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역설] 1934년 문일평 일기

2008. 10. 17.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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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백승종의역설

일제 때 일기로는 거질의 <윤치호 일기>가 손꼽히지만, 두께도 얇고 내용도 간단한 문일평(1888∼1939)의 일기가 내게는 더욱 가슴 절절하다. 문일평은 언론인이었지만, 그가 쓴 글의 내용을 가지고 말하면 역사가였다. 지조 높은 선비요,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역사 대중화에 힘써 정치사부터 외교사, 풍속사 및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일기는 1934년(47살) 한 해의 기록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를 짧게 기록한 것이 일기의 대부분이다. 역사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그는 손수 자료를 베끼고 번역하고 요약하는 일로 늘 아등바등했다. 시대가 흉흉했던 만큼 직장 분위기도 어두웠고 생계도 늘 곤란했건만, 과음으로 결근이 잦았다.

일기 속의 문일평은 전통과 근대의 경계를 서성인다. 그는 선비의 체통을 지키느라 아내에 대한 속내를 한 번도 털어놓지 못한 채, 그녀의 그림자만 서너 번 일기장에 비추었다. 자기를 괴롭힌 상사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욕설 한 마디 못했다. 워낙 도덕적 자기검열이 강한 그는, 영락없는 조선의 옛 선비였다. 문득 그러다가도 근대적 교양인으로 돌변해 딸과 며느리를 걱정하는 자상한 말투로 일기장을 채웠는데, 아마도 신교육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장에 일본인이 없다는 사실은 정말 뜻밖의 발견이다. 그가 묘사한 식민지 조선은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세상이다. 사무실과 거리에서 매일같이 마주쳤을 숱한 일본인의 자취가 일기장 어디에도 없다. 식민지의 통치자들은 이국의 거리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때로 유령들의 사령탑인 총독부는 그의 기사를 삭제했지만 그저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문일평은 거세된 지식인이었다.

지금 이 정권은 근현대사 교과서의 수정을 요구한다. 조선총독부와 재벌의 눈으로 우리의 기억을 전유하려 드는 그들에게 문일평 일기를 권한다. 유령의 시대를 한번 공감해보고 나서 말씀하시라.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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