼아 시작한 것이 상고사 연구. 처음엔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것이 인생 공부로 발전했다. 3년 동안 참선에 매달리기도 하고, < 주역 > 과 사주팔자까지 파고들면서 세상 이치를 깨우치려 했지만 그 답을 알 듯 모를 듯 미궁 속을 헤매고만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매일같이 어두컴컴한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꼴이 답답했던지 어느 날 아내가 바깥공기도 쐴 겸 가까운 문화센터에라도 나가보라고 그를 내몰았다. 마지못해 한 문화센터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거기서 뭐 들을 만한 게 없을까 뒤적이다 문득 사교댄스 강좌와 만났다. 그게 2001년의 일이다. 춤에 대한 인연이 아주 없던 건 아니다. 예전에 현대극회 소속으로 있을 때 극단에서 연기에 도움이 된다 하여 춤선생을 불러다 사교댄스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시시껄렁한 댄스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던 그는 '2 대 8 가르마'의 춤선생 눈을 피해 몇몇 동료와 막걸리나 먹으러 다니곤 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사교댄스 강좌를 신청한 그는 강의실로 들어서다 기겁을 했다. 그 강좌의 수강생은 한 40여 명쯤이었는데 남자라고는 자신이 유일했다. 어쩌면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네들이 득시글한 세상에서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기겁을 한 것은 다른 수강생들이었다. 남자 수강생이라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50줄의 나이에 그것도 무슨 도인인 양 허리춤에 닿을 듯 치렁치렁한 머리에 한복 차림이라니. 그는 그냥 뻘쭘했고 다른 수강생들은 신기한 듯 쑤군거렸다. 그래도 연극인이랍시고 다행히 수줍음은 타지 않은 탓에 오히려 보란 듯 그 차림새 그대로 강좌를 다녔다.

그렇게 춤과 인연을 맺은 그는 갈수록 생각지도 않았던 춤의 매력에 빠져 들어갔다. 자이브나 룸바, 때로 고요하고 때로 격렬한 댄스의 세계는 그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어떤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온갖 구박을 받으며 아들놈의 도움을 얻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가며 혼자 연구하기도 하고 틈만 나면 아무데서나 스텝에 몸을 싣기도 했다. 결국 그는 댄스교사 자격증, 그것도 국제 자격증을 얻어 아예 춤선생으로 나서기로 했다. 자격증을 따는 데 필요한 250만 원이라는 돈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내가 선뜻 어디선가 조달해주었다. 6개월간 하루 16시간씩 '빡시게' 연습한 끝에 국제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것도 65점 합격선을 훨씬 뛰어넘는 90점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막상 자격증을 따고도 어디다 써먹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의 광대 인생 자체가 생활인의 눈으로 보면 무위하기 짝이 없는 것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면 그의 광대짓 발단에도 춤이 있었다. 충남 온양(지금의 아산)이 고향인 그는 다섯 살 때 읍내에서 열린 '이충무공 추모제전'에 누군가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가 거기서 열린 민속공연을 보았다. 부채춤이나 선녀춤 따위로 눈이 휘둥그레 했지만 정작 어린 그의 눈을 잡아끈 것은 딴 데 있었다. 공연이 끝난 무희들이 우르르 무대 뒤편으로 몰려가기에 슬쩍 따라가 봤더니 그들은 주최 측에서 나눠준 카스테라 빵을 받아먹는 게 아닌가. 그때 그는 결심했다.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나도 저들처럼 되리라고.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광대 인생은 몸짓 이전에 빵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나 할까.

고등학교를 마치고 배우가 되겠다고 무작정 상경한 것 자체가 이미 무모한 짓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는 자신의 얼굴이 '개성 있는' 게 아니라 '잘생긴' 줄로 철썩같이 믿었다. 그래서 < 춘향전 > 에서 자신이 '이도령'이 아니라 '방자'나 '이방' 역에 캐스팅되는 것도 모두 연출자의 눈이 삔 것쯤으로 여겼다. 나중에 겁 없이 극단을 차린 것도 그 '눈 삔' 연출자들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연출과 배우를 맡는 게 낫겠다는 무모함 때문이었다. 그 무모함은 이후로 이어지는 숱한 가시밭길에서도 계속되었다. 다행히(?) 비록 가난한 촌부이면서도 어엿한 '전주 이씨 가문'임을 내세우기 좋아하셨던 완고한 아버지는 자식이 그런 꼴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그의 연극 인생 40년 자체가 이미 연극이었다. 극단이랍시고 차려놓고 무대에 올리기로 했던 첫 작품이 유신헌법에 의한 긴급조치 9호 때문에 '퇴폐'로 걸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심의는 통과했지만 연습이 안 된 다른 작품을 맡아 대신 무대에 올린 일은 그 서막에 불과했다. < 아 아빠, 가엾은 우리 아빠, 엄마가 아빠를 옷장 속에 매달아 놓았어요. 그래서 나는 너무 슬퍼요 > 라는 전대미문의 긴 제목을 가진 아더 코피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에는 연극 입장료가 450원으로 정해져 있었음에도 1000원으로 올려 받는 등 한바탕 무용담을 펼치기도 했다. 그래도 그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 어떻게든 연극을 못하게 하려고 '이 작품이 실패하면 연극을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받고 제작비를 빌려주었던 누나들의 기대를 물거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대박'에 취해 연장에 연장 공연을 강행하다가 폐결핵에 장티푸스가 겹쳐 죽다 살아나기도 했다. 그후의 일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새해를 맞는 연극배우 이민재는 행복하다. 남들은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춤만 해도 그렇다. 네 살짜리 유치원생부터 여든네 살 노인대학 어르신까지 다양한 제자들로부터 '짱'으로 불리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간 그에게 춤을 배운 제자가 2500명이 족히 넘는다. 과천으로 동두천으로, 또 자기 극단 겸 댄스스쿨인 '예당'에서 쉬지 않고 스텝을 밟아봐야 한 달 수입이라곤 고작 120만 원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연극 인생 40년 동안 얼마간을 빼놓고는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일 없는 게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스스로 즐기면서 벌이도 하는 지금이야 오히려 '화려한 나날들'이다. 그리고 그 힘들은 다시 무대에서 쓰일 것이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댄스극을 만들어보는 게 그의 소망이기도 하다.

요즘도 그는 가끔 가부좌를 틀고 참선에 든다.

운문선사가 이르기를, 생각이 일어날 때 죄가 일어나니라. 학승이 묻기를, 그렇다면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어떻습니까? 운문선사가 다시 답하기를, 그 죄가 수미산만큼 크니라.

그에게 있어 1800공안 중 '수미산'은 여전한 화두지만 그에 빠져 있지만은 않는다. 도리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파설(破說)일 뿐이다. 말이 끊긴들 그 언저리라도 있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더라도 차선이라도 있다. 그는 선(禪)에서 눈을 뜨면 곧바로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춤이고 연극이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피하지 못할 바엔 그를 즐기면 그만이다. 새해에는 어우러져 사는 모든 이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니 힘들수록 신명으로 그를 되레 즐길 수는 없는 것일까.

<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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